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별 보수 공개, 재판 결과 책임, 후계구도 마련 등 다양재계 총수, 잇딴 등기이사 사퇴한진ㆍ신세계ㆍ롯데ㆍ오리온 이어 현대차ㆍ한화ㆍSKㆍCJ 총수도 사임재판 중인 태광ㆍ효성ㆍ동양 거취 관심

정몽구(오른쪽) 현대차그룹 회장이 7일 충남 당진의 현대제철 당진제철소를 예고 없이 찾아 안전 관리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현대차그룹 제공
본격적인 정기 주주총회 시즌이 시작됐다. 상장사들 위주로 주주총회 결의안을 속속 내놓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사안은 총수들의 등기이사 선임 여부이다. 주요 그룹 총수들이 등기이사직에서 사퇴하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띄며 책임회피 논란을 빚고 있는 것이다.

등기이사는 주주총회 소집과 대표이사 선임권, 국내외 주요 투자 및 채용 등 기업 경영 전반을 의결하는 이사회의 구성원을 뜻한다. 총수들이 소유와 경영을 사실상 겸하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회사의 주요 안건을 처리하는 등기이사직 사퇴는 소유로 인한 이득만 취하고 경영의 책임은 떠맡지 않겠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올해부터 등기이사 개인의 보수가 공개되는 것과 맞물리며 의혹 어린 시선까지 한 몸에 받게 됐다. 이에 <주간한국>에서는 올해 정기 주주총회를 기점으로 상장사의 등기이사 자리를 반납하는 주요그룹 총수들을 살펴보고 그 같은 결정을 하게 된 배경을 짚어봤다.

보수 공개에 부담 느꼈나

총수들이 등기이사직을 내려놓기 시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부터 있어왔던 흐름이 최근 더욱 강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조남호 한진중공업그룹 회장,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조정호 전 메리츠금융지주 회장,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 등이 비슷한 시기에 저마다 등기이사에서 물러났다. 박근혜 정권 초기 경제민주화 기조가 강해지며 재계를 압박하고 그것이 등기이사 보수 개별 공시로까지 이어진 것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해석된다.

등기이사 보수 개별 공시의 내용이 담긴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은 지난해 4월 말 국회를 통과, 그해 11월 말부터 본격 시행됐다. 12월 결산법인들의 경우 이달 제출하는 사업보고서부터 적용된다. 공개 대상 보수는 급여, 상여, 퇴직금, 퇴직위로금 등 세법상 인정되는 모든 급여와 주식매수선택권 등의 행사이익을 포함한다.

왼쪽부터 정용진신세계그룹부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연합뉴스). 이재현 CJ그룹 회장.
물론 해당 법안에도 빠져나갈 구멍은 있다. 등기이사 평균 보수가 5억원 이상인 것과 미등기이사의 경우 아예 상관이 없다는 점 등이다. 국내 30대 그룹 가운데 등기임원 평균 보수가 5억원 이상인 회사는 총 117개사이고 대주주가 등기이사로 등재돼있는 곳은 67개사이다. 다른 등기이사와 비교해도 상대적으로 많은 보수를 받고 있었던 총수들은 이에 부담을 느끼고 등기이사직을 포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백의종군 결정한 최태원

주요 그룹 총수들이 등기이사직을 내려놓은 것이 단순히 개별 보수 공시로 인한 부담으로만 정리되지는 않는다. 대표적인 사례로 현재 재판 중이거나 유죄판결을 받은 총수들을 꼽을 수 있다.

4일 SK그룹에 따르면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그룹 내 계열사에서 맡고 있는 모든 등기이사직에서 사퇴하기로 결정하고 이 같은 뜻을 김창근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에게 전달했다. SK그룹 관계자는 "최태원 회장이 회사발전 우선과 도의적인 측면에서 책임을 지고 모든 계열사 등기이사직에서 사임하고자 한다는 뜻을 밝혀왔다"며 "이사직을 사임하더라도 회사의 발전을 위한 일이라면 백의종군의 자세로 임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고 밝혔다.

최 회장은 현재 4개 계열사에서 등기이사를 맡고 있다. 그 중 ㈜SK와 SK이노베이션의 임기는 올해까지이고 SK C&C와 SK하이닉스에서의 임기는 각각 2016, 2015년에 만료된다. SK그룹은 최 회장이 사퇴한 대부분 계열사 등기이사직에 후임 사내이사를 선임하지 않고 사외이사 비중을 확대하는 형태로 이사회 중심 경영을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는 각 계열사별 이사회에서 논의, 최종적으로 확정할 계획이다.

최 회장은 지난달 27일 열린 상고심에서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가석방을 고려하지 않을 경우 남은 형기인 3년을 더 복역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옥중경영이 쉽지 않은 데다 유죄 판결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피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 재계의 중론이다. 최 회장의 동생인 최재원 SK그룹 수석부회장도 SK E&S와 SK네트웍스의 등기이사직을 내려놨다.

변수 많지만 일단 사퇴 결정

배임ㆍ횡령ㆍ탈세 등의 혐의로 재판 중인 이재현 CJ그룹 회장도 올해 임기가 만료되는 모든 계열사의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났다. CJ그룹 관계자는 "이재현 회장이 계열사 등기이사직에 차차 물러나는 것으로 방침이 정해졌다"며 "우선 올해 임기가 만료되는 계열사 등기이사직부터 사퇴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회장은 1심 재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올해 이 회장의 등기이사직 임기가 만료되는 계열사는 CJ E&M과 CJ오쇼핑, CJ CGV 등 3개사이다. 해당 계열사의 등기이사직에서 사퇴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 아닌 정기 주주총회 때 재선임하지 않는 방식을 취할 예정이다.

최 회장과 다른 점은 임기가 1년 이상 남은 계열사의 등기이사직 사퇴 여부를 결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재판 결과에 따른 여론을 의식한 결정이지만 향후 상황이 어떻게 변화하느냐에 따라 뒤바뀔 여지가 있는 셈이다. 이 회장은 이번에 사퇴하는 3개 계열사 이외에도 ㈜CJ, CJ제일제당, CJ대한통운, CJ시스템즈, CJ GLS의 등기이사를 겸하고 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경우 이미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는 점에서 최태원, 이재현 회장보다 상황이 편할 수 있다. 김 회장은 지난달 열린 파기환송심 공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받고 철창신세를 면했다.

그러나 김 회장 또한 자신이 맡고 있던 모든 계열사의 등기이사직을 사퇴했다. 김 회장은 한화건설을 비롯해 한화L&C, 한화갤러리아, 한화테크엠, 한화이글스 등 모든 계열사의 대표이사직에 사임서를 제출한 상태다. 수감 기간 동안 만성폐질환과 조울증을 호소했던 김 회장이니만큼 당분간은 건강회복에 전념할 계획이다.

김 회장과 함께 집행유예 선고를 받은 구자원 LIG그룹 총수를 비롯, 현재 재판 중인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과 본격적인 재판을 앞두고 있는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등도 향후 등기이사직을 내려놓을 가능성이 비중있게 제기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후계구도 완성 위해 떠나기도

경영권 승계도 주요 그룹 총수들이 등기이사직 사퇴를 결심하는 주요 이유로 꼽힌다. 주요 계열사의 등기이사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그룹 경영권 승계를 앞둔 후계자들에게 중요한 관문으로 통한다. 지분 확보로 후계구도를 어느 정도 완성한 뒤 주요 계열사의 등기이사직에 올라 경영능력을 뽐내는 것이 대권승계의 일반적인 구도로 여겨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이번에 현대제철의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현대제철은 14일 열리는 정기 주주총회에서 정 회장 대신 강학수 현대제철 부사장을 사내이사로 신규 선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현대제철의 등기이사진은 정의선 현대차그룹 부회장과 박승하 부회장, 우유철 사장, 강학서 부사장으로 재편됐다. 정 회장이 현대제철의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나는 것은 2005년 3월 이사로 취임한 이후 9년 만이다.

정 회장의 현대제철 등기이사직 사임을 놓고 재계에서는 정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전 멍석을 깔아주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룹 내 제철사업의 지휘권을 정의선 부회장에게 넘겨주고 한동안 부자 간 수직분업구조 형태로 경영하리라는 주장이다.

정 부회장은 현대차그룹의 두 축으로 꼽히는 자동차와 제철 중 자동차 부문만을 맡아왔다. 기아자동차를 이끌며 탁월한 경영능력을 보였던 정 부회장이 제철 부문에서도 성과를 낼 경우 후계구도 마련에도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주요 계열사 지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정 부회장으로서는 경영능력의 검증이 우선돼야 하는 상황이다.

한편, 김상헌 동서그룹 회장이 ㈜동서의 등기임원직을 내려놓는 이유에 대해서는 뒷말이 무성하다. 장남인 김종희 전 ㈜동서 상무가 회사 경영에서 손을 뗀 상황이라 김 회장의 결정은 전문경영인 체제로 완전히 변화하려는 의도로 해석되는 분위기다.

㈜동서는 정기 주주총회에서 김 회장의 등기이사 재선임을 포기했다. 김 회장의 빈자리에는 지난해 말 동서식품 사장에서 ㈜동서 회장으로 자리를 옮긴 이창환 회장을 신규선임하며 채웠다.

흥미로운 점은 김 전 상무가 지난해 2월 회사를 떠났다는 점이다. 김 전 상무는 현재 동서그룹의 어떤 계열사에도 몸담고 있지 않다. 그룹을 이어받을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김 회장마저 경영에서 손을 뗄 경우 경영권 승계는 사실상 어려워진다. 김 회장이 동서그룹에 전문경영인 체제를 이식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비중있게 들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