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대한민국 총리김영삼, 5년 동안 5명… 정일권 6년간 재임 '최장'한명숙 첫 여성총리에… 청문회법 이후 후보 4명 낙마사퇴 김용준 최고령 무산

국민의 정부는 'DJT(김대중 김종필 박태준) 공동정권'이었던 만큼 총리는 대부분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인사들이 맡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왼쪽)이 31대 김종필 총리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지난 24일 박근혜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로 지명된 김용준(75) 대통령직 인수위원장. 1938년생인 김 후보자가 인사청문회를 무사히 통과한 뒤 정식 총리에 앉게 될 경우 대한민국 역대 최고령 총리라는 '타이틀'을 가질 수 있었다.

김 후보자는 장애를 딛고 법조인으로 성공한 데 이어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을 눈앞에 뒀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김 후보자는 애초 박 당선인의 구상에 있던 후보는 아니었으나 대선과 인수위원회를 거치는 과정에서 신임이 두터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는 생각보다 난항이 예상됐다. 특히 두 아들의 병역 면제 의혹은 아무래도 개운치 않았다.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 일각에서도 "과연 인사청문회를 통과할 수 있겠냐"는 회의적인 전망이 나왔다.

곤경에 처한 김 후보자는 결국 후보 지명 5일 만인 지난 29일 전격 자진 사퇴했다. 출범을 앞둔 새 정부의 첫 총리 후보자가 자진 사퇴한 것은 사상초유의 일이다. 또 2000년 인사청문회법 도입 이후로는 4번째 낙마자다.

김 후보자는 이날 오후 늦게 "저의 부덕의 소치로 국민 여러분께 걱정을 끼치고, 박근혜 당선인에게도 누를 끼쳐 국무총리 후보자직을 사퇴하기로 결심했다"고 윤창중 인수위 대변인을 통해 밝혔다.

최단명(2개월) 6대 허정 총리
김 후보자의 예상치 못했던 낙마로 다시 한 번 국무총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헌법 제86조 2항은 국무총리의 기능과 역할을 규정하고 있다.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부를 통활한다'고 명시돼 있다.

또 87조에는 '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돼 있다. 헌법조항으로만 보면 국무총리는 대통령에 이어 국가를 이끄는 2인자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역대 총리를 돌아보면 정권의 2인자라기보다 '얼굴 마담'에 그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역대 총리 41명 중 실세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박 당선인도 책임총리제를 대선 기간 공약으로 내세웠으나 책임총리보다 책임장관에 방점이 찍힐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범석 1호… 김황식 41호

대한민국 국무총리 1호는 이승만 전 대통령 밑에서 2년간 재임했던 이범석이다. 이명박 정부와 함께 임기를 마치게 되는 김황식 총리는 건국 이후 41번째 국무총리다.

30대 고건 총리가 취임식에서 전임 이수성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초대 이승만 전 대통령부터 제17대인 이명박 대통령까지 총 10명의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이끌었으니 대통령 1인당 평균 4명의 총리가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3년부터 79년까지 16년간이나 권좌에 있었지만 총리는 최두선 정일권 백두진 김종필 최규하 5명밖에 두지 않았다.

1987년 5년 단임 직선제 개헌 이후 두 번째 대통령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재임 5년 동안 황인성 이회창 이영덕 이홍구 이수성 고건 총리를 뒀다. 문민정부 초대 총리였던 황인성부터 마지막 총리였던 고건까지 5차례나 갈아치운 셈이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자리에 가장 오래 머물렀던 사람은 정일권이다. 정일권은 1964년부터 1970년까지 만 6년간 총리를 지냈다. 최장기간 2위는 김종필(1971~1975년), 3위는 최규하(1976~1979년).

반면 허정(1960년 2개월) 노재봉(1991년 4개월) 이회창(1993~1994년 4개월 5일) 박태준(2000년 4개월 5일)은 채 반년도 채우지 못하고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제12대 총리였던 최규하는 41명의 총리 가운데 유일하게 대통령에까지 올랐다. 최규하는 총리로서는 장수 3위에 올랐지만 대통령으로서는 8개월(1979년 12월6일~1980년 8월6일)로 최단 재임기간의 비운을 맛봤다.

36대 이해찬(왼쪽 사진) 37대 한명숙 총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 밑에서 실세형 총리로 한껏 위상을 높였다.
첫 여성 총리는 제37대 한명숙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집권 때인 2006년 총리에 오른 한 전 총리는 초대 여성부 장관, 제8대 환경부 장관을 지냈으며, 민주통합당 초대 당대표를 맡기도 했다.

실세형·관리형·중간형

국무총리의 위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대통령과의 인간적, 정치적 신뢰도, 총리 개인의 스타일, 시대적ㆍ정치적 환경 등에 따라 실세형, 관리형, 중간형으로 구분된다.

전두환 정권 때까지만 해도 총리는 국정의 상징적인 2인자였을 뿐 실질적인 넘버 2는 따로 있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들어선 노태우 김영삼 정부 때는 그나마 총리의 위상이 좀 올라갔지만 역시 관리형의 한계를 벗지는 못했다.

총리에게 가장 많은 권한을 줬던 정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끌었던 참여정부다. 이해찬 한명숙 전 총리는 노 전 대통령 밑에서 실세형 총리로 한껏 위상을 높였다.

사상 첫 여성 총리 후보였던 장상 전 총리 서리는 위장전입 의혹 등으로 서리 꼬리표를 떼지 못했다.
특히 이 전 총리는 노 전 대통령의 무한 신뢰 아래 '실세총리'라는 신조어를 낳았을 만큼 막강한 권한을 누렸다. 하지만 이 전 총리는 2006년 3ㆍ1절 골프 파문에 휩싸이면서 쫓겨나듯 물러나는 불명예를 뒤집어썼다.

이명박 현 대통령 재임기간 국무총리를 지냈던 한승수 정운찬 김황식 총리는 하나같이 관리형에 가깝다. 정 전 총리는 한때 대선주자로까지 거론됐으나 결국 잠룡(潛龍)에 머물고 말았다.

백두진 전 총리는 이승만 정권 때에 이어 박정희 정권 때 한 번 더 총리를 지냈다. 백 전 총리는 1953, 54년 그리고 1970, 71년에 총리직을 수행했다.

문민정부에 이어 참여정부에서도 총리를 역임한 고건 전 총리는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돼 직무가 정지됐을 때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사상 첫 여야간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뤘던 김종필 전 총리는 국민의 정부 초대 총리이자 명실상부한 실세총리였다. 김 전 총리는 그러나 한나라당의 반대로 임명동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하는 바람에 5개월 간이나 서리 딱지를 떼지 못했다.

김 전 총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이었던 1971년에 총리로 발탁된 데 이어 27년 후인 1998년 또 다시 총리에 지명되는 진기록도 남겼다. 1926년생인 김 전 총리는 45세 때와 72세 때 국정의 2인자에 오르며 '영원한 2인자'라는 유행어도 낳았다.

국민의 정부는'DJT(김대중 김종필 박태준) 공동정권'이었던 만큼 총리는 대부분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인사들이 맡았다. 김종필 전 총리에 이어 박태준 전 총리가 바통을 이어받았고 이한동 전 총리가 마무리했다. 국민의 정부 5년 간 비(非) 자민련 출신으로는 법조인이었던 김석수 전 총리가 유일했다.

2000년 이후로 4명 낙마

헌정 사상 총리 지명자에 대한 임명동의안이 부결된 경우는 모두 8번 있었다. 제헌국회에서 초대총리로 내정됐던 이윤영의 임명동의안은 30.6% 찬성에 그쳐 첫 부결 선례가 됐다. 이윤영에 대한 임명동의안은 1950년과 52년에도 제출됐지만 국회는 끝내 통과시키지 않았다.

이승만 전 대통령 시절의 백낙준(1950년), 이갑성(1952년), 윤보선 전 대통령 때 김도연(1960년) 총리 지명자의 임명동의안도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했다.

전두환 군사정권 때인 1987년 이한기 총리서리는 6ㆍ29 선언 이후 지병을 이유로 사퇴했다. 이 때문에 이 전 서리는 헌정사상 최초로 국회 인준대상에조차 오르지 못하는 진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인사청문회법이 도입된 2000년 6월 이후 낙마한 총리 후보자는 김용준 후보자를 포함해 총 네 명이다. 김대중 정부 때 장상, 장대환 총리 서리는 국회에서 임명동의안이 부결됐고, 현정부에서는 김태호 후보자가 임명동의안 표결 전에 스스로 물러났다. 셋 다 도덕성 검증의 벽을 넘지 못했다.

사상 첫 여성 총리 후보였던 장상 전 총리 서리는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의혹, 장남의 이중국적, 학력 허위 기재 등의 의혹이 불거지는 바람에 서리 꼬리표를 떼는 데 실패했다.

장 전 서리 낙마 한 달 뒤인 2002년 8월 총리 서리로 지명된 장대환 매일경제신문 사장 역시 부동산 투기 의혹, 자녀의 위장전입 등에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40대 총리론'을 들고 호기롭게 나섰던 김태호 전 경남지사는 '박연차 게이트' 연루 의혹에 대한 거짓 해명, 선거자금 10억원 대출의 은행법 위반, 부인 명의 아파트 임대 소득 탈루 등의 의혹에 직격탄을 맞고 자진 사퇴했다.

역대 최고령 총리라는 타이틀을 눈앞에 뒀던 김용준 후보자의 낙마도 결국 도덕성 결함 때문이다. 김 후보자는 두 아들의 병역 면제 의혹과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총리직과 함께 그동안 쌓았던 명예도 날리고 말았다.

1948~60년 부통령이 2인자


최경호기자

지금은 낯선 단어가 됐지만 우리나라에도 부통령제도가 있었다. 부통령제는 1948부터 1960년까지 12년간 존속되다 제2공화국이 들어선 1960년에 폐지됐다.

1948년부터 60년까지는 국정의 권력 서열이 대통령→부통령→국무총리 순이었다. 이 기간만 해도 일인지하 만인지상은 국무총리가 아닌 부통령이었다.

역대 부통령으로는 이시영(1948~51ㆍ이승만 대통령) 김성수(1951~52ㆍ이승만 대통령) 함태영(1952~56ㆍ이승만) 장면(1956~60ㆍ이승만) 이기붕(1960ㆍ이승만ㆍ4ㆍ19 혁명으로 무효)이 있었다.

함태영과 장면은 각각 4년간 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역대 최장 공동 1위를 기록했고, 이시영은 3년으로 공동 3위에 올랐다. 그런가 하면 이기붕은 1960년 부통령에 올랐으나 단 1개월 만에 쫓겨나고 말았다.

1960년 3월15일 제4대 정ㆍ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의 부정선거로 이승만과 이기붕이 대통령과 부통령에 선출됐으나 4ㆍ19 혁명으로 정권이 붕괴되면서 이들의 당선도 무효가 됐다.



최경호기자 squeez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