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 '단일화 반격 카드'는최필립 이사장 퇴진과 명칭 변경 우회 촉구야권 공격·이슈화 차단

전국언론노동조합과 정수장학회 공동대책위 관계자들이 지난 10월22일 서울 정동정수장학회 앞에서 정수장학회 해체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최흥수기자
지난 21일 서울 중구 정동에서는 주목할만한 기자회견이 열렸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 같은 을씨년스러운 날씨 속에 이강택 전국언론노조위원장 등 공동대책위원회는 "유신독재, 인질납치극, 장물 정수장학회를 해산하라. 박근혜 후보는 결자해지하고 최필립 이사장은 자진 사퇴하라"고 외쳤다.

제18대 대통령선거(12월19일)가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가운데 정수장학회(正修奬學會)가 다시 한 번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야권은 정수장학회 문제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의 약점인 '과거사'를 파고든다는 복안이고, 여권에서는 방어 전략에 부심하고 있다.

김정현 민주통합당 부대변인은 지난 21일 논평을 통해 "박근혜 후보가 한 달 전 기자회견을 한 이후 정수장학회 증발 사태가 계속되고 있다. 그사이 벌어진 일은 재단을 뺏긴 유족들의 분통터지는 목소리와 부산일보 편집국장 해임, MBC 김재철 사장 연임뿐"이라고 박 후보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안철수 무소속 대선후보도 지난 12일 이정호 전 부산일보 편집국장과 면담 자리에서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MBC, 부산일보 다 정수장학회와 관련 있는 쪽이 심각하게 편집권이 훼손되고 국민들의 알권리가 무참하게 짓밟혔다"며 박 후보의 해법 제시를 촉구했다.

이에 앞서 안 후보는 지난 9일에는 MBC 본사에서 파업중인 노조를 방문해서 "김재철 사장은 물러나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후보도 더 이상 김 사장을 비호하면 안 된다"고 이 대통령과 박 후보를 싸잡아 비판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22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한국방송기자클럽 주최 대선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야권후보단일화 협상 등에 대한 질문을 받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연합뉴스
박 후보는 지난 22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한국방송기자클럽 주최 대선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정수장학회와 관련해 "사실 제가 이래라 저래라 할 위치에 있지 않지만, 이 자리를 빌려서 명칭 변경을 포함해서 의혹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내놓아달라고 (장학회 측에) 요청하겠다"고 말했다.

박 후보는 지난달 21일 기자회견에서도 정수장학회와 자신은 무관하다면서도 정수장학회의 명칭 변경과 함께 최필립 이사장의 퇴진을 우회적으로 촉구했다.

박 후보는 "정수장학회는 개인의 소유가 아닌 공익재단이며 어떠한 정치활동도 하지 않는 순수한 재단"이라면서 "제 소유물이라든가 저를 위한 정치활동을 한다는 야당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박 후보는 이어 고 김지태 씨에 대해 "4ㆍ19 부정축재자 명단에 올랐고, 5ㆍ16때 부패혐의로 징역 7년 형을 선고받았다"며 "그 과정에서 처벌을 받지 않기 위해 먼저 재산 헌납의 뜻을 밝혔고 부산일보와 문화방송 주식 등을 헌납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최 이사장은 박 후보의 퇴진 요구를 일축했고,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부일장학회의 설립자인 고(故) 김지태씨 유족 측은 박 후보를 사자(死者)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새누리당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대선정국이 여야간 1대1 구도로 재편되고 나면 야권에서는 박 후보의 역사관과 과거사를 집중적으로 공격해올 게 뻔하지 않냐"면서 "단순히 최필립 이사장의 퇴진 정도만으로는 야권의 파상공세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정이 이쯤 되자 새누리당과 친박계 주변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정수장학회 문제를 털고 가는 것만이 야권의 후보 단일화를 상쇄할 유일한 카드라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과정에서 다소 파열음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야권이 후보 단일화에 성공하면 그 자체가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는 만큼, 여권으로서는 어떤 처방도 백약이 무효라는 논리다. 때문에 야권의 단일화에 맞서려면 그에 상응하는 카드가 필요하고, 그것은 바로 정수장학회 처리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한겨레신문은 지난 10월13일자와 15일자에 "최필립 이사장과 이진숙 MBC 기획홍보본부장 등이 10월8일에 만나 정수장학회의 언론사 지분을 매각해 부산ㆍ경남지역 대학생들의 반값등록금 재원 등으로 활용하기로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MBC 사장 출신인 최문순 강원지사는 지난달 23일 광주시청에서 가진 특강에 앞서 기자들과 만나 "정수장학회 지분을 매각하려는 발상은 초법적이고 몰상식한 정치적 행위"라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여권에서는 대선 전에 정수장학회 문제가 '통 크게' 매듭되지 않는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라는 주장이 많다. 박 후보의 설명처럼 정수장학회가 박 후보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특정인의 일방적인 결정은 어렵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어물쩍 넘어가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정수장학회의 정관을 보면 이사회 의결안은 과반의 이사가 찬성해야 통과된다. 지분 매각이든 사회 기부든 아니면 제3의 방법이든 어떤 식으로 결론을 내더라도 이사회가 전적으로 권한을 갖고 있는 셈이다.

새누리당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새누리당과 선진통일당의 합당 등 보수연합만으로는 표를 결집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결국은 중도층 싸움인데 정수장학회 문제가 처리된다면 많은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내다봤다.

이와 관련,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기왕 정수장학회 문제를 해결할 거라면 빠를수록 좋다"며 "야권이 후보 단일화 이후 축제 분위기에 젖어들 틈을 주지 않고 여권에서 곧바로 맞불작전을 편다면 효과가 클 것"이라고 귀띔했다.

한편 부산지역 기업인이자 정치인이었던 고 김지태씨는 1962년 부정축재처리법 위반 등으로 재판을 받던 중 자신 소유의 문화방송과 부산일보 주식 등을 국가에 강제 기부 당했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正)'과 고 육영수 여사의 '수(修)'를 딴 정수장학회는 김씨가 소유했던 부일장학회를 기반으로 설립됐다. 박근혜 후보는 2005년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그의 측근인 최필립 전 리비아 대사가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정수장학회는 MBC의 지분 30%(6만 주), 부산일보 지분 100%(20만 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부지 등을 갖고 있다. 언론사 지분과 예금 자산 등을 더하면 정수장학회의 재산은 수백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된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17부는 지난 2월 고 김지태씨의 유족 6명이 강제로 기부된 부친의 주식을 돌려달라며 정수장학회와 국가를 상대로 한 주식 양도 청구소송 1심에서 강압으로 재산이 넘어간 사실은 인정하지만 시효가 지나 반환청구는 할 수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최경호기자 squeez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