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 'MB 색채' 지우기에 양팔… 공공기관 수장들 "나 지금 떨고 있니?"

새정부 ‘MB 색채’ 지우기에 양팔

“국정 철학을 공유할 수 있는 공공기관장이 필요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이처럼 말했다. 대대적인 공공기관장 물갈이를 예고한 셈이다. 이른바 ‘MB(이명박)맨’으로 통하는 기관장들과 전문성이 결여된 ‘보은성 낙하산 인사’가 주요 대상으로 거론됐다.

그로부터 6개월. 공공기관장 인사 작업은 지지부진하다는 평가다. 그러나 최근 공공기관장의 물갈이 작업이 본격화되고 있다. 특히 순순히 사퇴하지 않으면 사정기관 등을 동원해 당사자나 해당 조직을 직간접적으로 압박하는 등 강도 높은 물갈이가 진행되고 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는 공공기관장들은 좌불안석이다. ‘MB맨’이란 수식어가 붙은 수장들은 특히 그렇다. 금융권이나 민영화 공기업의 수장도 예외는 아니다. 그동안 이들 조직 인사에서 정부가 막강한 입김을 행사해왔기 때문이다.

정부 ‘MB맨’ 축출에 전력

박근혜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주요 공공기관장들에게 일괄 사표를 받았다. 동시에 재신임 및 교체 절차를 밟았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벌어진 자연스러운 풍경. 새정부의 국정기조에 수족처럼 움직여 줄 인물을 기용하기 위해서다.

특히 ‘MB맨’으로 분류되는 기관장들은 일제히 퇴임 절차를 밟았다. 주강수 한국가스공사 사장과 정승일 지역난방공사 사장, 안승규 한국전력기술 사장, 허증수 에너지관리공단 이사장, 강승철 석유관리원 이사장 등은 진작 사표를 제출했다.

또 김건호 한국수자원공사 사장, 이지송 한국토지주택공사 사장, 박석순 국립환경과학원 원장, 정창영 코레일 사장, 박승환 한국환경공단 이사장, 박재순 한국농어촌공사 사장 등 ‘MB인맥’으로 통하는 수장들도 자리를 내놨다.

그러나 사퇴 의사를 밝힌 기관장 대부분은 지난해 임기가 끝나 연임한 이들이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비교적 쉽게 물러난 이유다. 그러나 일부 기관장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는 새정부의 인선작업이 지지부진한 배경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최근 주요 공공기관장들의 사장 인선에 속도를 내고 있다. 특히 ‘MB맨’으로 분류되는 공공기관장을 색출하는 데 혈안이 된 모습이다. 순순히 사퇴하지 않을 경우 사정기관 등을 동원해 당사자와 해당 조직을 직간접적으로 압박하고 있다.

실제, 장석효 한국도로공사 사장은 지난 3일 검찰 소환조사를 받았다. 2011년 6월 한국도로공사 사장에 취임한 이후 4대강 사업 공사에 참여했던 유신코퍼레이션 유모 회장에게서 청탁과 함께 수천만원을 수수한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다.

장 사장은 ‘대운하 총사령관’으로 통하는 ‘MB 공신’이다. MB의 사조직 ‘한반도 운하 연구회’ 회장으로 4대강 사업의 밑그림을 그렸다. 대선 후에는 대통령직인수위의 한반도 대운하 특별팀장을 맡기도 했다.

MB정부 시절 신임된 장영철 한국자산관리공사 사장은 국민권익위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다. 권익위는 지난 3일 금융위원회에 장 사장에 대한 징계를 요구했다. 국민행복기금 전산화 용역 입찰 과정에서 지인의 회사가 선정되도록 부당 압력을 행사한 혐의다.

장 사장은 현재 임기만료를 두 달 앞두고 있다. 정부 안팎에선 권익위의 행보를 장사장의 조기 퇴진을 위한 압력으로 보고 있다. 한국자산관리공사는 크게 반발하고 있다. 권익위 발표사항 수용할 수 없으며, 장 사장의 거취를 언급하는 것도 부적절하다는 입장이다.

지난 2일에는 장태평 한국마사회 회장이 이동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을 만나 사표를 제출했다. 장 회장은 미국산 쇠고기 사태로 정운천 장관이 낙마한 자리를 이어 받아 2008년 8월부터 2년간 농식품부 장관을 지낸 ‘MB맨’이다.

장 회장은 임기를 1년 이상 남겨두고 있었다. ‘물갈이 대상’이라는 시선에도 최근까지도 업무 의욕이 넘쳤다. 그러나 친정인 농식품부가 최근 마사회의 치부를 드러낸 감사 결과를 이례적으로 공개하면서 거취를 결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지난달 30일 MB정부 대통령실장을 지낸 정정길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도 사표를 냈다. 사임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임기가 7개월이나 남은 데다 최근까지 업무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는 점에서 정부차원의 압박이 작용하지 않았겠느냐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같은날 임기 1년여를 남기고 사의를 표명한 김정국 기술보증기금 이사장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되고 있다. 김 이사장은 MB정부 시절 대통령비서실 경제비서관, 재정경제원 차관보 등을 거쳐 2011년 기술보증기금 이사장에 임명된 인물이다.

떨고 있는 기관장 누구?

공공기관장들에게 현상황은 ‘일촉즉발’ 한 마디로 요약된다. 당연히 앉은 자리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 ‘MB맨’ 내지는 ‘낙하산’이라는 꼬리표가 달린 수장들은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불안에 떨고 있는 공공기관 수장들은 누가 있을까.

지난해 1월 취임한 김선규 대한주택보증 사장이 ‘MB라인’의 대표적인 예다. 현대도시개발 출신으로 MB의 ‘현대인맥’으로 분류되는 김 사장은 2009년 김중겸 전 한국전력 사장과 함께 현대건설 사장직 물망에 오른 바 있다.

김해수 한국건설관리공사 사장도 걱정이 깊을 것으로 보인다. 김 사장은 대통령실 정무1비서관 출신으로 2011년 선임됐다. 김 사장은 선임 초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으로부터 이명박 정부의 대표적 ‘보은성 낙하산 인사’라는 낙인이 찍혔다.

고경화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원장도 밤잠을 못 이룰 전망이다. 한나라당 당직자 출신에 비례대표 의원을 지낸 고 원장은 선임 당시부터 선거에 낙선한 인사를 구제하기 위한 전형적인 낙하산 인사라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양유석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 원장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통신개발연구원 연구위원과 정보통신정책학회 회장을 지낸 양 원장은 2008년 청와대로 스카우트돼 방송정보통신비서관을 지내면서 ‘낙하산 인사’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금융권, 민영화 공기업도 불안

금융권도 사정권 안에 있다. 그동안 금융기관 수장 인선에는 정부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정권이 바뀌면 수장 역시 교체되는 게 통상적이었다. 방법도 공공기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정기관을 동원해 수장을 직간접적으로 압박하는 식이었다.

이번 정권에 들어서도 벌써 한 차례 바람이 불었다. 강만수 전 KDB산은금융지주 회장, 이팔성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 어윤대 전 KB금융지주 회장, 김승유 전 하나금융지주 회장 등 MB의 ‘사대천황’으로 분류되는 수장들은 이미 자리를 내놨다.

하지만 최원병 농협중앙회 회장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MB의 동지상고 4년 후배다. MB정부는 2007년 낙하산이라는 노조의 반발과 여론의 비판에도 최 회장의 선임을 강행했다. 이후 최 회장은 2011년 연임에 성공하며 임기를 2년 이상 남기고 있다.

금융권 안팎에선 새정부 출범 이후 최 회장이 자리를 유지하지 못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이런 전망은 어긋났다. 정부로선 불편할 수밖에 없는 대목. 현재 사정기관은 농협중앙회나 최 회장과 관련 각종 비리를 수집해 내사를 벌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KT&G와 KT, 포스코 등 공기업에서 민간기업으로 바뀐 ‘민영화 공기업’ 수장의 거취도 거론되고 있다. 포스코는 2000년, KT와 KT&G는 2002년 공기업에서 민영화됐다. 그러나 이들 기업 수장 인사 역시 사실상 정부가 좌지우지 하고 있다.

‘MB맨’으로 분류되는 이석채 KT 회장과 정준양 포스코 회장 등은 모두 임기가 2년 이상 남았다. 그러나 전임 수장들 역시 정권교체기에 임기와 무관하게 중도 퇴진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거취도 전례를 따를 수 있다는 견해가 많다.

민영진 KT&G 사장은 사정기관의 전방위적 압력을 받고 있다. KT&G는 국세청ㆍ검찰ㆍ경찰 등 3대 사정기관의 표적이 됐다. 그 시작은 민 사장 연임 불과 일주일 뒤인 3월 국세청 ‘저승사자’로 통하는 조사4국의 특별 세무조사를 받으면서다.

비슷한 시기, 검찰과 경찰은 KT&G 자회사 제2노조가 제기한 MB측근 광고회사 물량 몰아주기 특혜 의혹과 청주공장 부지 매매 비리 의혹 사건에 대해 경쟁적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민 사장의 업무상 배임 혐의가 역점 수사 대상이었다.

그러던 지난 6월엔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가 본격 칼을 빼들었다. 청주시가 자체 추정한 감정가 250억원짜리 청주연초제조창 부지를 350억원에 매입한 과정에서 거액의 뇌물이 오고가는 등 ‘혈세 나눠먹기’가 이뤄지지 않았느냐는 의혹과 관련해서다.

이렇듯 사정기관이 KT&G를 옥죄는 배경에 민 사장이 거론되고 있다. 이른바 ‘MB맨’으로 통하는 민 사장이 정권교체기에 연임된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긴 정부가 팔을 걷어붙였다는 분석이다.

정준양 회장의 사퇴론도 확산되고 있다. 국세청이 지난 3일 포스코에 대한 세무조사에 착수하면서다. 포스코는 정기조사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5년 단위로 정기조사를 받아온 포스코에 3년만에 국세청 직원이 들이닥쳤다는 점에서 정 회장을 겨냥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석채 회장도 지난달 29일 청와대로부터 퇴진 요구를 받았다는 주장에 직면했다. 청와대가 이 회장에게 임기 전 사임을 요구했으나, 이 회장은 때가 아니라며 거부했다는 게 주된 내용이다. 청와대와 KT는 이에 즉각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송응철기자 sec@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