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박왕' 권혁 시도상선 회장 "억울해 죽겠다"2200억 세금 포탈 혐의 징역 7년 벌금 2284억"공정하게 시비 가려 달라" 무리한 세법 적용 의혹국내 거주 여부가 쟁점… 내년 1월4일 운명 결정

권혁 시도상선 회장에 대한 결심공판이 지난달 29일 진행됐다. 2,200억원대 세금을 포탈한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조세포탈)다. 검찰은 이날 권 회장에 대해 징역 7년과 벌금 2,284억원을 구형했다. 권 회장의 운명은 선고기일인 내년 1월4일에 결정된다.

권 회장은 대단히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그는 재판부에 "공정하게 시비를 가려달라"는 당부의 말을 남기기도 했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 그러나 이번 탈세사건의 내부를 면면히 들여다보면 권 회장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되는 게 사실이다.

해외기업의 대리점처럼

이번 세무조사의 최대 쟁점은 권 회장이 과연 국내에 거주하지 않은 조세피난처 거주자인지 여부다. 국내 거주자가 아니면 국세청에 과세 권한이 없다. 그간 국세청과 검찰이 제시한 증거 및 판단은 물거품이 되는 셈이다.

국내 거주자로 인정받으려면 1년 중 최소 절반 이상을 국내에 거주하면서 2년에 걸쳐 1년 이상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권 회장의 국내 체류일수는 ▦2004년 150일 ▦2005년 139일 ▦2006년 135일 ▦2007년 194일 ▦2008년 104일 ▦2009년 128일이다. 사실상 국내 거주자로 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특히 국세청은 지난 5월 '소송비용 담보제공 명령신청'을 제기하면서 "권 회장이 대한민국 내에 주소 등을 두지 않았다"고 전제했다. 권 회장이 대한민국 내에 주소를 둔 거주자임을 전제로 종합소득세 등을 부과한 것과 정반대되는 모습이었다. 이를 두고 법원은 "종합소득세 부과 처분이 잘못되었음을 자인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또 국세청과 검찰은 권 회장이 국내 기업을 해외 기업의 대리점인 것처럼 속여 개인소득세와 법인세를 탈루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권 회장은 "탈세를 위해 해외로 나간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사업 시작해 홍콩과 한국 등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실제 권 회장은 1990년대 초 일본에서 선박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2006년 오랫동안 사업 기반을 다졌던 일본을 떠나 거주지 자체를 홍콩으로 옮겼다. 중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홍콩에서 3년 이상 사업하면 중국 본토 진출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권 회장은 일본과 중국에서 사업을 벌이면서 해당 국가에 세금을 충실히 냈던 것으로 전해졌다.

국세청과 검찰은 권 회장이 선박 발주, 윤활유 구매 과정에서 받은 어드레스 커미션을 문제 삼았다. 어드레스 커미션은 조선사가 선박을 발주하는 선주의 요구에 따라 선박건조 대금 가운데 일부를 선주에게 리베이트로 돌려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선박업계에 따르면 커미션은 해운업계의 국제적 관례다. 그렇다고 커미션을 개인적으로 착복하는 건 아니라고 한다. 배를 발주해서 건조하는 데 걸리는 2~3년 동안의 과정을 감리하고 관리하는 데 사용된다. 권 회장도 커미션을 관리하는 회사를 만들어 운영하면서 직원들을 위한 아파트 구입이나 선박 계약금 등으로 사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 "국세청 성과 때문"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선박업계에선 국세청과 검찰이 다소 무리한 법 적용을 한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그 이유를 두고 업계에선 ▦국세청이 사활을 걸고 추진한 역외탈세 조사가 지지부진해서 ▦역대 최고의 탈세 규모 ▦권혁 회장이 정권에 밉보였기 때문 등의 말들이 나돌고 있다.

실제, 국세청은 역외탈세 조사를 사활을 걸고 추적하고 있다. 특히 이현동 국세청장의 의지는 대단했다. 이 청장은 차장 시절이던 2009년 11월 국세청에 역외탈세추적전담센터를 신설하고 스스로 센터장이 됐다. 국세청은 지난해 초 역외탈세담당관실을 상설조직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권 회장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조사했던 '완구왕' 박종완, '구리왕' 차용규 사건에선 이미 고배를 마셨다. 이런 가운데 권 회장마저 잡지 못하면 국세청은 앞으로 역외탈세 조사를 더는 진행할 수 없을 것이란 관측마저 제기됐다.

특히 권 회장 사건은 국세청이 역외탈세 조사에 본격 착수한 뒤 내놓은 대표적인 성과로 꼽힌다. 탈세 규모가 역대 최고급이기 때문이다. 국세청은 권 회장이 2006년부터 4,100억 원 넘는 종합소득세 등을 탈루했다고 밝힌 바 있다.

선박업계 관계자는 "국세청이 역외탈세 조사를 힘주어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렇다 할 성과가 없자 다소 무리하게 세법을 적용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시각이 있다"며 "따라서 권 회장이 업계에선 일종의 피해자로 비춰지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또 일각에서는 국세청의 조사 자체가 권 회장과 정부의 불편한 관계에서 촉발된 것 아니냐는 시선도 있다. 선박업계 관계자는 "권 회장이 이번 정권에 밉보여 국세청의 조사가 시작됐다는 얘기가 조심스레 나돌고 있다"며 "국세청의 무리한 조사도 같은 맥락 아니냐는 견해도 있다"고 말했다.

한편, '선박왕' 권 회장은 해운업계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93년 일본에 시도상선을 설립한 후 불과 20년 만에 10조원대의 자산가로 등극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한국의 오나시스'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기 전까지만 해도 권 회장은 대형 벌크선 등 280여척을 소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송응철기자 sec@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