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을'의 반란 확산매출 품목·수량 강제 부과수요예측 실패 피해 전가, 계약 해지 볼모로 협박도숨죽이던 '을' 연대여·야 경쟁적으로 '남양유업 방지법'추진표준근로계약서도 개선, 법 집행 일선기관 변해야

남양유업대리점피해자협의회, 시민단체 회원들이 9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 남양유업 본사 앞에서 남양유업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세부적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김주영기자
'갑'의 횡포에 억눌려있던 '을'들의 반란이 시작됐다. 억울함을 국민들에게 호소, '못된 갑'남양유업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이기도 하고 뿔뿔이 흩어져있던 택배기사들이 연대하여 '슈퍼 갑' CJ대한통운을 상대로 대대적인 전쟁을 선포하기도 했다. 특히, 그동안 갑들을 대변해왔던 정치권마저 국민들의 여론을 의식한 듯 저마다 '을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상태라 제대로 승기를 잡은 듯 보인다.

그러나 시민단체 일각에서는 마치 '을'이 '갑'을 압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재의 분위기에 대한 우려섞인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여론에 밀려 보여주기식 대책만을 내놓는 '갑'과 이에 만족하고 있는 '을'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결국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또한, 이들은 공정거래제도의 변화 및 이를 실제로 집행하는 주무단체의 변화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에 <주간한국>에서는 최근의 일들이 어떻게 진행돼왔는지를 짚어보고 남양유업, 농심, 한국지엠, 네이처리퍼블릭 등 소위 '나쁜 갑'으로 지목되고 있는 기업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을'들을 희생시켜 왔는지 살펴봤다. 더불어 관행처럼 굳어진 갑을관계 불공정 거래 행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안이 필요한지 모색해봤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갑을관계 변화의 기폭제가 된 것은 하나의 녹음파일이었다. 남양유업의 젊은 영업직원이 아버지뻘의 대리점주에게 폭언을 하는 내용이 담긴 녹음파일은 비행기 승무원을 하대한 '라면 상무'와 호텔 주차관리원을 폭행한 '빵 회장'을 거치며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던 국민들의 분노를 끓게 만들었다.

해당 동영상은 공유사이트 유튜브에 올라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명 인터넷 사이트로 퍼지며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남양유업의 홈페이지와 블로그, 트위터는 흥분한 국민들의 비난글로 가득 찼고 이에 버티지 못한 남양유업은 하루 만에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다.

민주당과 진보정의당 의원 및 대리점 업주 대표 등이 14일 국회에서 '대리점거래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일명 '남양유업방지법')' 제정을 청원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오대근기자
공식 사과문 발표에도 남양유업을 향한 비난여론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밀어내기, 떡값요구 등 그동안 남양유업이 대리점주들에게 행해온 불공정 거래 행위들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 검찰이 서울 남대문로 남양유업 본사, 지역본부 사무실 3개소를 압수수색하고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가 직권조사에 들어서는 등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김웅 남양유업 대표를 비롯한 남양유업 임직원들이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발표했음에도 사태는 전혀 진정되지 않았다.

흥미로운 점은 국민들의 관심이 남양유업이라는 하나의 기업에만 그치지 않고 산업 전반에 만연한 갑을관계 불공정 거래 관행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을'들이 연대하며 큰 목소리를 내면서 비로소 가능해졌다.

대표적으로 국회경제민주화포럼, 참여연대, 민변, 경제민주화국민운동본부가 지난 7일 공동 주최한 '재벌ㆍ대기업 불공정ㆍ횡포 피해 사례 발표회'(이하 발표회)를 꼽을 수 있다. 발표회는 남양유업, 한국지엠, 농심, CJ대한통운 등의 '갑'에게 피해를 입어온 '을'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쏟아내는 자리였다. 또한, '을'들은 힘을 모아 수십여 개 '갑'들을 불공정 거래 행위 등의 혐의로 공정위에 신고하고 검찰에도 고발할 예정이다.

'갑' 경영실패까지 책임져

'을'들은 그동안 '갑'으로부터 어떠한 피해를 입어왔길래 이처럼 폭발하게 된 것일까. <주간한국>에서는 최근 대표적인 '나쁜 갑'으로 꼽히고 있는 업체들이 '을'을 상대로 어떻게 횡포를 부려왔는지 발표회 자료와 해당 피해자들의 의견을 종합해 살펴봤다.

이번 남양유업 사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유통업계 갑을관계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관행은 '밀어내기' 등의 불공정 거래 관행이다. 갑을관계 불공정 거래 행위의 가장 황당한 점은 '갑'의 경영실패까지 '을'이 책임져야 한다는 점이다. 신제품 개발 실패, 수요예측 실패 등으로 인한 피해를 '을'에게 모두 떠맡기면 되니 '갑'의 매출 성적표는 우수할 수밖에 없다. 그 뒤에 피눈물을 흘리는 '을'들의 희생이 자리잡고 있음은 물론이다.

남양유업은 영업직원이 대리점의 인터넷 발주 전산 프로그램(PAM21)에 접속, 대리점의 발주 품목 및 수량을 조작한 발주서를 만들어 서버에 보존하는 방식으로 '밀어내기'를 해왔다. 이후 남양유업의 물류센터에서는 조작된 발주서에 따라 대리점 주문량의 2~3배에 이르는 물량을 배달했다. 대리점주들은 떠맡은 초과물량 중 상당 부분을 폐기하게 되고 이는 고스란히 적자로 남게 됐다. 실제로 피해점주들이 모여 만든 남양유업대리점피해자협의회의 이창섭 회장의 경우 지난 3년간 월평균 1,600만원씩의 적자를 감수해야 했다.

'밀어내기'는 화장품 브랜드인 네이처리퍼블릭에서도 자행되고 있다. 명동역 지하상가에서 매장을 하고 있는 전진호씨는 지난해 11월 처음으로 네이처리퍼블릭 매장을 열었다. 월 매출 3,000만원 대의 소규모 매장이었다.

전씨에 따르면 창업 직후 자신이 주문하지도 않은 물건들이 입고되기 시작했다. 영업담당 직원에게 거세게 항의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담당자가 바뀐 올해 3월에는 유상할당이라며 168만원어치의 제품이 또다시 들어왔다. 해당 금액은 결국 전씨가 갚아야 하는 미수금으로 이어졌다. 5월에도 '밀어내기'로 1,140만원어치의 물품이 들어왔다. 물류기사를 설득, 해당 물품을 받지 않았던 전씨에게 돌아온 것은 각종 불이익 및 지원 중단이었다.

이에 대해 네이처리퍼블릭 관계자는 "5월 감사의 달을 맞아 지난 3일부터 열흘간 대규모 고객감사세일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인기제품의 재고가 부족할 것으로 예상돼 제품 공급정책에 따라 대리점주들에 발주를 제안했다"며 "해당 제품은 부진 재고가 아닌 주력제품들이었고 대리점주가 발주를 원치 않아서 매장에 입고시키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이어 관계자는 "우리는 이번 일로 피해 대리점주에게 어떠한 불이익이나 지원 중단도 하지 않았다"며 "다만 제품 발주를 제안하는 과정에서 대리점주와 충분한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죄송스럽게 생각하며 이를 적극적으로 개선해 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매출목표 강제·마진 떠넘겨

농심은 특약점을 대상으로 매출목표의 강제 부과로 인한 부당이득을 얻고 있다. 김진택 농심특약점전국협의회 대표에 따르면 농심은 전국 400여 개 라면특약점과 150여 개 음료특약점에 매출목표를 강제로 부과하는 방식으로 매출을 늘린다. 강제 부과된 목표를 80% 이상 달성하지 못할 경우 판매장려금을 전혀 지원하지 않는다.

문제는 농심이 특약점들에 강제로 부과하는 매출 목표가 전년대비 일정한 비율만큼씩 증가한다는 점이다. 김 대표는 "목표치는 해당 특약점이 최대로 할 수 있는 매출보다 항상 많게 정한다"며 "특약점주들은 농심에서 비싼 가격으로 물건을 사다가 '삥시장'에 싸게 팔아서 겨우 목표를 채우고 있다"고 항변했다.

본사에서 내려오는 판매장려금을 받지 못할 경우 특약점 운영비조차 충당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 편법을 써서라도 매출 목표를 채울 수 밖에 없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농심은 매년 매출목표를 초과달성하는 반면 특약점주들의 빚은 점차 늘어난다.

한국지엠은 지역총판인 메가딜러를 통해 대리점에 무리한 비용을 부담시켜왔다. 메가딜러는 과거 한국지엠 대리점들의 본사인 대우자판이 파산하면서 2010년 만들어졌다. 한국지엠전국대리점연합회에 따르면 메가딜러는 마진 2.2~3.2% 인하분을 대리점 지원금 감축 등을 통해 그대로 대리점에 전가해왔다.

또한, 메가딜러는 한국지엠 판매관리시스템인 '다빈치'를 통해 전국 대리점에 임의로 결정된 판매물량을 강제로 할당하고 일정 수준 이하의 사업실적 평가점수를 받은 대리점은 경영개선 약정을 체결했다. 약정에 따른 이행을 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보조금을 삭감하고 심한 경우 대리점 계약을 해지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지난해에만 15개 대리점이 문을 닫았고 전국 대리점의 70% 이상이 경영악화로 집단 파산할 위기에 처해 있다.

일방적 계약파기 협박

과거에도 '갑'의 불공정 거래 행위를 견디다 못해 항의하는 '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갑'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일방적인 거래해지 및 재계약 거부를 볼모로 '을'을 협박해왔다. 이미 수억원대의 매몰비용이 들어간 이상 '을'들은 '갑'에게 이렇다 할 불만을 제기할 수도 없었다.

김진택 대표에 따르면 농심은 자사의 제품판매정책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거나 개선을 요구하는 특약점에 대해 계약해지 또는 재계약 거부로 맞서왔다. 김 대표는 "수년 동안 농심의 특약점을 해왔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수억원대의 부채를 지니게 된다"며 "당장 특약점을 그만두면 상환해야할 빚에 눌릴 것이 뻔한 상태라 울며 겨자먹기로 아무런 말도 못하고 사업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남양유업의 피해 대리점주들 또한 "능력이 없으면 그냥 사업을 접으라"는 영업직원의 말을 무수히 들어왔다고 입을 모았다. 남양유업대리점피해자협의회에서 취합한 대리점주들의 호소문에는 어김없이 계약해지를 무기로 협박하는 담당 영업직원들에 대한 불만이 담겨있었다. 최초 투자비용과 보증인에게 돌아가는 피해 등을 고려해야만 하는 대리점주들에게 계약해지는 무서운 무기였다.

한국지엠은 아예 1년의 단기계약기간을 통해 대리점주들을 압박해왔다. 한국지엠과 대리점주가 맺는 계약서에는 총판인 메가딜러의 자의적, 일방적 계약 해지가 가능하도록 규정된 '계약의 임의해지ㆍ위약해지'내용이 담겨 있었다.

제도개선 갑을관계 바뀔까

남양유업 사태로 촉발된 갑을관계 불공정 거래 행위 비난여론에 부담을 느낀 '갑'들은 '갑ㆍ을'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기로 결정하는 등 나름의 자정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민단체들은 단순히 '갑'의 자발적 변화만 기대하지 말고 갑을관계를 뿌리부터 바꿀 수 있는 법안 및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같은 시민단체의 의견은 조만간 현실화될 것으로 보인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의 반향이 예사롭지 않은 까닭이다. 민주당 이종걸 의원은 14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참여연대의 입법 청원을 수렴 검토해 '대리점 거래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한다고 밝혔다. 일명 '남양유업 방지법'으로 불리는 해당 법안은 대리점, 특약점 등이 공정거래법, 하도급법, 가맹사업법 등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법적 사각지대에 놓인 것을 방지하기 위해 별도로 제정하게 됐다.

해당 법안에 따르면 불공정 거래 행위 금지규정을 위반해 상대방에게 손해가 발생하면 손해액의 10배 범위 내에서, '밀어내기'를 했을 경우 대리점주가 입은 손해의 3배 범위 내에서 배상책임을 지게 된다. 또한 대리점 본사가 계약을 해지하고자 하는 경우 절차와 요건을 지켜야만 하고 표준 대리점 계약서의 사용을 의무화한다. 이처럼 불공정 거래 행위 유형을 구체적으로 규정해 '을'들의 권익을 보호하겠다는 것이 법안의 골자다.

같은 날 새누리당 전ㆍ현직 의원 모임인 '경제민주화실천모임'도 국회에서 '대기업-영업점 불공정 거래 근절 정책간담회'를 열고 불공정한 갑을관계 해결방안을 모색했다. 새누리당 이종훈 의원은 '갑'의 횡포를 막기 위해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 전면 확대, ▲집단소송제의 전면 도입, ▲사인의 행위금지청구 제도 도입, ▲공정위 결정에 대한 신고인의 불복 기회 부여, ▲내부 고발자 보호 및 보상 강화 등 공정거래법 개정 방향을 제시했다.

시민단체 일각에서는 현재 있는 법안만 잘 활용해도 갑을관계 불공정 거래 행위가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라는 목소리도 있다. 현재도 공정거래법 23조(불공정거래행위의 금지) 1항에는 '자신의 거래상의 지위를 부당하게 이용하여 상대방과 거래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는 터라 주무기관인 공정위만 강하게 나서줘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문제는 공정위의 제재 수위가 너무 약하다는 점이다. 남양유업의 경우 2006년에도 이번과 똑같은 문제로 공정위의 시정명령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최소한의 과징금 부과조차 없었던 공정위의 소극적 권한 행사는 남양유업의 불공정 거래 관행을 전혀 바꿔내지 못했다.

공정위가 '을'들의 고발에 민감히 대응하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다. 김진택 대표는 농심의 불공정 거래 행위를 지난해 7월 공정위에 제소했고 같은 해 9월 한국지엠전국대리점연합회 또한 한국지엠의 불공정 거래 시정조치를 신청했다. 그러나 공정위는 지금까지 별다른 결론을 내놓지 않고 있다. 참여연대 관계자는 "'을'들을 지켜줘야만 하는 공정위가 사실상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럴 거면 공정위가 독점하고 있는 전속고발권을 폐지하고 검찰, 경찰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겠냐"고 지적했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