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세피난처 명단 공개 후폭풍뉴스타파 245명 순차 폭로국세청 공개된 5명 수사 착수검찰도 예의주시하며 전방위로 수사 확대 계획

김용진(왼쪽) 뉴스타파 대표와 최승호 PD가 2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해외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한국인 숫자와 일부 재계인사의 실명을 공개하고 있다. 김주성기자
"올 것이 왔다." 최근 공개된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한국인 명단을 본 정재계 인사들의 말이다. 실명이 드러난 사람은 현재 5명에 불과하지만 명단을 공개한 '뉴스타파' 측이 이미 245명을 확보했고 앞으로 약 한 달간 나눠서 발표할 것이라고 공표한 터라 더욱 큰 파장이 예상된다.

특히, 재계가 긴장하고 있는 부분은 자신들이 조세피난처에 설립한 현지법인들에까지 불똥이 튈지 여부다. 지하경제 양성화를 내건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며 국세청의 압박이 거세지고 있는 상황이라 이번 명단 공개의 후폭풍이 재계를 덮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양새다.

버진아일랜드에만 245명

독립 인터넷 언론 '뉴스타파'는 22일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 전국 언론노동조합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의 공동 취재 결과를 발표했다.

'뉴스타파' 측에 따르면 조세피난처 버진아일랜드(BVI)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한국인은 현재까지 총 245명이 확인됐다. 이들은 1995년~2009년에 걸쳐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했는데 특히 2007년 금융위기를 전후한 시기에 집중됐다. 이는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 설립을 대행해주는 '포트컬리스 트러스트넷(PTN)'과 '커먼웰스 트러스트(CTL)' 내부자료에 담긴 13만여 명의 고객명단과 12만2,000여 개의 페이퍼컴퍼니에 대한 정보를 분석한 결과다.

김현미 의원이 배포한 2012년 국세청 국정감사 보도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이 전 세계 조세피난처에 설립한 현지법인수는 상위 10개 국가에 3,092개사가 존재했다. 출처: 김현미 의원실
조세피난처란 법인이 실제로 벌어들이는 소득의 전부 또는 상당 부분에 대해 법인세를 부과하지 않거나 아주 저율로 과세하는 국가 또는 지역을 의미한다. 조세피난처에서는 통상적으로 '외환거래법', '회사법' 등의 규제가 거의 없어 기업 경영상 장애요인이 거의 없다. 특히, 금융 거래의 익명성도 철저히 보장되는 특성 때문에 탈세 및 돈세탁용 자금 거래의 온상으로 기능한다.

국제 금융계에선 바하마, 버뮤다, 케이만군도 등 조세를 전혀 부과하지 않는 국가를 '조세 천국(Tax Paradise)'으로 홍콩, 파나마, 라이베리아,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등 지극히 낮은 세율을 부과하는 국가를 '조세 피난처(Tax Heaven)'로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스위스 등 특정 기업이나 사업에만 혜택을 주는 국가를 '조세 휴양지(Tax Resort)'로 분류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세청과 관세청이 경제거래가 활발한 국가 중 조세피난처 역할을 하는 62개국을 우범국으로 지정, 관리해오고 있다.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것 자체는 불법이 아니다. 실제로 기업들은 해외 부동산 투자에 나서거나 외국 기업과 합작하는 과정에서 설립과 청산 정차가 간편한 페이퍼컴퍼니를 자주 이용한다. 그러나 조세피난처의 페이퍼컴퍼니는 기업 및 개인이 해외로 재산을 빼돌리거나 비자금을 조성할 때 주로 사용하는 역외탈세의 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커 문제가 된다. 다시 말해 '존재만으로는 문제될 것이 없지만 역외탈세 조사의 근거로는 충분'한 사안인 셈이다.

국세청 조사 가능성 커져

'뉴스타파' 측은 245명의 조세피난처 페이퍼컴퍼니 설립자 중 5명만을 1차로 공개했다. 이수영 OCI 회장과 부인 김경자 OCI 미술관 관장,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의 부인 이영학씨, 조욱래 DSDL 회장과 장남 조현강씨가 그 주인공이다. 사실을 인정한 이 회장과 OCI는 도덕성 논란에 휩싸였고 대한항공, DSDL은 자사와는 관계없는 일이라며 해명하기에 급급한 상태다.

이날 명단이 발표된 인물들은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사실만 확인됐을 뿐 자금운용방식 및 규모, 탈세 의혹 등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과거 사례를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이 설립 의도 자체가 의심스러운 상태라 국세청의 심층 조사가 진행될 것은 분명하다.

그동안 국세청은 영국, 미국, 호주의 세정 당국에서 방대한 조세피난처 역외자산 자료를 넘겨받아 분석하고 있었다. 국세청은 '뉴스타파' 발표에 앞서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에도 한국인 명단 제공을 요청했지만 "정부기관에는 주지 않는다"는 협회 방침에 따라 자료 입수에 어려움을 겪어 왔다.

국세청 소식통에 따르면 국세청은 이수영 OCI 회장 부부 등 실명이 공개된 5명에 대한 사실 확인 작업에 착수한 상태다. 당사자와 그가 속한 기업의 해외 계좌 개설 여부, 계좌의 성격, 개설 방식 및 사용내역 등 확보 가능한 자료를 토대로 역외탈세 여부를 판단한 뒤, 혐의가 확인되면 세무조사를 통해 과태료 부과, 추징 등 강력한 제재를 가하겠다는 계획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에 공개된 자료에 설립된 시기만 있을 뿐, 구체적인 계좌나 금액이 명시돼있지 않아 역외탈세 여부를 판단하는 정보로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증거가 확실치 않은 이상 역외탈세 여부를 확정하기에는 이르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국세청 내부에서는 "명단이 나온 이상 증거 확보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 지배적이다. 국세청 내부 관계자는 "(국세청은) 그동안 세무조사를 위한 근거를 찾고 있었다"며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했다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에 내야 하는 정상적인 세금을 최대한 피하려는 행위로 해석되는 만큼 본보기를 위해서라도 이미 공개된 인물들에 대해서는 철저한 조사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고 강조했다.

김덕중 국세청장이 23일 출근길에 만난 한 기자에게 전한 말도 이러한 예상을 뒷받침하고 있다. 김 청장은 "역외탈세는 올해 국세청의 4대 중점과제 중 하나이므로 역점을 두고 추진해야 할 과제"라며 "내용을 분석해 탈세 혐의가 있으면 원칙에 따라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명단 발표에 민감히 반응하고 있는 것은 국세청만이 아니다. 최근 CJ그룹이 역외탈세를 통해 조성한 자금에 대한 고강도 수사를 벌이고 있는 검찰 또한 이후의 명단 발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모양새다. 조세피난처를 통한 재산은닉, 비자금 조성 등이 국세청에 의해 사실로 확인되는 즉시 재계 전방위로 조사범위를 확대하겠다는 계획이다.

현지법인 대기업 긴장

조세피난처 페이퍼컴퍼니 설립자 명단 공개로 국세청과 검찰의 역외탈세 조사 의지에 불길이 댕겨지며 재계 전체가 긴장하고 있다. 특히 조세피난처에 현지법인을 두고 있는 기업들의 경우 행여나 불똥이 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역외탈세 목적으로 설립한 것이 아닐지라도 기업 이미지의 타격이 불가피해진 데다 세무조사 범위를 확대 중인 국세청의 올무에 걸릴 가능성이 다른 곳보다 월등히 높은 까닭이다.

사실 재계의 이런 염려가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7월 영국의 '조세정의네트워크'가 전 세계의 조세피난처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하면서부터다. 세계은행과 국제결제은행, 국제통화기금 자료를 포함한 여러 데이터에 기초해 은닉 자산 규모를 추산한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의 기업 또는 개인이 지난 40여 년간 조세피난처로 빼돌린 돈은 약 21조달러(2경4,000조원)에 달했다. 이는 전 세계 총생산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다.

'조세정의네트워크'의 보고서에는 우리나라에 관한 내용도 담겨있었다. 우리나라 인사들이 조세피난처에 은닉한 자금은 1970년대부터 2010년까지 약 7,790억달러(890조원)로 대한민국 1년 예산(325조원)의 두 배를 훨씬 웃도는 액수다. 조사 대상 139개국 중 중국(1억1,890억달러), 러시아(7,980억달러)에 이어 세번째로 큰 규모다.

해당 보고서의 발표로 인해 조세피난처에 설립된 현지법인을 지닌 기업들에 대한 여론은 급격히 악화됐다. 액수가 너무 큰 까닭에 역외탈세를 통한 국부유출 기업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덧씌워진 까닭이다.

이미 한 번 지목된 바 있는 기업들은 이번에도 긴장하는 모양새다. 특히 '뉴스타파' 측이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주체가 개인 외에 법인도 있다고 밝히면서 관련 기업들의 부담은 더욱 커지고 있다.

향후 공개될 명단에 정확히 어떤 기업의 이름이 올라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금융감독원 공시 등을 바탕으로 조세피난처 현지법인을 조사한 과거의 자료를 근거로 짐작할 수는 있다. 재벌닷컴은 지난해 7월을 기준으로 30대 그룹의 해외법인을 조사한 결과 15개 그룹이 OECD가 조세피난처로 지목한 44개 국가 또는 지역에 47개의 현지법인을 두고 있다고 발표한 바 있다.

당시 발표에 따르면 롯데그룹은 버진아일랜드(9개사), 케이만군도(3개사), 모리셔스(1개사) 등 조세피난처에 총 13개 현지법인을 설립해 '일본 기업이 국부를 유출하고 있다'는 비난섞인 시선을 받았다. 그밖에 현대차그룹(케이만군도 4개사, 버진아일랜드 1개사), 현대중공업그룹(마셜군도, 버뮤다, 모리셔스, 파나마, 케이만군도에 각각 1개사), LG그룹(파나마 3개사, 마셜군도 1개사), 현대그룹(파나마 3개사, 버진아일랜드 1개사) 등도 조세피난처에 현지법인을 다수 설립해 눈길을 끌었다.

대표적인 사례를 꼽아보자면 다음과 같다. 롯데그룹은 2010년 롯데쇼핑을 통해 케이만군도에 LHSC Limited를 설립했다. 케이만군도에는 현대자동차가 2001년 현지법인인 China Millennium Corporations (CMEs)자리잡고 있다. SK그룹의 SK이노베이션도 2007년 케이만군도에 SK Energy Road Investment라는 투자회사를 세운 바 있다.

버진아일랜드에 현지법인을 둔 대기업도 상당수다. 한화그룹 주력 계열사인 한화케미칼은 버진아일랜드에 Hanwha SolarOne Investment Holding Ltd를 2006년 설립했다.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CJ그룹도 CJ CGV와 CJ대한통운을 통해 각각 Envoy Media Partners Limited, Water Pipeline Works Limited라는 현지법인을 두고 있다.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는 기업들은 억울하다는 반응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기업 관계자는 "조세피난처에 현지법인을 설립한 기업들 중에는 탈세를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은 곳이 훨씬 많을 것"이라며 "불법적으로 운용하려 했으면 (공시 등을 통해) 드러나게 했을 리가 있겠냐"라고 항변했다.

이어 관계자는 "가장 부담스러운 것은 사정기관의 '대기업 때리기'로 형성된 국민들의 반기업정서"라며 "(뉴스타파)의 이번 발표 이후 정치권, 시민단체의 압박을 받고 마음이 바빠진 국세청이 애꿎은 우리를 타깃으로 삼을까 걱정이다"고 말했다.

실제로 '뉴스타파' 발표 다음날 오전 9시 30분 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 내가만드는복지국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생경제위원회 등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국세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강력한 세무조사와 처벌을 촉구했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