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내대표 사퇴 후에도 여전히 자기 목소리 내는 등 영향력 거의 그대로타이밍·명분 조성된다면 도전 가능성 높아친노에 책임론으로 '견제구' … 모바일 투표 비중이 관건

박지원
어떤 사람들은 "이해찬 전 대표가 소도(蘇塗)에서 은둔하는 것과 비교하면 놀라울 따름"이라고 말한다. 소도란 삼한시대 때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신성불가침 지역으로 설령 죄인이 이곳으로 달아난다 하더라도 잡을 수 없었다. 대선 패배 후 이 전 대표는 정중동의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당의 확고한 주류였던 친노(친 노무현)가 대선 패배 후 책임론 공방에 휘말린 가운데에서도 전 민주통합당 원내대표(3선ㆍ전남 목포)의 입지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는 듯하다.

박 원내대표는 대선 패배 직후 원내대표 자리에서는 물러났지만 자신의 복심(腹心)이라 할 박기춘 의원(3선ㆍ경기 남양주을)이 대신 바통을 이어받았다. 의원이 원내대표였을 때 박기춘 의원이 수석 부대표를 맡는 등 두 사람 사이의 끈은 튼실하다.

박 의원은 원내대표 사퇴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당의 노선은 물론이고 추가경정예산 나아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인사 방향에 대해서도 꼼꼼히 지적하고 있다.

박 의원은 지난 15일 CBS 라디오에 출연해서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 등이 전국적으로 '회초리 투어'를 실시하는 것과 관련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무릎 꿇고 '잘못했습니다'라고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바로 혁신의 길로 '우리가 이렇게 변해 갑니다'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스럽다"고 일갈했다.

민주통합당 문희상(왼쪽에서 네 번째) 비상대책위원장이 13일 비대위원 7명을 임명한 후 국회 당 대표실에서 손을 맞잡은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홍근 문병호 설훈 비대위원, 문 비대위원장, 박기춘 원내대표, 김동철 이용득 배재정 오중기 비대위원. 오대근기자
박 의원의 일련의 행보에 대해 당 일각에서는 "의 입지가 여전하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대선 과정에서 '이(해찬)-박(지원)-문(재인)' 연대의 두 축인 이해찬 전 대표와 문재인 전 대선후보가 '조용하게' 지내는 것과는 대조를 보이기 때문이다.

민주당 관계자는 "박 의원의 입지는 여전한 게 아니라 이전보다 더 강해졌는지도 모른다. 비대위원들의 면면을 봐도 상황이 박 의원에게 나쁠 게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비서실장 승계 왜?

말 그대로 원내의 수장인 원내대표가 되면 비서실장, 원내행정기획실장, 정책실장을 수하에 둘 수 있다. 일반적으로 비서실장은 원내대표의 측근이, 나머지 두 자리는 당직자 가운데 정무에 잔뼈가 굵은 인사가 맡는다.

의원이 원내대표였을 때 김명진 비서실장을 곁에 뒀다. 김 실장은 국민의 정부 때 청와대 행정관, 민주당 정책위원회 부의장 등을 지낸 정책ㆍ기획통으로 박 의원의 복심이다.

김 실장은 지난해 총선 때 '광주의 강남'이라는 남구에서 장병완 현 의원에게 도전장을 냈다가 '예선전'에서 탈락했다. 김 실장은 그러나 군말 없이 결과에 승복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대선 패배 후 박 의원은 원내대표에서 물러났지만 김 실장은 유임됐다. 박기춘 신임 원내대표와 박 의원 간의 돈독한 관계를 생각하면 그리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당 안팎의 시선이 모두 고운 것만은 아니다. 박 원내대표가 전임자의 측근을 그대로 중용했다는 것만으로도 뒷말을 남길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하다.

민주당 관계자는 "박 의원이 원내대표 사퇴 후로도 꾸준히 자기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그만한 자신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 아니겠냐"면서 "3월 말 또는 4월 초로 예정돼 있는 전당대회에서도 박 의원이 역할을 하지 않겠냐"고 귀띔했다.

다른 거물들 출마 포기

손학규 전 대표는 지난 15일 독일로 6개월 일정의 유학을 떠났고, 김두관 전 경남지사도 3월에 독일로 날아간다. 지난해 대선에 도전했던 두 사람이지만 차기 전당대회와는 자연스레 멀어졌다.

그렇다고 친노 핵심들이 선뜻 당권에 도전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비주류 측에서는 친노는 아니지만 대선 캠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일부 486(40대, 80년대 학번, 60년대 출생)들과 정세균 상임고문, 박영선 의원 등도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보다 못한 안희정 충남지사와 이광재 전 강원지사까지 나서서 대선 패배의 친노 책임론을 반박하고 나섰다. 하지만 여론은 여전히 싸늘하다. 반박하려 하면 할수록 "그러니까 대선에서 졌지"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책임져야 한단 말이냐" "문재인 후보에게 표를 줬던 48%의 국민 모두에게 책임이 있단 말이냐"는 비판이 쏟아진다.

당내에서 여전한 입지, 거물들의 출마 포기, 친노에 대한 반감 등을 이유로 의원이 차기 전당대회를 통해 다시 한 번 당대표에 도전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박 의원은 그러나 당권 도전에는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최근 사석에서 박 의원은 '당권에는 관심 없다. (선거에) 안 나간다'는 뜻을 내비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해석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박 의원의 '겉말'을 뒤집어 보면 타이밍이나 명분이 조성된다면 당권에 재도전할 수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당헌ㆍ당규가 개정될 수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차기 지도부의 임기는 '당대표 궐위 시 새로 들어서는 지도부의 임기는 전임 지도부의 잔여 임기'라는 당헌에 따라 8개월쯤 된다.

지난해 1월 민주통합당 창당과 함께 선출된 한명숙 전 대표의 잔여 임기가 내년 1월까지이기 때문이다. 한 전 대표 후임으로 지난해 6월 선출됐던 이해찬 전 대표의 임기도 한 대표의 잔여임기까지였다.

때문에 차기 지도부가 안정적으로 당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당헌을 고쳐서라도 새롭게 임기 2년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물론 당의 헌법을 고치는 게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당헌이 개정돼 2년 임기를 보장받는다면 새 당대표는 2014년 지방선거 공천권도 갖게 된다.

민주당 관계자는 "이해찬 전 대표, 문재인 전 후보와 연대했던 박 의원도 사실은 대선 패배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때문에 선뜻 차기 전당대회에 도전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거물들이 차기 전당대회에서 나서기 어려운 상황에서 당헌이 개정된다면 박 의원이 결심을 굳힐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모바일 투표 당심 왜곡"

박 의원은 지난해 1ㆍ15 전당대회 때 당권을 노렸다. 당 장악력, 관록, 정치력 등 여러 면에서 박 의원의 선전이 예상됐다. 그러나 박 의원은 한명숙 대표, 문성근 박영선 최고위원에 이어 4위에 그쳤다. 모바일투표에서 크게 밀렸기 때문이다.

비주류 중진인 김영환 의원은 지난 15일 평화방송 라디오에 나와 "모바일 경선 없이 당원 투표로만 전당대회를 한다면 당원들이 민주당을 혁신할 것"이라며 "모바일투표는 소수의 조직된 사람들에 의해 당심을 왜곡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의원은 이어 '친노 책임론'과 관련해 "친노가 실체 없다는 반발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이라며 "친노가 없다는 강변이 대선 평가를 가로막고 있다. 지난번에 한명숙 대표, 그 다음 문성근 대표(대행), 그 뒤를 이어 이해찬, 문재인 대표가 다 친노를 대표하는 분들"이라고 친노를 향해 '돌직구'를 던졌다.

반면 친노계인 박범계 의원은 YTN '김갑수의 출발 새아침'과의 인터뷰에서 "친노는 뚜렷한 계파라기보다 노무현의 가치와 철학을 이어받겠다는 생각의 정도 차이"라고 반박했다.

박 의원은 또 대선 후 친노가 2선으로 후퇴해야 한다는 요구에 대해 "친노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총선과 대선을 주도했던 지도부, 또는 선대위라고 표현해야 한다"면서 "(모바일투표는) 이미 민주당의 역사가 됐다. 문제가 있으면 보완해야지 그것을 하루 아침에 도려내고 없애는 것은 반대"라고 주장했다.

민주당은 지난해 1ㆍ15 전당대회, 6ㆍ9 전당대회 그리고 대선후보 경선에 모바일투표를 도입했다. 비노(비 노무현) 진영에서는 "당 행사인 만큼 당연히 당원이 주인이 돼야 하는 것 아니냐"며 모바일투표를 반대했지만 주류인 친노의 주장을 꺾지는 못했다.

그 결과 한명숙 이해찬 전 대표에 이어 문재인 전 후보까지 모두 친노 진영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대선에서 패하자 그동안 움추려 있던 비주류에서 "친노가 책임져라"며 친노 책임론을 들고 나왔다.

민주당 관계자는 "여전히 친노가 당의 주류인 현실을 감안하면 차기 전당대회에서 곧바로 모바일투표가 폐지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모바일투표의 비중은 축소는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모바일투표가 대폭 축소된다면 조직력이 좋고 당원, 대의원들 사이에서도 확실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의원 같은 인물이 차기 전당대회에서는 큰 위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비주류 뜬 민주 비대위 '탈 친노 신호탄'


쇄신파·40대 전면 부상… '계파 나눠먹기' 비판도


반성보다 안배라는 평도 있다. 나눠 먹기라는 혹독한 비판도 있다. 그럼에도 "탈 친노의 신호탄"이라는 반색이 좀더 우세해 보인다. 물론 대선 참패에도 불구하고 친노가 여전히 당의 주류이자 최대 계파라는 데 이견을 다는 사람은 많지 않다.

민주통합당이 지난 13일 차기 전당대회까지 당을 이끌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민주당은 이날 설훈(3선ㆍ경기 부천 원미을) 의원과 김동철(3선ㆍ광주 광산갑)ㆍ문병호(재선ㆍ인천 부평갑)ㆍ박홍근(초선ㆍ서울 중랑을)ㆍ배재정(초선ㆍ비례대표) 의원, 이용득 전 최고위원(노동계), 오중기 경북도당위원장 등 7명을 비대위원으로 선임했다. 이로써 비대위는 문희상 위원장과 당연직인 박기춘 원내대표를 포함해 총 9명으로 구성됐다. 민주당은 김동철 문병호 의원 등 비주류 쇄신파와 박홍근 배재정 의원, 오 도당위원장 등 40대를 전면에 내세운 것과 관련해 "비대위에 개혁과 세대교체의 의지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문 위원장도 "혁신비대위로 불러달라"고 거들고 나섰다.

비대위원 인선과 관련해 실질적인 당 쇄신 작업보다는 전당대회 준비에 치중할 것이란 전망도 있다. 그러다 보니 친노 핵심만 제외한 채 계파별 안배, 나눠 먹기 선임이라는 비평도 있다.

비대위원 면면을 살펴보면 김동철 문병호 의원은 비주류 온건파이고 배 의원은 문재인 전 후보의 측근이다. 설훈 박홍근 의원과 오중기 도당위원장 3명은 김근태 전 의원 계열인 민평련 회원이고, 이용득 전 최고위원은 노동계 인사다.

하지만 당 전체를 쥐락펴락했던 친노 색채가 많이 약해진 것은 긍정적이라는 평가가 많다. 실제로 일부 비대위원들은 치열한 책임론 공방 속에서 친노, 특히 문재인 전 후보가 복귀하는 것에 대해 경계하는 눈치다.

설훈 의원은 지난 15일 KBS 라디오에 출연해 "사실 저도 비대위원을 안 맡으려고 했었다"며 "당내에 있는 제가 그럴진대 밖에 계신 분은 오죽하겠느냐"고 말했다.

설 의원은 이어 "겸손하게 쇄신하되 100일 안에 비대위 업무를 마무리 지을 생각"이라며 "상식적으로 당분간 쉬어야 되는 것 아니겠느냐. 본인이 그걸 원하고 있고, 본인의 의사를 일차적으로 존중해야 한다"며 문재인의 조기 역할론에 부정적 입장을 내비쳤다.

지난 14일부터 공식 활동에 들어간 비대위는 설 의원의 말처럼 100일 정도면 임기를 다하게 된다. 그러나 이 기간 비대위가 순수한 대선 평가와 당 쇄신 작업에 전념하기보다는 차기 전당대회를 위한 사전 준비작업을 병행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관계자는 "비대위가 대선 평가위원회를 통해 친노의 책임론을 어떻게 결론 맺느냐, 전당대회와 관련해 룰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차기 전당대회에서 당권 향배가 결정되지 않겠냐"고 말했다.



최경호기자 squeez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