'안주인'이라고 마냥 집에 있을 수만은 없다. 제18대 대선이 채 넉 달도 남지 않은 지금, 청와대 '안주인' 자리를 향해 후보 부인들 사이에서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시종일관 싱거운 승부 끝에 새누리당 후보로 확정된 박근혜 의원은 여성인 데다 독신인 만큼 '안주인 경쟁'과는 아예 거리가 멀다. 만일 박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사상 처음으로 안주인 없는 청와대가 탄생한다.

현재로서는 민주통합당 대선 경선에 뛰어든 손학규 문재인 김두관 정세균 후보와 장외의 안철수 서울대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등 5명에게만 '안주인 전쟁'이 해당된다.

유력 후보들의 부인들은 공식석상에서 남편의 곁에 다소곳이 서 있는 '전통적인' 내조에서 벗어나 토크쇼 출연, 언론 인터뷰, 행사장 방문 등 보다 적극적이고 다양한 방법을 통해 '왕 만들기'에 주력하고 있다.

한 대선후보 캠프 관계자는 "대통령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후보만큼이나 부인의 역할도 크다"고 전제한 뒤 "후보 부인은 너무 튀어도 곤란하지만 너무 소극적이어도 곤란하다. 후보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영역에서 유권자들에게 진솔하게 호소한다면 득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렁이각시' 이윤영

손학규 후보의 부인인 이윤영(66)씨는 이화여대 약대를 나온 약사다. 손 후보가 민주화 운동으로 오랜 기간 수배생활을 했던 터라 가정 생계는 이씨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했다. 손 후보와 이씨는 지금도 전셋집에서 산다.

7년 간 열애 끝에 1974년에 손 후보와 결혼한 뒤 가장 역할까지 했던 이씨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좀처럼 대중 앞에 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우렁이각시'.

결혼 후에도 두 사람의 가정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손 후보가 경찰의 추적을 피해 숨어 다니느라 두 사람은 얼굴조차 보기 어려웠다. 이씨는 약국 주변을 감시하는 경찰을 따돌린 뒤 어린 딸들을 데리고 어린이대공원으로 가서 남편과 만나곤 했다.

'우렁이각시' 이윤영씨가 요즘 들어 많이 달라졌다. 상당히 적극적인 행보로 남편을 돕고 있다. 손 후보 캠프는 '손학규 후보의 부인, 이윤영 여사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진행한 인터뷰 동영상을 트위터 등에 올리고 있다.

미셸 오바마
또 이씨는 최근 한 여성지의 인터뷰에 응하는 등 손 후보의 인간적이고 서민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씨는 지난 12일에는 강원 화천에서 열린 이외수 문학관 개관식에 손 후보와 함께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이씨는 남편에 대해 "경기중고에서 밴드부, 연극부 활동을 했을 만큼 낭만적이고, 감옥을 드나들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사람"이라며 "풍족하지는 않아도 소신대로 열심히 사는 모습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천생 여자' 김정숙

민주당 주자들의 부인 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사람은 문재인 후보의 부인인 김정숙(58)씨다. 김씨는 지난 1월 SBS 오락프로그램 '힐링캠프'를 비롯해 각종 TV에 출연하면서 일부 네티즌들 사이에서 "귀엽다" "천생여자"라는 평을 들었다.

특히 김씨는 지난 12일에는 한 케이블 채널 토크쇼에 나와 문 후보를 "재인씨"라고 부르는 등 7년 간의 연애와 결혼에 얽힌 뒷이야기를 솔직하고 재미있게 풀어냈다.

앤 롬니 AP=연합뉴스
김씨는 지난 9일에는 서울 가리봉동 지구촌사랑나눔 본부에서 이주민 무료급식소에서 배식 봉사를 했다. 이에 앞서 지난 3일에는 전남 순천에서 지역 대학생, 여성활동가 등과 간담회를 열고 "억울한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줄 후보가 바로 문재인"이라며 지지를 호소했다.

경희대 음대에서 성악을 전공한 김씨는 대학 1학년 때 법대 3학년이던 문 후보를 만나 캠퍼스 커플이 됐다. 두 사람은 유신시절 함께 시위를 다니면서 관계가 발전했고 1981년 마침내 결혼에 골인했다.

지금은 왕성한 활동을 하는 김씨이지만 문 후보가 참여정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재직할 때는 동창회에도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괜한 구설에 오르지 않기 위해서였다.

'살림꾼' 채정자

김두관 전 경남지사가 지난달 8일 전남 해남 땅끝마을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한 이후 부인 채정자(51)씨는 남편 못지않게 동분서주하고 있다. 채씨는 지난 9일에는 당직자들과 간담회를 갖고 '김두관 본선 필승론'을 강조했다. "선거는 가족이 함께하는 것"이라는 게 채씨의 지론이다.

채씨는 지난 17일 고(故) 장준하 선생 37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데 이어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 3주기 휘호ㆍ어록전에 김 후보 없이 홀로 참석했다. 이에 앞서 채씨는 지난 9일에는 경남 밀양시 송전탑 건설 반대 농성장을 방문해 농성 중인 지역 주민들과 만나 여러 이야기를 경청했다. 두 사람은 10년 간의 연애 끝에 지난 1987년에 화촉을 올렸고 이때부터 채씨는 김 후보의 든든한 동지가 됐다. 김 후보가 남해군수가 될 때까지 채씨는 해장국집, 양품점 등을 운영하며 자녀 양육과 남편 뒷바라지를 도맡는 등 살림꾼을 자처했다.

'이장에서 대통령까지'를 꿈꾸는 김 후보만큼이나 이들 부부의 러브스토리에도 사연이 많다. 채씨는 고교 1학년 때 사촌의 소개로 두 살 위인 김 후보를 만났고, 이후 10년 간 이웃집 오빠와 동생으로 지내던 두 사람은 결국 부부의 연을 맺었다.

2년 전 6ㆍ2 지방선거 때 채씨의 강행군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채씨는 당시 수술을 받아야 할 만큼 몸이 좋지 않았지만 선거를 앞둔 남편에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고, 선거는 물론 취임식까지 치른 뒤에야 비로소 제대로 치료를 받았다.

'조용한' 최혜경 김미경

정세균 후보의 부인 최혜경(58)씨는 유력 정치인의 부인들 중 가장 조용하다. 대선 정국에 접어들었음에도 최씨는 좀처럼 외부 공식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최씨는 이화여대 영문과 재학 시절 미팅을 통해 정 후보와 만나 백년가약을 맺었다. 정 후보가 대기업 임원, 국회의원, 각료 등을 거치는 동안에도 최씨는 자녀 양육과 가정 살림에만 전념했다.

안철수 원장의 부인인 김미경(49)씨는 서울 의대 교수다. 안 원장은 최근 자신의 저서를 통해 "서울대 의대에 함께 재학하던 시절, 가톨릭 학생회에서 의료 봉사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연애했다. 진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며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고 김씨를 소개했다. 김씨는 안 원장의 1년 후배이다.

대학 졸업 후 성균관대와 삼성서울병원에서 15년 간 병리학 교수 겸 전문의로 활동했던 김씨는 10년 전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김씨는 워싱턴 주립대, 스탠퍼드대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마침내 변호사 자격증을 따냈고, 2008년 귀국 후에는 카이스트를 거쳐 서울대 의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남편의 근황은 기사를 통해서 안다"는 김씨이지만 '내조의 여왕'으로 손색없다. 1995년 안 원장의 회사가 어려워져 직원들 급여조차 지급하기 힘들어지자 김씨는 월급봉투를 통째로 내놓는 등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외부 활동보다는 내조


역대 청와대 안주인들은…
육영수- '청와대 내 야당'
이희호- 활발한 복지 활동

최경호기자

역대 퍼스트레이디 10명은 대체로 외부 활동보다는 내조에 치중한 편이었다. 이른바 전통적인 어머니상과 맥을 같이 한 것이다.

이명박 현 대통령의 부인 김윤옥 여사는 조용한 가운데에서도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는 스타일이다. 김 여사는 지난해 6월 홍콩의 유력지인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에 '아시아 여성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통해 녹색성장의 중요성을 알렸다. 녹색성장은 현정부 국정운영의 기조다.

박정희 전 대통령(1963~1979년 재임)의 부인인 육영수 여사는 '청와대 내 야당'으로 불렸을 만큼 입바른 소리를 많이 했다. 청와대 안주인으로서 이미지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는 육 여사는 민심을 읽기 위해 많은 비서실을 운영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전두환 전 대통령(1980~1988년 재임)의 부인 이순자 여사는 교육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새세대육영회'와 '새세대심장재단'을 설립해 유아 교육과 심장 수술의 발전에 공헌한 게 좋은 예다.

하지만 세간의 평은 그리 좋지 못했다. 지나치게 화려하고 거만한 외모로 위화감을 풍긴 데다 친인척들이 줄줄이 비리에 연루되는 등 '도덕적'으로 큰 결함을 남겼다. 한때 '연희동의 빨간 바지'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이 이 여사를 따라다녔다.

전 전 대통령에 이어 청와대 주인이 된 노태우 전 대통령(1988~1993년 재임)의 부인인 김옥숙 여사는 '있는 듯 없는' 듯했다. 김 여사는 노 전 대통령 재임 기간 단 한 차례도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을 만큼 '조용하게' 지냈다. 김영삼 전 대통령(1993~1998년 재임)의 부인 손명순 여사도 김옥숙 여사와 비슷했다. 손 여사는 5년 동안 수행원, 운전기사, 여성 직원 등 청와대 직원들을 위한 복지시설 확충에 노력했다.

"안사람이 너무 나서면 안 된다"는 말을 김 전 대통령에게 자주 들었다는 손 여사는 그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방광염, 백반증 등으로 고생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1998~2003년 재임)의 부인 이희호 여사는 민주화 운동의 선구자답게 청와대 입성 후에는 복지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이 여사는 결식아동을 돕는 사단법인 '사랑의 친구들'을 출범시키는 등 김 전 대통령 재임기간 사회적 약자와 소외 계층을 돌보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2003~2008년 재임)의 부인 권양숙 여사는 노 전 대통령의 취임 직후 '조용한 청와대' 만들기에 주력했다. 권 여사는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명예위원장을 맡는 등 대외 활동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1948~1960년 재임)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외국인이었지만 한국 여성보다 더 한국적인 내조를 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행동은 일절 삼갔던 것으로 전해진다.

윤보선 전 대통령(1960~1962년 재임)의 부인 공덕귀 여사는 한국 최초의 신여성이자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한 교수 출신이지만 국내 정치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최규하 전 대통령(1979.10~1980.8 재임)의 부인 홍기 여사는 사상 최단 기간(249일) 청와대 안주인이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홍 여사 역시 대외활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백악관 안주인 전쟁도 '후끈'


'적극적인 유세' -'눈물샘 자극' 앤 롬니

최경호기자

대선이 넉 달도 남지 않은 미국에서도 안주인 경쟁이 치열하다. 백악관 안주인 자리를 놓고 달라도 너무 다른 와 앤 롬니가 정면대결을 펼치고 있다.

현직 대통령의 부인인 는 하버드대 출신 변호사답게 전문직 여성의 당당함이 트레이드마크다. 그는 오바마 못지않은 왕성한 활동으로 득표에 나서고 있다.

"우리가 믿는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오바마가 얼마나 열심히 싸우고 있는지 모든 사람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는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의 아내로, 서민의 딸로 누구보다 서민들의 고충을 잘 헤아린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일각에서는 "지나치게 정치적인 접근"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공화당 미트 롬니 후보의 부인인 앤 롬니는 언제나 남편의 유세현장을 함께한다. 민주당 오바마 대통령에게 도전장을 낸 롬니 후보는 "사랑하는 제 아내 앤을 소개합니다"로 유세를 시작한다.

자녀 5명과 손주 18명을 둔 전업주부 앤 롬니는 공화당 전통적 지지기반인 보수 중산층이 바라는 여성상에 가깝다는 평이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유한 사업가 출신 정치인과 결혼한 앤 롬니의 약점은 돈이 너무 많다는 데 있다. 요즘처럼 어려운 때 과연 서민들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이런 지적들을 의식하기 때문인지 앤 롬니는 "아이들 키우기, 빨래, 시장 보기, 밥하기 이런 모든 일들을 다 내 손으로 해왔다"고 강조하다. 또 그는 최근에는 난치병인 다발성 경화증을 앓고 있다고 고백함으로써 유권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최경호기자 squeez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