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정위, 신용카드 '불공정 약관' 칼 뺀다제멋대로 약관 악용 시정키로 분실·도난시 처리비용 부담개인정보 제3자 제공 등 불리한 내용 개선소비자 권리 강화 예고

'신용카드 범람' 또는 '신용카드 폭발'의 시대다. 2003년 국가 경제를 위협했던 '카드대란'이 무색하게 우리나라는 또다시 신용카드의 홍수를 맞이하고 있다. 여신금융협회 통계에 따르면 올해 3월 기준 발급된 신용카드는 총 1억1,566만장에 달한다. 경제활동인구가 2,500만명인 점을 감안하면 국민 한 사람당 4장 이상의 신용카드를 소지하고 있는 셈이다. 짧은 전화 한 통이면 우편으로 신용카드를 받을 수 있는 간단한 가입 절차 덕분이다.

흥미로운 점은 가입절차의 간편함과는 무관하게 신용카드를 사용하기 위해 '반드시' 인지했어야만 할 약관이 무척 길다는 점이다. 분량 자체가 만만치 않은 데다 어려운 금융 관련 용어로 쓰여있어 소비자 대부분이 꼼꼼히 확인하지 않고 약관에 동의한다.

문제는 소비자들이 약관을 건성으로 읽는 것을 신용카드사들이 악용한다는 점이다. 이에 따른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야 비로소 약관을 확인하는 경우가 다반사인 소비자들로서는 생각 없이 '확인란'에 표기한 자신을 원망할 뿐이다.

이 같은 소비자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가 칼을 빼들었다. 신용카드사의 '제멋대로' 약관을 손보겠다는 것이 공정위의 의도다.

공정위는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으로부터 심사의뢰를 받은 신용카드 등의 여신금융 약관 375개를 심사, 그 중 11개 유형의 불공정 약관(16개 금융사, 총 57개 약관조항)을 개선하기 위해 금융당국에 시정을 요청했다고 12일 밝혔다. 여신전문금융업법(이하 여신법) 제54조의3(약관의 개정)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공정위의 요청에 응해 시정에 필요한 조치를 해야만 한다.

공정위 측에 따르면 신용카드 거래의 중요 특징인 부가서비스ㆍ리볼빙서비스 및 개인정보 제공 관련 불공정을 시정한 이번 시정 조치로 소비자의 권리가 한층 강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이번에 문제가 된 것들과 유사한 조항에 대해서도 함께 수정하도록 금융당국에 요청, 신용카드 약관이 전반적으로 소비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개선될 것으로 전망된다. <주간한국>에서는 이번에 공정위가 개선에 나선 11개 조항 중 대표적인 것들을 일상적인 예를 들어 살펴봤다.

영화관 할인 갑자기 없어져

경기도 안산에 사는 김모씨(33세)는 여자친구와 오랜만에 영화관에 들렀다. 김씨가 자주 다니는 영화관은 대형 멀티플렉스 체인점으로 지니고 있는 신용카드를 이용하면 2,500원의 할인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김씨가 결제를 위해 카드를 내밀었을 때 영화관 직원은 "이 카드로는 더이상 할인을 받을 수 없고 적립만 가능하다"고 답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해당 신용카드로 할인을 받았던 김씨로서는 억울할 따름이었다.

공정위 보고서에 따르면 A카드의 선불카드 약관에는 '선불카드에 부가된 제휴서비스의 제공 및 이용조건은 은행이나 해당 제휴기관의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으나…'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그러나 여전법 감독규정 제25조(신용카드업자의 금지행위 세부유형)에 따르면 부가서비스의 변경사유는 천재지변, 신용카드 업자의 경영위기 및 그에 준하는 불가피한 경우로 제한돼 있다. 또한 부가서비스 출시 이후 최소한 1년 이상 유지해야 하며 변경 고지는 변경일 6개월 이전에 인터넷 홈페이지, 대금청구서, 우편서신, 이메일 중 2가지 이상의 방법을 통해 하도록 되어있다. 공정위는 "부가서비스 변경사유 및 변경 고지방법 등을 회원에게 불리하게 규정한 것은 부당한 약관 조항"이라며 개선할 예정이다.

도난카드 보상처리료 내라?

서울시 강북구에 사는 정모(36세)씨는 며칠 전 지하철에서 지갑을 통째로 소매치기당했다. 급히 카드사에 전화해 사용정지 및 재발급을 요청한 정씨는 황당한 안내멘트를 들었다. 새로 카드를 보내줄 수는 있지만 보상처리 수수료를 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자주 쓰는 신용카드인데다가 주거래은행과 연결돼있는 터라 정씨는 울며겨자먹기로 수수료를 납부할 수밖에 없었다.

B카드의 선불카드 약관에는 '회원은 카드를 분실하거나 도난당한 경우 즉시 카드사에 그 내용을 전화 또는 서면으로 신고하여야 한다. (중략) 다만, 카드 1매당 2만원의 보상처리 수수료를 납부하여야 합니다'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여전법 제16조(신용카드회원 등에 대한 책임)에 따르면 신용카드업자는 회원으로부터 카드의 분실ㆍ도난 통지를 받은 때부터 해당 카드의 사용에 따른 책임을 지게 되어있다. 분실ㆍ도난 통지 전에 발생한 손해의 보상처리 비용은 회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지만 통지 후에 발생하는 손해는 카드사가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정위는 "통지 후에도 보상처리 수수료를 회원에게 부과하는 것은 부당한 약관 조항으로 시정 대상"이라고 규정했다.

시도때도 없는 스팸전화

경기도 고양시에 사는 김모(30세)씨는 최근 시도때도없이 걸려오는 스팸전화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자신의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알아보던 김씨는 우연히 사용 중인 신용카드의 약관에 담긴 '개인정보 제공' 항목을 보고 분노에 휩싸였다.

C카드 선불카드 약관에는 '본 계약과 관련하여 취득한 회원의 신용정보를 (중략) 동일한 범위 내에서 신용정보집중기관, 신용정보업자, 신용정보제공 이용자, 제휴업체와 정보를 교환해서 이용할 수 있다'고 제시돼있다.

그러나 개인정보보호법 제15조(개인정보의 수집ㆍ이용), 17조(개인정보의 제공)에 의하면 개인정보의 수집ㆍ이용은 정보 주체의 동의를 받는 경우나 계약의 체결 및 이행에 불가피한 경우 등으로 득정해야 하고 이를 제3자에게 제공하기 위해서는 제공하는 개인정보의 항목, 동의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 등을 알려야 한다. 공정위는 "선불카드는 개인의 신용과는 연관이 없이 발행, 사용되는 것"이라며 "개인정보를 신용정보업자 등과 교환하는 것은 개인정보보호법의 취지에 반하는 항목"이라며 시정을 요구했다.

그 밖에도 공정위는 ▲리볼빙(자유결제)서비스에 따른 요율을 카드회사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조항 ▲카드를 중도해지했을 때 수수료를 반환하는 조항 ▲청구대금면제서비스의 면제 순서를 회원의 이익에 대한 고려 없이 카드회사가 정하는 조항 ▲높은 연회비의 프리미엄 카드에 따라오는 바우처(무료 항공권 및 호텔숙박권)의 분실ㆍ도난 시 재발행을 제한하는 조항 ▲약관이 변경됐을 때 해당 절차 이행 및 통보 내용을 미흡하게 전달하는 조항 ▲새로운 계약과 충돌하는 이전 계약의 효력을 배제하는 조항 ▲내용이 특정되지 않는 기한이익을 부당하게 상실하는 조항 ▲카드론의 취소권을 제한하는 조항 등을 개선할 방침이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