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암 전문의가 죽음에 관해 남긴 선언신상원 교수 '사전의료의향서'서 자연스러운 임종 막는 처치 거부연명치료는 죽음 미루는 일 불필요한 치료 환자 고통 커져건강한 육체와 정신 갖췄을 때 품위 있는 죽음 깊이 생각해야

신상원(52) 고려대 종양혈액내과 교수는 "중년이 되면 잘 사는 법 만큼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혜영기자
"저 신상원은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인생을 마무리 할 시간이 찾아온다면 가능한 평화롭고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인생을 평화롭게 마무리하는 것은 제 인생을 완성하는 유일한 기회입니다. 자연스러운 임종을 방해하는 불필요하고 고통스러운 의학적 처치를 거부합니다. 인위적으로 죽음의 과정을 연장시켜 불필요한 고통을 초래하고 싶지 않습니다. 운명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겠습니다."

큰 병을 앓거나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누구나 죽음을 자신의 일로 여기기 마련이다. 영화를 보다가, 책을 읽다가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도 한다. 어느 날 불현듯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올 수도 있다. 죽음은 이처럼 살아 있는 존재를 끝까지 따라다니는 실존이자 현실이다. 죽음에 대한 준비가 더 나은 삶을 사는 데 도움을 준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품위 있게 죽기를 원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잘 죽으려면 죽음과 맞대면할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하다.

신상원(52) 고려대 종양혈액내과 교수는 최근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 신 교수는 A4용지 두 장 분량의 글에서 죽음에 대비하는 자신의 소신을 담담히 밝혔다. 급성 심근 경색, 교통사고, 화재로 인한 연기 질식 등 예측할 수 없는 사고를 제외하면 어떠한 경우에도 심폐소생술을 비롯한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단다. 특히 신 교수는 의학적 소견에 따라 더 이상의 치료가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면 항암 화학치료, 수술, 방사선 치료를 모두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20여년간 수많은 암 환자를 돌봐온 유명 의사는 왜 연명치료를 거부하기로 맘을 먹었을까. 신 교수는 "내가 몸담고 있는 종양혈액내과는 병원에서 죽음을 가장 많이 접하는 곳이다. 수많은 환자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함께 겪으면서 현대의학의 위대함과 한계를 경험했다. 죽음이 인생에서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과정이라면, 품위를 지키며 고통스럽지 않게 마무리할 기회가 누구에게나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답했다.

신 교수가 작성한 사전의료의향서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 인공호흡기 같은 생명유지장치를 이용하거나 심폐소생술을 하는 등의 연명치료 범위를 두고 자신의 생각을 밝힌 선언문이다. 말기암 환자 등이 죽음에 임박하면 수술이나 치료, 약이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태가 온다. 이때 생명을 유지하는 데 그치는 각종 연명치료 대신 통증 중심 치료로 고통을 최소화하며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사전의료의향서에 담는다.

중증질환자에게 말기 진단이 내려지면 의사는 가족에게 집에서 편안히 모시라고 권유한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나서는 환자나 가족은 많지 않다. 환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족은 마음의 부담감을 떨치기 어려운 탓이다. 이혜영기자
신 교수는 "연명치료는 말 그대로 죽음을 하루라도 미루는 일이다. 나는 의학의 힘을 빌어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찾아온다면 가정에서 편안하고 품위 있게 인생을 정리할 기회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40, 50대가 돼서 인생을 되돌아볼 기회가 생겼을 때, 건강한 육신으로 건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때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지만, 정작 이를 실행에 옮기는 이는 많지 않다. 2012년 한국 호스피스ㆍ완화의료학회지에 게재된 '일개 도시주민의 품위 있는 죽음 태도에 대한 예측 요인' 논문은 연명치료중단에 대한 남녀의 인식을 분석한다. D시에 거주하는 20세 이상 성인남녀 29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연명치료 중단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263명(90.4%)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응답자들은 연명치료 중단이 필요한 이유로 '인간은 품위 있게 죽을 권리가 있음' '많은 노력에도 회복 불가능하기 때문' '환자의 극심한 고통 경감' 등을 꼽았다. 연명치료중단 허용 범위와 기준의 법제화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271명(93.1%)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서울대병원이 암 사망자 실태를 조사한 결과 10년 전과 비교하면 숨지기 직전까지 병원에서 지내는 환자들이 크게 늘었다. 2002, 2003년 사망자 298명 중 2주전까지 항암제를 투여한 사람은 17명(5.7%)이었지만 2012년에는 전체 사망자 206명 중 49명(23.8%)이었다. 인공호흡기 치료를 받다가 숨진 비율도 8명(2.7%)에서 41명(19.9%)으로 증가했다.

말기환자는 연명치료로 어떤 고통을 받을까. 가령 80대 할머니가 폐암 말기로 3주 시한부 선고를 받고 병원에서 진료를 지속한다고 가정해보자. 뼈만 앙상하게 남은 할머니에게는 머리카락이 없다. 항암치료 부작용으로 모두 빠졌기 때문이다. 메마른 얼굴 여기저기엔 얼룩덜룩 검버섯이 돋아 있다. 코에는 영양공급 튜브가 삽입돼 있다. 할머니의 가슴팍에는 혈관주사가 꽂혀 있다. 이 주사로 포도당 수액과 마약성 진통제 모르핀을 투여한다. 몸 한 쪽에 패치 진통제를 붙였지만 극심한 고통이 온몸을 엄습한다.

죽음이 임박할수록 할머니 상태는 악화된다. 의식을 잃고 자가호흡도 어려워진다. 인공호흡기를 매달아야 하고 때로는 기도확보를 위해 기도에 관을 삽입할 수도 있다. 최후의 순간에는 멎은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기 위해 제세동기를 사용한다. 앙상해진 할머니의 몸 위에 20대 청년 의사가 올라타 제세동기를 들고 전기 충격을 가하면, 할머니의 몸에는 고압전류가 흐르고 그 충격으로 인해 갈비뼈가 부러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결국 할머니는 얼마 못 가 죽음을 맞아야 한다.

불필요한 연명치료를 선택하는 사람이 늘면서 임종의 질은 악화되고 있다. 암환자의 경우 숨지기 직전 2개월에 사용하는 진료비가 전체 진료비의 50%에 이른다. 고가 항암제를 맞으며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은 셈이다.

신 교수는 "존엄사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은 많아졌지만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될 정도로 깊이 있는 논의는 없었다"며 환자의 가치관을 반영해 평온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

그는 "현재 사전의료의향서에 법률적 근거가 없다 보니 의료진이나 가족의 판단에 사전의료의향서 반영 여부가 달려 있다"면서 "사전의료의향서를 강제할 만한 제도적 근거가 마련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김지현기자 hyun1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