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 없던 우월적 지위 또다른 횡포로 이어지나경제민주화 바람 불면서 '남양유업 사태' 이후 반란갑은 바짝 엎드려 눈치 반면 을은 하늘 찌를 기세택배노동자들 수수료인하 파업… 대한통은 등 슈퍼갑 '백기 투항'

'을의 역습'이 시작됐다. 이른바 '남양유업 사태' 직후부터다. 당시 '을'들은 일제히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피라미드형 먹이사슬 최상위에 위치해 온 '갑'들의 위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파열음은 곧 재계에 가득 울려 퍼졌다.

화들짝 놀란 갑들은 계약서에서 '갑'과 '을' 용어를 삭제하거나 대국민사과를 하는 등 진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진정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때문에 갑들의 의도와 달리 논란은 불씨에 기름을 부은 듯 확산됐다.

현재 갑은 바짝 엎드려 눈치를 살피고 있다. 자칫 도마에 오를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다. 반면, 을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다. 전례에 없던 우월적 지위를 손에 넣은 때문이다. 심지어 을의 반란은 횡포로 이어지며 갑이 고초를 겪는 일마저 벌어지고 있다.

남양유업 사태 이후 촉발

사실 '갑을관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히 재벌 중심의 시장경제 구조가 강화되면서 갑을관계는 더욱 뚜렷해졌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원청업체와 하청업체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에서 일상화되다시피 했다.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갑의 횡포는 다반사였다. 그럼에도 을은 억압을 묵묵히 견디며 숱한 눈물을 훔쳐야 했다. 갑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자칫 먹고 살길이 막막해질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이렇게 갑을관계는 현대판 계급제도의 상징이 됐다.

'반란'의 기미는 최근 경제민주화 바람이 일면서 감지됐다. 그러나 당장 이렇다 할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누구도 갑에게 대들 엄두를 내지 못한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을의 반란이 시작된 건 지난 5월. 이른바 '남양유업 사태'가 벌어지면서다.

당시 시민단체가 남양유업 대리점주들과 한 목소리를 냈다. 정치권도 가세해 힘을 실어줬다. 여기에 검찰과 공정거래위원회 등 사정기관도 수사에 착수해 불법적인 물량 밀어내기 등이 있었는지를 밝혀내기 위한 작업에 나섰다.

궁지에 몰린 남양유업은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열고 머리를 숙였다. 그러나 1차 피해자인 대리점주에 대한 사과가 생략돼 상황을 악화시켰다. 사태는 결국 불매운동으로 이어졌고, 남양유업은 점유율과 기업 이미지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됐다.

갑을관계의 공론화와 이례적인 을의 승리. 이후 억눌려온 을들의 분노가 사방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을들은 업종을 가리지 않고 약속이라도 한듯 앞다퉈 반격에 나섰다. 본격적인 '을의 반란'이 시작된 셈이다.

대한통운ㆍKCC 등 진땀

CJ대한통운은 '을의 반란'으로 진땀을 뺀 대표적인 회사다. '남양유업 사태' 직후 택배노동자들이 수수료 인하 문제로 파업에 나서 '갑을전쟁' 국면에 진입했다. CJ대한통운이 앞서 수수료율을 인하하고 패널티 제도를 도입한다는 발표가 단초였다.

당초 수도권과 전주를 중심으로 택배차량 500여대가 무기한 파업에 돌입했다. 이후 부천 등의 택배기사들이 합류하면서 약 1,000대의 차량이 파업에 동참했다. CJ대한통운의 영업에 심각한 차질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결국 사태는 CJ대한통운이 '백기투항'하는 선에서 봉합됐다. 배송거부를 주도하던 대리점주 및 배송기사들과의 대화에 나서 2주 만에 극적 협상이 타결됐다. 이를 통해 CJ대한통운은 '갑을전쟁'의 중심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왔다.

비슷한 시기, KCC건설도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려야 했다. 자사의 공사 현장에 레미콘을 납품하는 업체들에게 판매단가표의 97%로 발행하던 세금계산서를 차기 물량 납품을 조건으로 89%로 대폭 낮춰 발행해달라며 '단가 후려치기'를 시도한 데 따른 것이다.

건설업계에선 그간 단가 후려치기가 관행적으로 이뤄져 왔다. 그러나 레미콘 업체들은 이번 KCC건설의 요구가 너무 무리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KCC건설 사업장에 대한 레미콘 납품을 거부하는 강수를 뒀다.

KCC건설은 예상치 못한 을의 '역공'에 크게 당황했다. 사태가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KCC건설은 슬며시 꼬리를 내렸다. 레미콘 업체들과 협의를 갖고 납품단가 인하 요구를 철회한 것이다. 을의 단결이 갑의 횡포를 잠재운 셈이다.

치킨 프랜차이즈 제네시스BBQ도 을의 역공에 '험한 꼴'을 당했다. BBQ 대리점주들이 본사의 계약 해지에 반발하며 '집단 소송' 카드를 꺼낸 것이다. 공정위와 국회의사당, BBQ 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진행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대리점주들은 BBQ가 일방적으로 대리점 모집, 물류 공급 등 지역 대리점 사업을 총괄 대행해 온 지역본부와 계약 해지를 강행했다고 주장했다. BBQ의 계약해지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올초 전북과 강원 지역 대리점과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해 논란을 빚은바 있다.

그러나 BBQ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해당 대리점주들과 협상을 거쳐 요구사항을 빠짐없이 수용했다. 덕분에 집단 소송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피할 수 있었고, '갑을관계' 논란에서도 멀어질 수 있었다.

SK텔레콤도 간담이 서늘한 경험을 했다. 한 판매점 사장이 공개한 SK텔레콤 직원과의 통화내용이 인터넷을 통해 일파만파로 퍼져 나가면서다. 판매점 사장은 SK텔레콤이 수년에 걸쳐 전국적으로 판매점을 압박하며 불공정거래 행위를 해왔다고 주장했다.

통화내용이 담긴 녹취록에는 이통사의 인터넷 저가 휴대폰 판매와 차감정책 등에 대한 고발 내용이 담겨 있다. 판매점 사장은 공정위와 방송통신위원회, 미래창조과학부 등에 이런 내용을 담은 민원을 넣겠다고 했다.

상황 악용하는 을도 등장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갑들 사이에선 볼멘소리가 적지 않다. '갑을 논쟁'에서 만큼은 자신들이 약자의 위치에 있다는 게 갑들의 호소다. 자신들이 을을 괴롭히는 존재로 인식돼 여론의 질타를 받는다는 이유에서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경제민주화라는 큰 흐름을 타고 갑을관계의 이슈화를 막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잘못된 점을 바로잡으려다가는 오히려 '갑의 횡포'라는 회오리에 말릴 수 있어 울며 겨자 먹기로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반면, 을은 기존에 갖지 못했던 우월적 지위를 손에 쥐게 됐다. 갑과 을의 위치가 서로 바뀌게 된 셈이다. 그러다 보니 '남양유업 사태' 이후 상황을 악용해 경제적 이득을 챙기려는 '못된 을'들도 속출하고 있다. 을의 반란이 횡포로까지 이어진 셈이다.

실제로 최근 한 편의점 가맹점주는 언론을 통해 본사의 밀어내기로 폐기되는 도시락이 하루 5만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문제의 편의점에서 주문한 도시락은 한 달에 2개에 불과했다. 연출을 위해 다른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오기도 했다.

앞서 다른 편의점주 역시 언론을 통해 본사의 카네이션 밀어내기 정책으로 피해를 봤다고 폭로했다. 그러나 해당 점포에서 주문한 카네이션은 인근 지역 평균에 비해 30% 수준에도 미치는 6개에 불과했다. 또 이마저도 점주 스스로가 주문한 것으로 확인됐다.

한술 더 뜨는 일도 있다. 본사에 송금해야 할 금액을 개인 채무를 막기 위해 사용한 뒤 변제가 어려워지자 점포를 본사에 양도하기로 한 뒤 자신을 피해자로 포장해 언론에 왜곡된 사실을 전하고 본사로의 점포 양도 금액을 2배로 올려 제시한 것이다.

한 대형마트도 입점업체 점주의 횡포에 몸살을 앓았다. 화장품 매장을 운영하는 문제의 점주는 매출이 저조해 재계약을 못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갑의 횡포'와 언론사 제보 등을 운운하며 재계약과 점포 위치 변경을 요구해왔다.

모백화점도 하도급업체에게 '험한 꼴'을 당했다. 문제의 회사는 2004년 해당 백화점 출신들이 출자해 설립한 종업원 지주회사로 최근까지 해당 백화점 광고와 관련한 업무를 독점적으로 수행해왔다.

문제는 백화점이 이 회사와의 계약을 종결 지으면서 발생했다. 이 회사는 직후 백화점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고 인건비와 광고제작비 등 용역비 51억원을 지급하지 않고 있다며 언론에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공정위에 제소했다.

그러나 백화점은 강경하게 대응했다. 하청업체를 사문서 위조 및 사기 등의 혐의로 고소하기로 한 것이다. 지난해 내부감사 결과 160억원의 비용을 부당 편취하는 내부 비리가 적발됐다는 게 백화점의 주장이다.

갑들은 일부 을의 행태가 도를 넘었다고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을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 분위기가 만연해 있어 진실을 밝히려다 자칫 역풍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남양유업 사태 이후 요구를 안 들어주면 언론에 제보하겠다는 협박이 부쩍 늘었다"며 "요즘 같은 시국에 언론에 오르내리면 회사 운영에 문제가 있어 다소 불합리한 요구라도 대부분 수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송응철기자 sec@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