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 '무한신뢰' 발판 치고 나갈까유일한 창업주 민족애 바탕 1926년 창립 직원복지·사회공헌 세계 톱수입의약품 도입만 주력 외형대비 실속 없다 평가 좋은회사→큰회사 도약 기대

유일한 창업주가 1926년설립한 유한양행은‘기업과 종업원은 공동운명체’라는 신념 아래 운영, 현재까지 단 한차례의 노사분규도 겪지 않았다. 사진은 서울시 동작구 대방동에 위치한 유한양행 본사.
사람들은 만으로 예순살이 되는 해에 환갑잔치를 치른다. 평균수명이 길어진 요즘에는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됐지만 여전히 인생의 한 주기를 잘 마친 것을 축하한다는 의미에서 환갑잔치를 벌이고 앞으로도 오래도록 무병장수하기를 기원한다.

기업들의 평균수명은 사람들보다도 짧다. 30년 이상 무사히 생존하면 장수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다. 특히 자본주의 도입이 늦은 데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됐었던 우리나라에서는 무사히 환갑잔치를 하는 기업이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런 만큼 1953년 이전에 창립, 지금까지도 위세가 당당한 기업들은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국내에서 환갑을 넘긴 진정한 '장수기업'들은 어떻게 생존의 위기를 극복하며 지금까지 왔을까? 도전과 혁신(두산), 효자상품(동화약품), 안정적 재무구조(한국도자기), 끊임없는 연구개발(한국타이어), 윤리경영(유한양행) 등 장수비결은 제각각이지만 저마다 자신만의 '기업철학'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민족애 바탕으로 유한양행 설립

모든 기업이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유한양행은 유일한 창업주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회사다. 1926년 설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유한양행을 꿰뚫고 있는 창업이념, 기업정신 등이 유 창업주에게서 나온 까닭이다.

1895년생으로 1904년 미국에 건너가 유 창업주는 미시간대를 졸업하고 대학 동창과 함께 '라초이(La Choy Co.)'라는 회사를 세웠다. 숙주나물을 아이템으로 하는 해당 회사는 날로 번창했다. 그러나 30세가 되던 1925년 회사일로 중국 및 동남아 등지를 방문했던 유 창업주는 잠시 들른 조선에서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일제 치하에서 보건문제로 괴로워하고 있는 동포들을 보게 된 것이다. 잠깐의 조국방문을 계기로 유 창업주의 인생은 180도 변화한다.

막대한 이익을 내고 있던 라초이를 동료에게 넘기고 1926년 조국땅을 밟은 유 창업주는 그 해 12월 유한양행을 창립했다. 유 창업주가 유한양행의 로고를 버들표로 한 것에도 재밌는 일화가 담겨 있다. 유 창업주가 유한양행을 만든다고 하자 서재필 박사는 "한국인임을 잊지 말라"는 말을 건네며 버드나무가 새겨진 목각화를 선물했다고 한다. 이후 유한양행의 버들표 로고는 '신용'을 나타내는 주요한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당초 유한양행은 의약품 이외에도 화장지, 생리대, 비누, 치약 등 각종 위생용품을 수입해서 팔았다. 의약품 또한 결핵약, 진통소염제, 혈청, 피부병약 등 필수불가결한 것들 위주로 팔았고 꼭 필요한 약품들은 냉동창고에 보관했다가 긴급한 환자가 발생하면 철도를 이용해 빠르게 공급하는 체계까지 갖췄다.

유한양행은 의약품 수입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경기 부천 소사에 제약공장을 세우고 세계적인 화학자 데이비드 발레트 박사를 초빙해 제약기술을 맡긴 끝에 질 좋은 국내 의약품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유한양행은 성장을 거듭, 1936년 자본금 75만원의 주식회사로 전환할 수 있었다. 1941년에는 수출을 전담하는 유한무역회사를 세우기도 했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에도 유한양행의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1953년 본사 사옥을 다시 짓고 사업을 재개한 유한양행은 1957년 미국제약회사인 사이나미드와 기술 제휴 협약을 맺고 그 해 국내 최초의 항생물질 제품을 만들기도 했다. 1962년 주식을 증권거래소에 상장했고 1970년에는 미국의 킴벌리클라크와 합작, 유한킴벌리를 세웠다. 1982년 유한스미스클라인과 유한사이나미드를, 1983년 한국얀센을 각각 세웠다. 유한양행이 배출한 히트상품으로는 안티푸라민, 삐콤씨 등이 있다.

노노관계 바탕으로 사회공헌

유한양행은 국내기업 중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을 가장 잘 실천하고 있는 곳으로 꼽힌다. 직원복지는 물론이고 사회공헌 또한 재계 최고 수준이다.

유한양행은 '기업과 종업원은 공동운명체'라는 신념 아래 1936년 회사 주식을 직원들에게 나눠주며 실질적인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했다. 또한 매년 정기적인 노사협의회를 개최, 직원들의 애로점과 아이디어를 복지와 경영에 반영해오고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유한양행은 창업 이후 단 한 차례의 노사분규도 겪지 않는 기염을 토했다. 유한양행의 경영인-직원의 관계가 '노사관계(勞使關係)'가 아닌 '노노관계(勞勞關係)'로 불릴 수 있는 이유다.

유일한 창업주의 유언에 따라 도입한 전문경영인 체제와 주식의 사회환원 또한 이를 뒷받침했다. 1971년 타계한 유 창업주는 경영권을 자녀가 아닌 전문경영인에게 물려주고 보유한 회사 지분도 '한국 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현 유한재단)'에 넘겼다. 유한재단과 유한학원 등의 공익법인에 넘겼다.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경영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유한재단은 장학사업과 교육지원사업을 하고 있고 유한학원은 유한대학,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운영 중이다. 지분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유한재단(15.4%)과 유한학원(7.6%)의 존재로 유한양행은 배당금의 상당 부분을 지속적으로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완성하게 됐다.

'좋은 회사' 넘어 '큰 회사'로

유한양행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만 강점을 보이는 회사가 아니다. 1926년 설립 이후 생산활동이 아예 멈췄던 한국전쟁 전후 4년을 제외하고는 단 한 차례도 적자를 내지 않았고 1962년 상장한 이후 단 한 해도 흑자 배당을 쉬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 유한양행의 사정은 그리 좋지 못하다. 다국적 제약사의 도매상 역할을 하면서 외형을 키우고 현금은 쌓아뒀지만 정작 실속은 챙기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유한양행은 국내 제약업계에서 수입의약품 도입에 가장 적극적인 기업으로 꼽힌다. B형간염 치료제 '비리어드', 인슐린 '휴물린', 고혈압치료제 '트윈스타' 등 다국적 제약사들의 판매권을 독점, 몇 년째 몰아치고 있는 약가 인하 폭풍을 비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외형대비 실속은 챙기지 못하고 있다. 유한양행의 지난해 매출은 전기대비 14.3% 늘어난 7,627억원이었지만 영업이익은 같은 기간 동안 오히려 42.2% 줄어든 304억원을 기록했다.

신성장동력을 찾지 못하고 현금만 쌓아두고 있는 것도 문제로 꼽힌다. 유한양행의 자산규모는 업계 1위인 동아제약을 넘어선 지 오래다. 많은 자금이 필요한 신약개발 등에 과감히 투자하지 않기 때문으로 읽힌다. '수입의약품 도입-신약개발 투자 미비-이익률 악화'의 고리가 자연스레 형성되고 있는 셈이다.

그동안 '좋은 회사', '정도(正道)를 걷는 회사'의 길을 걸었던 유한양행이 이제 '큰 회사', '실속있는 회사'로 탈바꿈할 수 있을지 기대된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