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때 문현동 어뢰공장에 보관공장 존재·도굴 흔적 등… 증거 자료 상당수 확보""보물 발굴 참여한 A씨, 경제사범으로 구속된 뒤MB정부때 석연찮은 특별사면… 이후 정치자금 조달 소문 파다" 정부는 공장 존재 공식적 부인

어뢰공장 지도
"탐사꾼 특사 풀려난 뒤 도굴… 정치권 개입한듯"

최근 일본군이 부산 문현동 일대의 어뢰공장에 천문학적인 보물을 숨겨뒀으며 이 보물을 몇몇 탐사꾼들이 도굴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눈길을 끈다. 특히 도굴된 보물들 중 상당 부분이 정치권으로 흘러들어간 정황이 있다는 주장까지 나와 사실여부에 관심이 모아진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 인물은 10여 년간 문현동 보물을 추적해온 정충제(64)씨다. 그는 지난 2009년 자신의 문현동 보물탐사 기록을 정리한 책 '황금백합작전'을 펴내 주목을 끌기도 했다. 정씨는 이 책을 펴낸 뒤 2011년 경 중국으로 떠났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피신한 것이다. 정씨는 중국으로 피신한 이유에 대해 "알 수 없는 권력에 의한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씨는 얼마 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깜짝 놀랄 증거가 있다"고 정씨는 자신 있게 주장한다. 부산 문현동 보물과 관련해 진실을 입증할 열쇠를 찾았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군은 점령지에서 약탈한 각종 보물들을 우리나라를 비롯해 필리핀 등 세계 각지에 묻어 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필리핀에서는 천문학적인 규모의 백금이 발견돼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적이 있다.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은 이를 정치자금으로 활용해 필리핀을 장기집권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야마시타 골드'다.

일제가 만든 어뢰공장
일본군이 전쟁자금을 활용하기 위해 약탈해 숨겨둔 보물의 양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아직도 필리핀과 태평양 일대에는 일본군의 보물을 찾기 위한 탐사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우리나라에도 이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보물 중 일부는 이미 세상 밖으로 나와 어디론가 흘러갔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어 귀를 솔깃하게 한다.

일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4년 말부터 1945년에 걸쳐 중국 등지에서 보물을 약탈하고 다시 그 보물들을 일본 본토로 옮기는 작전을 세웠다. 이 작전은 연합군의 눈을 피해 극비리에 진행됐다. 이 작전의 작전명은 '황금백합작전(일본명: 긴노유리<黃金百合>)'이었다.

이렇게 약탈한 보물은 일본과 가장 가까운 부산항으로 옮겨져 순차적으로 일본으로 향했다. 당시 일제가 기록한 문서에 따르면 부산에서 출발한 보물선 중 일부는 연합군의 공격이나 풍랑으로 바다에 수장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같은 내용은 징용 노동자들의 증언이나 당시 일본군 복무자들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일제는 이 보물을 대부분 잠수함에 실어 일본으로 보냈는데, 이 작업을 한 곳이 부산 문현동에 위치한 일본군 어뢰제조 공장이다.

"문현동 보물은 도굴됐다"

정씨는 문현동 보물탐사와 관련해 사기꾼 혐의 등으로 고소를 당해 옥살이를 했다. 당시 재판 기록을 살펴보면 검찰은 정씨가 다른 사람이 판 굴을 자신이 판 굴이라고 속인 뒤 "보물을 찾아내면 지분을 주겠다"며 투자금을 갈취했다고 판단했다. 정씨는 이에 대해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리처드 로리스 비밀약정 각서
정씨는 "내가 판 굴은 효자동 이발사로 알려진 박수웅씨가 판 굴 옆에 있다. 고소인들은 보물을 최초 발견한 나를 빼고 보물을 독차지하기 위해 내가 박수웅씨가 판 굴로 사람들을 속였다고 덮어씌웠다"고 주장했다.

고소인들의 주장에 따르면 문현동 해당 장소에는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어뢰공장이 존재하지 않고 정씨가 주장하는 내용과 달리 굴을 조사해 본 결과 일부 드러난 굴착 흔적은 해방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검찰과 재판부는 고소인 측의 이 같은 주장을 대체로 인정했다.

정씨는 옥살이를 하고 난 후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진실을 입증하기 위해 전문가들을 동원해 처음부터 다시 일대를 조사하고 자신이 판 굴에서 드러난 각종 흔적으로 과학적으로 조사했다. 그 조사 내용을 살펴보면 굴착 전문가들과 지질 전문가들은 정씨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정씨의 주장대로 정씨가 판 굴에서 드러난 흔적은 일제 강점기 발파공법이며 전파탐지 결과 문현동 일대에 대규모 지하시설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는 소견이 나온 것이다. 굴착 지점에서 발견된 흔적을 보면 발파를 위해 원형천공을 가운데 중심천공이 있는 사각대형으로 뚫은 흔적이 발견되는데, 일본 참고 문헌을 보면 이는 일제강점기 화약 공법인 것으로 드러난다.

정씨는 자신이 고소를 당한 것에 대해 "모종의 음모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정씨는 "일부 인사들의 증언과 현장을 확인해 본 바에 따르면 내가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어뢰공장 도굴이 있었던 것 같다"며 "현장 조사 자료를 살펴보면 어뢰공장에서 보물을 도굴한 흔적이 역력하고 각종 발굴 장비가 주변에 뒹굴고 있다. 도굴한 이들이 대량의 금을 옮기는 것을 봤다는 목격담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또 정씨는 "문현동에 어뢰공장이 있었고 일본군이 그곳에 보물을 매장했다는 정황은 곳곳에서 발견된다"며 각종 자료들을 공개했다. 이 자료들은 강점기 때 어뢰공장 징용에서 살아 돌아온 이들의 육성 증언과 일본군 장성 등으로부터 부산에 막대한 보물이 있다는 말을 들은 이의 육필 확인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또 일본인이 그린 와 보물매장 위치가 기록된 문서도 있다.

결정적으로 정씨는 2000년대 초반 미국 CIA 아시아 담당국장 리처드 로리스(Richard P. Lawless, -그는 사건 이후 미국 국방부 아시아태평양 담당 부차관이 됐다.)와 보물 발굴과 관련해 맺은 비밀약정서도 보관하고 있다. 정씨의 구속으로 보물 발굴이 해프닝으로 일단락되자 리처드 로리스는 약정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보물은 없었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보물 정치권 자금 활용 증거

정씨는 또 다른 의혹도 추가로 제기했다. 보물 발굴에 정치권 인사들의 개입 정황이 있다는 것과 더불어 정치권이 보물의 존재를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씨의 주장에 따르면 보물을 발굴한 당시 촬영한 동영상을 살펴보면 발굴에 앞서 고사를 지냈는데, 이때 당시 정치권 실세가 참석해 고사를 지내는 장면이 있다. 또 도굴한 일당들이 이 보물을 정치권에 일부 상납한 정황이 있다고 정씨는 말한다. 그러나 사정기관의 조사에 대해 정씨는 회의적이다. 자금이 여권 야권 할 것 없이 전방위로 살포됐다면 검찰 수사가 쉽지 않다는 게 정씨의 생각이다.

이어 정씨는 정치권이 보물에 연루된 정황 하나를 언급했다. 정씨는 "보물을 발굴할 당시 참여한 인물 중에 A씨가 있다. 그는 박수웅씨와도 보물탐사 작업을 한 인물인데 국내에서 사업을 크게 했고 나중에 보물을 발굴한 이후에는 해외로 나가 사업을 크게 했다"며 "그는 외환관리법 위반 등으로 수배 됐었는데, 이명박 정권 때 해외에서 자진 귀국해 구속됐다. 그런데 실형을 선고 받은 지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이명박 정부는 임기 말 특별사면을 단행했고 그 명단에 A씨가 포함돼 있었다. 이것은 상식 밖의 일 아닌가"라고 말했다.

A씨가 왜 특별사면대상자 명단에 포함됐는지 이유는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정씨는 이에 대해 "그가 전직 대통령의 정치자금을 댔을 뿐 아니라 특정 정치인들의 비자금도 조달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며 "지난 대선 때에도 그의 자금이 특정 정치인에 지원된 정황이 있다. 그의 특사는 이러한 자금 지원의 결과물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A씨 사면에 대한 사유를 확인하기 위해 법무부에 물어보았으나 법무부는 "특별사면은 수감태도와 죄질 잔여형량 교도시설 책임자 평가 등 여러 면을 고려해 대상자가 결정된다. 그 밖에 구체적인 사유는 확인이 어렵다"고만 밝혔다.

일본군이 숨겨둔 보물

우리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 공장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다. 부산 문현동에는 일본군의 어뢰공장 시설이 없다는 것인데, 정씨에 따르면 이는 보물의 존재를 감추기 위한 정부의 음모에 지나지 않는다. 사단법인 전국일제피해자연합회와 사단법인 일제피해자보상연합회는 이 공장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천여명에 달하는 강제징용 노동자들이 이 공장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다 종전을 앞두고 모두 죽임을 당했다고 확신한다.

두 연합회는 2011년 8월 12일 서울 종로구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같이 주장하기도 했다.

연합회는 "일제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를 보면 길이 약 2㎞의 철로와 어뢰 창고를 뜻하는 수뢰고(水雷庫), 탄약고 등 시설이 발견된다"며 "이는 일제가 이곳에 어뢰공장을 지었다는 결정적 증거"라고 말했다.

연합회는 2002년 부산항 지하에 일제의 어뢰공장이 있었다는 주장을 처음 내놓은 정씨를 통해 해당 지도를 입수했다고 밝혔다. 이 단체는 "당시 동원된 이들 가운데 생사 여부도 모르고 유골조차 발견되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유족 진술을 포함해 해당 부지에 유골이 묻혔다는 진술이 여럿 나오고 있다"며 "국가 차원의 발굴 조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당시 연합회는 정씨가 2005년 한 업체에 의뢰해 받은 부산항 지하 갱도 탐사 결과 소견서를 근거 자료로 함께 제시했다. 이 업체는 탐사결과 갱도 굴착 시기는 해방 이전으로 추정되고, 천정과 측벽에 남은 잔공으로 미뤄 일제 강점기에 주로 사용되던 장비를 이용해 갱도를 뚫은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갱도 용도는 군수물자 저장고나 대피소로 추정했다.

정씨는 2002년 부산시 남구 문현동 1219-1 부지 지하에서 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발견했다고 주장했으나 일부에서는 "해당 통로는 해방 이후 만들어진 것"이라는 반박하고 있다.

일부의 이 같은 반박에 대해 정씨는 "시설의 존재를 은폐하기 위한 세력들이 꾸며낸 말"이라며 "내가 전문가들을 통해 감정한 결과물을 보면 이 시설은 당시 문헌상에 기록된 일본군의 어뢰공장이 확실하다. 발파공법을 비롯해 지하시설 공사 기법이 모두 일제 강점기의 것과 동일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 정충제씨가 밝힌 문현동 보물 발굴과정 개요

1987년부터 수평 굴 파기 시작… 2002년 지하 공간 확인… 일제 숨겨 놓은 자루 확인

윤지환기자

2차 대전 막바지, 패전이 짙어가던 1945년 5월. 아시아 여러 나라를 점령하고 있던 각국 일본군 사령부에 일제히 명령이 하달된다. 전후 일본을 재건하고, 내일의 일본을 기약하기위해 아시아 각국의 보물을 약탈하라는 일명 '긴노유리(黃金百合)' 작전이다. 이에 중국방면군사령부는 각 지역에서 금과 국보급 문화재들을 싹쓸이하여 대련항에서 부산항으로 보냈다.

일본군 중좌 미하라도시오(三原敏雄)는 일본인의 양자였던 조선인 최종욱에게 보물지도와 함께 약탈작전인 '긴노유리(黃金百合)'의 종착지를 가르쳐 주었다. 후일을 도모하기 위함 이였다. 우여곡절 끝에 1987년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이발사였던 박수웅에 의해 부산 문현동에서 본격적으로 보물 탐사 작업이 시작되었다. 박수웅은 세 명의 인부들과 함께 십여 년에 걸쳐 지하 수평 굴을 파 나갔다. 일제가 만들어놓은 지하어뢰공장을 관통시켜 찾아내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보물 찾는 작업은 마치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격이었다. 박수웅은 결국 실패를 거듭한 끝에 포기해 버렸다.

그 뒤를 이어 정충제가 이 일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 2002년 3월 2일 지하 16m아래에 숨어있던 일제어뢰공장의 한 가닥인 수평 굴의 천정이 직경 60cm수직구로 관통되었다. 지상과 연결된 것이다. 이리 되기까지는 결정적으로 미국에서 직접 제작 공수해온 최첨단 탐사장비가 지하어뢰공장이 존재하고 있다는 실체를 증명했다. 이는 직간접적으로 미국의 CIA도 인지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일본군 대본영이 '긴노유리작전'을 실제로 지시했다는 지령문도 CIA가 미국방성 문서보관실에서 찾아낸 적이 있다. 이런 사실은 미 CIA극동 담당책임자였던 리처드 로리스와 정충제의 계약서에 잘 나타나 있다.

관통시킨 수직구 아래 수평굴속은 물에 잠겨 있었다. 수중카메라에 찍힌 영상에는 분명히 일제가 숨겨놓은 이등충(伊藤忠). 세 글자가 찍힌 황토색 마대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차가운 물속에 잠겨있는 거대한 어뢰공장의 지하공간 속에는 천구의 유골이 있다. 진해 해군부 소속으로 징용영장을 받고 끌려온 조선청년들을 일제가 산채로 생매장 시킨 유골인 것이다. 끌려온 징용자들은 문현동 지하에서 두더지처럼 날마다 땅속을 팠다. 죽음과도 같은 나날을 땅굴 파는 일에 시달리던 이 청년들을 일제는 고향으로 되돌려 보낼 수가 없었다. 이들을 살려 보냈다간 그들이 목적했던 긴노유리 작전이 모두 수포가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보물을 일본까지 직접 가져 갈 수 없었던 이유는 이미 1943년부터 미 해군이 현해탄을 막고 있었기에 일본으로 가져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리하여 일본은 아무도 존재여부를 알지 못하는 문현동 어뢰공장을 황금백합 작전의 마지막 종착지로 선택한 것이다.



윤지환기자 jj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