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당 새 당대표 김한길부친 김철 이어 부자 당수 "계파 청산·혁신" 당찬 포부당 화합·국민 신뢰 회복 등 갈 길은 '산 넘어 산'

김한길 민주당 새 대표가 4일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당대표 및 최고위원을 선출하는 전당대회에서 수락연설을 마친 후 지지자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백발 동안(童顔)' 김한길(60) 4선 의원이 제1야당인 민주당의 당대표가 됐다. 비주류의 '대표선수'로 나선 김 의원은 지난 4일 경기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전당대회(대의원 50%, 권리당원 30%, 여론조사 20%)에서 61.71%를 얻어 38.2%에 그친 범주류의 단일후보인 이용섭 의원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친노(친 노무현)와 극명한 대척점에 서며 비주류의 좌장 역할을 했던 김 대표는 전대 승리를 계기로 일약 주류의 핵심으로 도약했다. 김 의원은 지난해 6월9일 전당대회 때도 선전했으나 이해찬 전 대표에게 석패하는 바람에 비주류를 면치 못했다.

'새로운 민주당'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던 김 대표는 수락연설에서 생활 밀착형 정책 제시를 강조한 데 이어 이른 시일 내에 당에 혁신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했다.

김 대표는 "친노와 비노, 주류와 비주류라고 쓰인 명찰을 다 떼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오직 민주당이라는 쓰인 명찰을 다 같이 달고 혁신에 매진하겠다"며 계파 청산을 다시 한 번 역설했다.

베스트셀러 작가, 인기 탤런트의 남편

김한길(가운데) 민주당 대표와 최고위원들이 8일서울 망원시장 상인회에서 열린 상인들과의 간담회에서 망원시장 상인회에서 제작한 할인 전단지를 살펴보고 있다. 류효진기자
김 대표는 베스트셀러 작가 출신의 4선 의원으로 김대중 노무현 대선 후보의 선거 캠페인을 기획하며 당내 최고의 '선거 전략통'으로 자리매김했다. 김 대표는 김대중 노무현 후보의 대선 승리에 큰 힘을 보태며 야권에서는 '2승의 숨은 주역'이라는 찬사도 들었다.

김 대표는 1996년 15대 총선 직전 김대중 총재가 이끌던 새천년민주당에 합류해 비례대표(당시 전국구)로 금배지를 달았다. 김 대표는 여야 양 진영에서 모두 입당 제의를 받았으나 김대중 총재의 손을 잡았다.

김 대표의 부친이 진보정당의 간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새천년민주당 입당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김 전 대표의 선친은 김철 전 통일사회당 당수다.

정계에 발을 들여놓기 전 김 대표는 <여자의 남자>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등을 잇달아 히트시킨 베스트셀러 작가 겸 TV 토크쇼 진행자로서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김 대표는 정계 입문 이듬해인 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의 선거 캠페인을 기획, 총괄하면서 국민의 정부 출범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부인 배우 최명길과 함께 5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시립어린이병원을 찾아 환아들의 식사를 도와주고 있다. 손용석기자
그도 그럴 것이 사상 최초로 도입된 후보들간 TV토론회가 승패의 주요 변수가 된 상황에서 김 대표는 김대중 후보의 방송대책팀장을 맡아 '미디어선거전'에서 완승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이후 '정치인 김한길'의 인생은 탄탄대로였다. 김 대표는 국민의 정부에서 청와대 정책기획수석과 문화관광부 장관 등을 거치며 정치적으로 몸집을 크게 불렸다.

김 대표는 2002년 대선에서도 노무현 후보의 미디어선거대책 특별본부장을 맡아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를 성사시키는 등 '전략통'이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그런 김 대표이지만 2007년 대선 전 탈당을 계기로 친노와는 완전히 등을 돌렸다. 김 대표는 열린우리당 내 비노(비 노무현)계 의원들의 집단 탈당을 주도한 뒤 중도통합민주당을 창당했다. 이어 김 대표는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참여했던 구(舊) 민주당과 통합해 대통합민주신당을 탄생시켰다.

김 대표는 17대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겠다며 2008년 18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뒤 야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지난해 19대 총선에서 서울 광진갑에 전략 공천돼 다시 국회로 돌아왔다.

김 대표는 지난해 6ㆍ9 전당대회 때는 당대표 경선에 나서 11곳의 지역경선 중 7곳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친노 진영의 이해찬 전 대표에게 간발의 차로 밀리고 말았다. 오프라인 투표에서는 앞섰지만 모바일 투표에서 뒤졌던 탓이었다.

김 대표는 지난해 11월엔 대선 승리를 위한 인적 쇄신을 외치며 지도부의 동반사퇴를 주장했다. 하지만 자신의 의견이 수용되지 않자 홀로 최고위원 자리에서 물러났고 결국 지도부 총사퇴 요구를 관철시켰다.

당대표에 등극함에 따라 김 대표는 '부자(父子) 당수'라는 진기록도 세웠다. 김철 전 당수는 71년 7대 대선에서 진보정당인 통일사회당 후보로 출마해 민주공화당 후보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맞붙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김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과는 선대에 이어 2대째 여야 영수로 만나는 인연을 이어가게 됐다.

현실은 산 넘어 산

오랜 비주류에서 벗어나 당의 전면에 나서게 됐지만 김 대표 앞에 놓인 현실은 '산 넘어 산'이다. 당장 김 대표는 극한 대립 양상을 보이는 당을 화합하고 끝없이 추락한 민주당을 재건해야 한다.

김 대표는 단일성 집단지도체제 하에서 인사와 예산에 대한 전권을 확보함에 따라 혁신을 추진할 터전은 마련했다. 하지만 전당대회 직전 친노 핵심인 문성근 전 대표대행이 탈당하는 등 계파 갈등은 전대를 계기로 되레 더 심해졌다.

김 대표가 비노의 '대표선수'로 나서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비주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것은 아니다. 당대표 선거에 나설 만한 '선수'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김 대표를 밀 수밖에 없었던 측면도 없지 않았다.

지난 4ㆍ24 재보선 승리를 통해 야권의 한 축으로 떠오른 안철수 무소속 의원과의 관계 설정도 숙제다. '안철수 신당'은 아직 탄생하지도 않았지만 민주당의 심장인 호남에서 민주당보다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국민적 신뢰 회복이다. 민주당은 대선 전만 해도 새누리당과 치열하게 지지율 경쟁을 벌였으나 대선 패배 후 극심한 계파 갈등, 지지부진한 쇄신 등 악재가 겹친 탓에 지금은 지지율이 20% 안팎으로 추락했다. 당 지도부가 총출동했음에도 재보선 가평군수 선거에서 참패한 것이 민주당에 대한 민심의 냉정한 평가다.

이런 점들을 의식해서인지 김 대표는 전당대회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민주당이 혁신하는 과정을 통해 (안 의원과) 경쟁할 것이고 새 정치의 필요성에 대해 공유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 대표는 이어 전당대회 결과와 관련해 "계파와 세력이 없는 제가 대표가 된 것은 민주당의 큰 변화를 상징하는 일"이라며 "책임정치를 구현하라는 뜻"이라고 큰 의미를 부여했다.

김 대표는 오는 10월 재보선의 필승도 약속했다. "선거에서 지기만 하는 정당은 죽어가는 정당입니다. 당대표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선거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10월 재보선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내년 지방선거부터 우리가 이기는 선거가 될 것입니다."

김한길 뒤엔 '내조의 여왕' 최명길



전당대회서 열성적인 지원 유세 대표 당선 일등공신

김한길 민주당 대표의 부인은 인기 탤런트인 최명길이다. 이들을 가리켜 우스갯소리로 '길길이 부부'라고 한다.

김 대표가 최근 '최명길 효과'를 톡톡히 누린 것은 지난달 21일 광주 합동연설회 때였다. 광주 서구 '김대중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연설회에는 1,000여명의 당원과 대의원들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최명길이 연설회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휴대폰을 열고 사진을 찍는 데 여념이 없었다. 당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연설회장인지, 최명길 사인회장인지 헷갈릴 정도였다는 후문이다.

김 대표는 지난해 6ㆍ9 전대 당시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 "경남에서 이기니 뒤에 김두관 경남지사가 있다 하고, 충북ㆍ강원에서 이기니 뒤에 손학규 상임고문이 있다 하는데 김한길 뒤에는 최명길이 있다"며 승리의 공을 부인에게 돌렸다.

실제로 민주당 내에서도 김 대표가 '최명길 효과'를 톡톡히 누린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민주당 관계자는 "사실 대한민국 국민치고 최명길씨를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면서 "김한길 대표도 예전부터 유명했지만 최명길씨에게는 비할 바는 못 된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김한길·남경필·김무성 등 '부자 정치인' 맹활약

김한길 4선 의원이 민주당의 당대표에 등극함에 따라 다시 한 번 '부자 정치인'에 관심이 쓸리고 있다. 헌정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인 박근혜 대통령은 '부녀 대통령'이다.

김 대표의 부친인 김철 전 통일사회당 당수는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선구자로 1961년 통일사회당 창당을 주도했다. 김 당수는 1970년에는 대선에 출마했으나 김대중 후보를 돕기 위해 막판에 후보를 사퇴했다. 김 대표와 김 전 대통령의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새누리당 소장파의 대표선수 격인 남경필 의원의 부친은 고 남평우 전 의원이다. 남 의원은 부친이 작고하면서 치러진 1998년 수원 팔달 보선에서 승리한 뒤 19대까지 내리 5선에 성공했다.

지난 4ㆍ24 재보선을 통해 5선 고지에 오른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은 고 김용주 전 의원의 아들이자, 최치환 전 의원의 사위다. 김 의원은 아버지에 이어 원내대표(구 원내총무)를 지낸 이색 경력을 갖고 있다.

고 김진재 전 의원의 아들인 김세연 새누리당 의원은 18대 때 부산 금정구에서 36세로 금배지를 달아 최연소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김 의원의 장인은 한승수 전 총리다.

국회 국방위원장인 유승민 3선 의원은 13, 14대 국회의원을 지낸 유수호 전 의원의 차남이고,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인 시절 비서실장을 지냈던 유일호 재선 의원은 고 유치송 전 민한당 총재의 장남이다. 정우택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고 정운갑 전 농림부 장관(5선 의원)의 아들이다.

여당만큼은 아니지만 민주당에도 2세 정치인들이 적지 않다. 김한길 대표의 비서실장으로 내정된 노웅래 재선 의원은 노승환 전 국회부의장의 아들이다.

김성곤 민주당 의원은 부친인 고 김상영 전 의원에 이어 야권을 대표하는 부자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 의원은 성실한 의정활동을 무기로 4선 배지를 달았다. 이종걸 민주당 의원은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이다. 이 의원의 조부는 우당 이회영 선생이고, 작은할아버지는 초대 부통령인 이시영 선생이다. 또 이종찬 국민의 정부 초대 국가정보원장은 이 의원의 사촌형님이 된다.

서울 중구에서 정진석 전 3선 의원을 누른 정호준 의원의 부친은 정대철 민주당 상임고문이다. 정 의원의 조부인 고 정일형 박사는 2~9대 8선 의원을 지냈고, 부친인 정 고문도 5선 경력을 자랑한다.

직계로만 따져도 정 의원의 집안에는 금배지 14개가 있다. 정 의원의 집안은 한국을 대표하는 정치 명가인 셈이다.



최경호기자 squeez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