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벌 '러브콜' 쇄도하던 법무법인 태평양, 내리막?김승연 한화 회장과 최태원 SK 회장 재판에교체선수로 등장했지만 경제민주화에 승산 희박정용진 부회장과 관계 소원

SK, 한화 등 재벌가의 잇따른 러브콜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법무법인 태평양의 행보에 먹구름이 끼고 있다. 사진은 서울시 종로구 서린동에 위치한 SK 사옥. 주간한국 자료사진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말은 법무법인 태평양(이하 태평양)에도 적용되는 모양이다. 지난해부터 재벌가의 잇따른 러브콜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태평양의 행보에 4월부터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는 까닭이다. 김승연 한화 회장과 최태원 SK 회장 재판에 교체선수로 야심 차게 등장했지만 일이 생각만큼 잘 안 풀리는 데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재판 과정에서도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태평양이 거센 경제민주화 바람을 헤치고 최후의 승자로 남을 수 있을지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올 들어 펄펄 나는 태평양

태평양은 서울민사지방법원 부장판사를 지낸 김인섭 태평양 명예대표변호사가 1980년 법률사무소 형태로 설립, 1987년 법무법인으로 조직 개편했다. 국내 주요 로펌 중 유일하게 법관 출신이 설립했기 때문인지 전관 중에서도 검사 출신보다 판사 출신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태평양은 지난해 기준 1,900억원의 매출을 기록, 김앤장(4,300억원)과 큰 격차가 있는 2위에 올라있다. 그러나 재벌가의 최근 선호도 측면에서는 김앤장을 오히려 압도하는 추세다.

재벌가에 태평양 선호 바람이 강해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300억원대의 회사자금을 횡령ㆍ유용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담철곤 오리온 회장에 대한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이끌어내면서부터다. 1심에서 3년 징역형 선고를 받은 담 회장의 형량을 낮추며 눈길을 끈 것이다.

태평양의 고공행진은 올해도 계속됐다. 태평양은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상속재산을 놓고 벌인 삼성가 유산소송에서 승리, 재벌가의 눈도장을 확실히 찍었다. 역대 최고 수준인 4조원대 삼성가 유산소송에서 태평양의 강용현, 권순익 변호사는 법무법인 세종(윤재윤, 오종한 변호사), 법무법인 원(홍용호, 유선영 변호사)과 함께 연합군을 구성,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변론을 맡았다. 2월 열린 1심 선고에서 로펌 연합군이 맡은 이 회장이 승소하면서 자연스레 태평양의 명성도 올라갔다.

태평양이 재벌가 소송의 히든카드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심에서 실형선고를 받은 최태원 SK 회장이 항소심 변호인단을 교체하면서부터다. 1심 당시 최 회장의 변호는 민병훈 법무법인 공감 대표와 김앤장(신필종, 배현태 변호사 등)이 맡았다. 수임료만 100억원대의 대형 의뢰였다.

그러나 1월 31일 열린 1심 선고에서 징역 4년에 법정구속으로 결론 나자 최 회장은 태평양(이인재, 한위수 변호사 등) 출신들로 항소심 변호인단을 새로 짰다. 이는 재벌가 소송을 도맡아해온 민 변호사나 로펌 부동의 1위 김앤장을 태평양이 제친 것으로 해석되며 더욱 주목을 받았다.

앞서 태평양은 김승연 한화 회장이 새로 짠 항소심 변호인단에도 선임된 바 있다. 배임ㆍ횡령 혐의로 지난해 8월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김 회장도 이후 항소심 변호인단을 태평양(노영보, 홍만표 변호사 등) 중심으로 짰다. 이때도 태평양은 1심 변론을 맡았던 민 변호사 대신 선택되며 눈길을 끌었다.

김 회장에 이어 최 회장에게까지 선택을 받은 태평양은 이후 2012년 국정감사에 불출석한 혐의로 정식재판에 넘겨진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의 소송까지 맡으며 사실상 재벌가 소송의 대세임을 증명해냈다. 또한, 전 부산고검장 출신으로 2011년부터 태평양 고문변호사로 몸담아 온 황교안 변호사가 제63대 법무부 장관에 오른 것도 태평양의 향후 전망을 밝게 했다.

진술 번복 전략도 역효과

문제는 올 들어 연달아 상종가를 쳐온 법무법인 태평양을 둘러싼 분위기가 최근 묘하게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야심차게 맡은 소송들이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이어져 온 경제민주화 바람이 태평양이라고 피해 가지는 않는 모양새다.

지난달 8일 열린 최태원 회장의 항소심 첫 공판을 지켜본 사람들은 저마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 회장이 펀드 출자금 조성과 관련해 꾸준히 부인해왔던 기존의 법정 진술을 번복했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원심에서 사실대로 말씀드리지 못한 부분에 대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고 전했다. 최 회장 측 변호인은 "펀드 조성자가 곧 선지급금 인출자로 이어지는 구도에서 어쩔 수 없는 진술이었다"며 "다만 횡령 혐의가 붙은 펀드 인출에는 관여한 바 없고 인출 자체도 몰랐던 것은 사실"이라고 해명했다.

SK 내부 관계자에 따르면 최 회장의 진술 번복은 태평양의 조언에 따라 전략 변화를 꾀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별로 좋지 않았다. 최 회장의 말 바꾸기가 재판부로 하여금 좋지 않은 인식을 갖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달 29일 열린 두 번째 공판에서 재판부는 최 회장에 대해 "사건에 관해 불리한 진술은 전부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 같다"며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SK 내부에서는 김앤장 대신 태평양을 선택한 것에 대한 비판여론도 팽배한 상태라고 전해진다.

김승연 회장의 항소심 결과도 태평양엔 불리하게 작용되고 있다. 김 회장은 지난달 15일 열린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3년에 벌금 50억원을 선고받았다. 징역 4년에 벌금 51억원을 선고받았던 원심과 비교하면 다소 완화된 셈이지만 김 회장의 구속상태가 이어진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더욱 큰 문제는 새 정부 출범 이후에도 수그러들지 않는 경제민주화 바람에 밀려 최 회장, 김 회장의 향후 변호과정도 수월하게 진행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이와 관련 중견 로펌의 한 변호사는 "두 사람(최태원, 김승연 회장)의 양형기준에 대해서는 재판부도 경제민주화 여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예전 분위기였으면 1심 때 벌써 집행유예로 끝났을 것이지만 지금 분위기상으로는 태평양이 아니라 누가 와도 어려울 것"이라고 전했다.

태평양을 둘러싼 묘한 분위기는 비단 최 회장, 김 회장 관련 재판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최근 신세계에서도 정용진 부회장 국정감사 불출석 혐의 재판 관련해 변호를 맡아오던 태평양에게 불만이 적지 않다.

정 부회장과 정유경 부사장은 정당한 사유 없이 국정감사와 청문회에 출두하지 않은 혐의로 정식 재판에 회부됐다. 이에 두 사람은 태평양에 변호를 맡겼으나 특별한 성과가 없이 결국 법정에 출두, 벌금형을 받아야만 했다. 물론 신동빈 롯데 회장, 정지선 현대백화점 회장도 같은 혐의로 법정에 출두했지만 남매가 나란히 벌금형을 받은 정 부회장-정 부사장의 부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태평양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충분히 나올 만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태평양에 있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최태원, 김승연 회장 재판에서 패소하거나 중간에 교체되고 신세계와도 관계가 껄끄러워지는 경우다. 실패가 이어질 경우 명예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은 물론, 이후 매출에도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는 까닭이다. 올 들어 상승기류를 탄 태평양의 꿈 같은 시절이 '화무십일홍'으로 끝나지는 않을지 주목되는 이유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