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촛불집회로 본 시위·집회 변천사. 연합뉴스
4.19혁명 현대적 국민 저항운동 시초
한일회담 반대운동 교수·목사 등 전국민 참여
1973년 '유신헌법 반대' 서명운동의 효시

1980년대 5.18 민주화운동 시작으로 6월 민주항쟁서 절정… '6.29 선언' 이끌어내
1997년 이후 시위·집회에도 새바람
미선이·효순이사건 거치며 '촛불 문화제'
전국민 즐기는 저항 아닌 놀이로 진화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규탄하는 촛불집회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서울 청계광장과 광화문 일대에서 열리는 촛불집회에는 매일 수백여 명, 주말에는 수천여 명이 참가하며 열기를 더하고 있는 상황이다.

흥미로운 것은 평화롭게 진행되는 촛불집회임에도 정치권 및 정부에서 느끼는 부담이 결코 작지 않다는 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정치권은 나날이 확산되는 촛불집회의 압박으로 결국 국정원 국정조사에 합의했고 청와대 또한 이번 사건이 제2의 광우병 사태로 이어질까 전전긍긍하는 모양새다. 과거의 시위ㆍ집회처럼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충분한 효과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대를 뛰어넘어 국민의 강력한 무기로 자리 잡은 시위 수단들은 어떻게 이런 힘을 지니게 됐을까. 이에 <주간한국>에서는 한국 사회의 중요한 사건마다 어떤 시위ㆍ집회문화가 발생했으며, 이후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시대별로 살펴봤다.

1960년 4.19 혁명
시위ㆍ집회문화 만든 4.19혁명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하 집시법)에 따르면 시위란 여러 사람이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도로, 광장, 공원 등 일반인이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는 장소를 행진하거나 위력 또는 기세를 보여 불특정한 여러 사람의 의견에 영향을 주거나 제압을 가하는 행위를 뜻한다.

집시법에서의 정의를 감안할 때 해방 이전 대표적인 시위ㆍ집회로는 1898년 독립협회의 주최로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와 3.1운동을 들 수 있다. 최초의 만민공동회에는 무려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해 독립과 개혁에 대해 발언했으며, 3.1운동은 대중에 의해 조직된 체계적이고 근대적인 시위ㆍ집회로 꼽힐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위ㆍ집회와 맥락을 같이하는 현대적 의미의 국민적 저항운동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독재정치와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혁명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4.19혁명은 학생들로부터 시작된 대중의 조직방식이나 이후 사회 전반에 미친 영향 등 많은 부분에서 이후의 시위ㆍ집회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4.19혁명부터 한일회담반대운동으로 이어진 1960년대가 그 어느 때보다 시위ㆍ집회가 많았던 시기라는 점도 이 같은 의견을 뒷받침했다.

1965년 한일회담 반대운동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것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었다는 점도 눈에 띈다. 불과 17세의 어린 학생의 눈에 최루탄을 박아넣을 만큼 강경했던 경찰의 진압은 결국 큰 역풍으로 이어져 대통령 하야라는 결과를 이끌어 냈다. 사상 처음으로 진행된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이 그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는 점도 주목거리다. 최근 불길처럼 번져갔던 대학별 시국선언의 선조 격인 셈이다.

4.19혁명과 함께 1960년대의 시위ㆍ집회 문화를 양분했던 것은 1964~1965년 전개된 한일회담반대운동이었다.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과 기술을 일본으로부터 들여오기 위해 한일회담에 적극적으로 나선 박정희 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된 한일회담반대운동은 학생과 야당 이외에도 대학교수, 개신교 목사, 예비역 장성, 법조인, 여성계 인사 등이 참석하며 이른바 전국민의 시위ㆍ집회 참여라는 특성을 지녔다.

서명운동부터 분신자살까지

1970년대는 비상계엄을 선포해 국회를 해산하고 10월 유신을 단행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의도대로 민주적 헌정체제가 부정되고 국민의 기본권이 억압된 어둠의 시대였다. 자연히 이 시기의 시위ㆍ집회는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진행됐다.

1970년대 내내 이어진 유신헌법반대운동 중 시위ㆍ집회 문화의 측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함석헌, 장준하, 백기완 등 각계의 재야인사들이 주도한 개헌청원 백만인서명운동이다. 서명운동의 효시라고도 볼 수 있는 해당 운동은 현재도 아고라 등을 통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1976년 유신헌법반대운동
1973년 12월 24일부터 시작돼 열흘 만에 30만명의 서명을 받는 등 전국민의 뜨거운 호응이 이어지자 놀란 박 전 대통령은 대통령담화를 발표, 해당 서명을 즉각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그럼에도 서명운동의 물결이 끊이지 않자 박 전 대통령은 결국 긴급조치 1호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서명운동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사건이었다.

1970년대에는 노동자들의 분신자살도 자주 일어났다. 선성장ㆍ후분배의 논리로 진행된 고도성장정책으로 희생된 노동자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한 분신자살은 시위ㆍ집회 문화의 가장 극단적 형태로 꼽힌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의 분신자살을 필두로 수많은 노동자들의 극한적 투쟁이 이어졌다.

불법적ㆍ폭력적 형태로 격화

1980년대의 시위ㆍ집회는 5.18민주화운동으로 시작됐다.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27일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당시 계엄사령관 퇴진, 김대중 석방 등을 요구하며 벌인 민주화운동이다.

초기에는 비교적 온건한 시위ㆍ집회의 형태로 시작했으나 계엄군의 무차별 집단발포로 사상자들이 속출하고 시위대가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며 무력항쟁으로 변모했다. 무장한 시위대가 계엄군을 몰아내며 광주가 1주일간 무정부상태에 처하기도 했지만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오히려 별다른 치안사고가 일어나지 않아 더욱 주목됐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5.18민주화운동의 영향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과도한 제재로 인해 1980년대의 시위ㆍ집회는 어느 때보다 불법적ㆍ폭력적으로 진행됐다. 시위ㆍ집회 현장마다 화염병, 각목으로 무장한 시위대와 최루탄, 곤봉으로 무장한 경찰의 무력 충돌이 이어졌고 그로 말미암은 사상자도 급격히 늘어난 시기였다. 민주당 조정식 의원은 과거 한 언론을 통해 시위ㆍ집회 현장에서 화염병을 처음으로 제조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깜짝 발표를 하기도 했다.

1980년대 내내 그치지 않던 시위ㆍ집회는 1987년 6월민주항쟁에서 절정에 달했다. 약 20일간 전국적으로 500여만명이 참여한 민주항쟁에는 직장인들로 상징되는 '넥타이 부대'의 동참이 두드러졌다. 결국 견디다 못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결국 직선제 개헌과 평화적 정부이양, 대통령선거법 개정, 김대중의 사면복권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6.29선언을 발표했다. 민주세력과 국민들의 역량이 집결된 시위ㆍ집회가 마침내 절차적으로나마 민주화를 이뤄낸 것이다.

축제처럼 진행된 촛불집회

헌정사상 최초로 평화적ㆍ민주적인 정권교체가 이뤄진 1997년 이후 시위ㆍ집회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각목과 화염병 대신 평화의 상징인 촛불이 시위ㆍ집회의 주도권을 잡게 된 것이다.

촛불집회가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2002년 이른바 미선이효순이사건으로 불리는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압사사건 때부터다. 두 여중생을 추모하자는 한 네티즌의 제안에 따라 처음으로 시작된 촛불집회는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반대 촛불집회,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운동 등을 거치며 전국민이 즐기는 촛불문화제의 성격을 지니게 됐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시위ㆍ집회가 촛불문화제 형태로 진행되며 새로운 문화도 나타났다. 보수와 진보, 남녀노소를 떠나 국민 모두가 광장, 거리에서 어울리며 저항이 아닌 놀이의 형태로 시위ㆍ집회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수십개의 천막과 텐트에서는 시민밴드들이 위문공연을 펼쳤고 삼삼오오 모여 모닥불을 피우고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디지털카메라, 스마트폰 등으로 무장한 시위대가 오히려 경찰을 채증하는 기현상도 곳곳에서 벌어졌다.

불법ㆍ폭력ㆍ강함의 옷을 벗어 버리고 합법ㆍ평화ㆍ약함을 취한 시위ㆍ집회지만 역설적으로 더 많은 것들을 이뤄냈다. 대선개입을 규탄하는 촛불집회가 확산되자 국정원에서 NLL대화록 공개로 맞선 것도 촛불을 통한 평화적 시위ㆍ집회 문화가 지닌 힘을 쉬이 짐작게 한다. 지난 백 년 동안 끊임없이 모습을 바꿔온 시위ㆍ집회의 이후 발걸음이 기대되는 이유다.


2002년 미선·효순이 추모집회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문화제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