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년 최고 역사… 최고에 오르다1896년 '박승직 상점' 모태소비재·무역·건설 등으로 성장 발판 마련사람 중심 경영철학 그룹 형제경영 녹아들어

사람들은 만으로 예순 살이 되는 해에 환갑잔치를 치른다. 평균수명이 길어진 요즘에는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됐지만 여전히 인생의 한 주기를 잘 마친 것을 축하한다는 의미에서 환갑잔치를 벌이고 앞으로도 오래도록 무병장수하기를 기원한다.

기업들의 평균수명은 사람들보다도 짧다. 30년 이상 무사히 생존하면 장수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다. 특히 자본주의 도입이 늦은 데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됐었던 국내에서는 무사히 '환갑잔치'를 하는 기업이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런 만큼 1953년 이전에 창립, 지금까지도 위세가 당당한 기업들은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국내에서 환갑을 넘긴 진정한 '장수기업'들은 어떻게 생존의 위기를 극복하며 지금까지 왔을까. 도전과 혁신(두산), 효자상품(동화약품), 안정적 재무구조(한국도자기), 끊임없는 연구개발(한국타이어), 윤리경영(유한양행) 등 장수비결은 제각각이지만 저마다 자신만의 '기업철학'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국내 최고령 장수기업

두산은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고(最古)의 기업이다. 창업주인 고 박승직씨가 1896년 서울 종로에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박승직상점'을 모태로 하는 두산은 1995년 한국기네스협회에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으로 인정받았다. 올해로 117세가 됐다.

박승직상점은 1925년 주식회사 형태로 바뀌었고 1945년 폐쇄됐다가 이듬해 두산상회라는 이름으로 재개업하며 운수업을 시작했다. '두산'은 박씨의 장남이자 두산의 초대 회장인 고 박두병 회장의 이름 첫 자인 말두(斗)자와 뫼산(山)자를 붙여 만든 이름이다. 한 말 한 말 차근차근 쌓아올려 산같이 커지라는 뜻이 담겨있다.

1952년 주류회사인 OB맥주를 설립한 박 초대회장은 두산상회의 이름을 두산산업으로 개명, 무역업을 시작하면서 사세를 크게 불려나갔다. 1960~70년대에는 동양맥주, 동산토건, 한양식품 등을 잇달아 인수ㆍ설립하며 소비재 산업, 무역업, 건설업 등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과감한 체질개선

장수기업 두산에도 위기의 순간은 있었다. 창업한 지 꼭 100년 만인 1990년대 중반, 수익구조가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본격적인 구조조정 작업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당시 두산은 29개 계열사를 23개로 축소하고 보유한 부동산 및 3M, 코닥, 네슬레 지분을 매각하는 한편 주력 매출원이던 음료사업마저 2007년 코카콜라에 넘기며 현금흐름을 안정화시켰다.

1998년 IMF 외환위기를 맞으며 두산의 구조조정 강도는 더욱 높아졌다. 두산은 '유사업종의 통합'이라는 전제 아래 23개 계열사를 (주)두산, 두산산업개발, 두산포장, 오리콤 등 주력 4개사로 통합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듬해부터는 맥킨지의 컨설팅을 받아 전사적자원관리(ERP), 중역정보시스템(EIS) 등 선진 경영기법을 도입했다.

당시 두산을 이끌던 박용성 회장은 구조조정을 통한 위기탈출에 그치지 않고 아예 그룹을 탈바꿈시켰다. 2000년대에 들어서며 두산은 과감한 인수ㆍ합병을 통해 소비재 기업에서 중공업 기업으로의 변신에 성공했다.

박 회장은 부동산과 지분 매각으로 확보한 현금을 가지고 인프라지원사업(ISB) 투자에 주력했다. 변신의 첫걸음은 2001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을 인수하면서 시작됐다.

박 회장은 인수한 두산중공업에서 제철, 화공부문을 정리하고 발전과 담수부문에 집중해 경쟁력을 키웠다. 2003년과 2005년에는 각각 고려산업개발(현 두산건설),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를 인수하며 대표적인 중공업 기업으로 도약했다.

두산은 이후에도 국제적인 경쟁력을 위해 미쓰이밥콕(2006년), CTI, 밥캣(2007년), 스코다파워(2009년) 등 원천 기술을 확보한 외국 기업들을 차례로 인수했다.

창업 100년 만에 찾아온 위기를 체질개선이라는 강수로 넘긴 두산의 선택은 성공적이었다. 본격적으로 구조조정을 진행했던 1998년 3조4,000억원이었던 그룹 매출은 2011년 말 26조2,000억원으로 크게 늘었다. 서울 종로에서 문을 연 포목점이 무역회사, 식음료 기업, 중공업 기업으로 혁신과 변화를 거듭하며 크게 성장한 것이다.

"사람이 미래다"

혁신과 변화 이외에도 장수기업 두산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이 있다. 바로 '사람이 미래다'로 대변되는 두산의 경영철학이다. 박용만 두산 회장이 그룹의 TV 광고카피에서 자주 소개하는 이 문구는 인재의 선발과 육성에 온 힘을 쏟는 두산의 현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사람이 미래다'라는 두산의 경영철학은 비단 직원을 뽑을 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재계 관계자들은 여타 그룹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형제경영도 두산만의 경영철학이 녹아들어 완성된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두산은 오너일가가 지주회사인(주)두산에 대한 안정적인 지분을 확보, 그룹 전체를 장악하는 지배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두산 특유의 지배구조는 형제간 경영권 승계를 만드는 토대가 돼왔다.

두산의 경영권은 고 박두병 초대 회장의 장남인 박용곤 명예회장을 시작으로 고 박용오 전 회장,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 박용현 전 두산 회장을 거쳐 3세 중 막내인 박용만 두산 회장에까지 비교적 무리 없이 이어져왔다.

차기 총수 후보 1순위로 거론되는 박정원 (주)두산 회장을 비롯해 4세들에게 경영권 바통이 넘어간 이후에도 이 같은 훈훈한 모습이 이어지며 최장수기업의 명성을 지켜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