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끌려가면 탈탈 털려 알거지로…서울·영등포역서 노숙인만 유혹 염전에 팔아 '신체 노예'로대포통장 만들어 '돈 노예'로… 달라진 인신매매 수법 화들짝

지난 13일 서울역 광장 앞에서 노숙인들이 여럿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다. 서울시는 경찰청과 함께 '염전노예'를 막기 위해 안내문을 제작하고 범죄피해 예방에 나서기로 했다. 이혜영기자
낯선 이를 따라 나섰다가 외딴 섬으로 팔려가 강제 노역을 한 '염전 노예 사건'의 피해자들은 대부분 서울역, 영등포역 등 노숙인이 몰리는 곳에서 누군가를 만났다. 바로 '찍새'라 불리는 노숙인 사냥꾼. 염전 노예 사건이 불거진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사냥꾼들은 여전히 먹잇감을 찾아 어슬렁거리고 있다. 이들은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이나 돈 몇 만원으로 피해자들을 꾄 뒤 숨은 발톱을 드러낸다. 노숙인과 장애인 등 사회취약계층만 노리는 브로커들의 충격적인 행각을 파헤쳐 보았다.

사냥꾼의 '검은 유혹'

염전 노예 사건 이후 경찰이 강제노역 등 사회적 약자 인권 침해 행위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이 벌어지고 있지만 정작 노숙인들은 시큰둥한 모양새다. 노숙인 사냥꾼으로 불리는 브로커들이 암암리에 접근해 유혹의 손길을 보내는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닌 때문이다. 지난 11일에는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노숙자 100여명을 염전 등에 팔아넘긴 심모(52)씨가 경찰에 구속되기도 했다.

노숙인 사냥꾼에게 피해를 당한 노숙인은 쉽게 만날 수 있다. 어릴 적부터 간질과 강박장애를 앓고 있는 김모(28)씨는 4년 전 영등포 주변의 한 무료급식소에서 한 중년 남성을 만났다. 대구에서 서울로 상경해 변변한 일자리가 없어 떠돌던 김씨는 "성격 좋아 보이는 아저씨가 일자리를 준다는 말에 함께 갔다"고 말했다.

김씨는 인천에 있는 아저씨의 집을 '합숙소'라고 불렀다. 김씨는 "합숙소에는 나 말고도 대여섯 명이 갇혀 있었는데 모두 주민등록증을 빼앗긴 후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다"면서 "창틀에 매달려 물구나무를 서게 하거나 라이터 불로 발바닥을 지졌다"고 말했다. 그 합숙소에는 아저씨 말고도 3명의 남성이 더 있었다.

브로커 일당은 김씨와 피해자들을 협박하고 폭행하는 동시에 달래고 어르기도 했다. 노숙자들이 굶주려 있다는 점을 이용해 흠씬 두들겨 팬 후 식사를 주며 개인정보를 요구했다. 김씨는 "아저씨는 나를 데리고 인천 시내로 나가 은행에 들르거나 주민센터에 데려가곤 했다"면서 "통장을 만들고 나면 내게 용돈으로 5만원씩 주곤 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그렇게 세 달 동안 합숙소를 옮겨 다니며 감금과 감시를 당했다.

2년 후 김씨에게 절망적인 고지서가 날아들었다. 브로커 일당은 김씨 이름으로 2,700만원을 대출받았고 대포차 5대를 구입했으며 대포폰 8대를 개설했다. 김씨는 "아저씨 이름도 모르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면서 "경찰 아저씨가 잘 도와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탈탈 털리는 노숙인들

노숙인 사냥꾼의 주 활동지는 서울역과 영등포역 주변 등이다. 이들은 주로 무료급식소나 광장에 모인 장애인이나 노숙인을 먹잇감으로 선택한다. 사냥꾼들이 처음부터 노숙인에게 발톱을 보이는 건 아니다. 브로커 중 상당수는 노숙인 출신이라 노숙인이나 장애인의 심리를 공략하는 데 능수능란하다. '밥 한 끼 사겠다'거나 '좋은 일자리를 소개해주겠다'며 호의를 베푼다.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이들이 유혹을 뿌리치기는 어렵다.

유혹에 이끌린 노숙인들이 일명 '합숙소'라 불리는 곳에 끌려갔다면 탈탈 털릴 일만 남았다. 브로커들은 피해자들을 특정 장소에 상당 시간 가둬 놓고 흠씬 두들겨 패거나 협박을 하며 겁을 준다. 그런 뒤 신용정보를 조회해 범행 수법을 정한다. 만약 노숙인이 신용 불량자라면 상선이나 염전 업자에게 돈을 받고 신체적 권리를 팔아넘긴다. 돈을 뜯어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하면 명의를 도용해 대출을 받거나 대포차를 만드는 등 경제적 권리를 약탈한다.

기막힌 인신매매 수법

신안 염전 노예 사건은 '브로커-무허가 직업소개소 업자-염전 업주' 3단계를 거친 인신매매다. 일단 브로커가 장애인이나 노숙인을 데려오면 무허가 직업소개소에서 염전 업주를 소개해주는 식이다. 브로커는 인력을 제공하는 대가로 돈을 가져가고, 무허가 직업소개소는 소개 수수료를 챙겼으니 염전 업주는 당연히 노숙인에게 제대로 월급을 지급할 리 없다.

9년 전 실직해 거리로 나온 이모(51)씨는 2년 전 4,000원짜리 국밥 한 그릇에 염전에 팔려갔지만 막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이씨는 "서울역에서 자주 보던 사람이 술 한 잔 하고 싶다고 하더라"면서 "염전에 가면 한 달에 100만원씩 줄 거라더니 8개월간 300만원도 못 받았다"고 말했다. 이씨는 "우리 사이에서도 브로커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다"면서 "브로커 따라가면 무허가 직업소개소에서 염전 업주를 만난다. 계약서에 도장만 찍으면 당장 돈 10만원을 내주는데 눈 뒤집혀서 따라가지 안 가겠느냐"고 반문했다.

'홈리스행동'의 이동현 상임활동가는 "몇 년 전에도 장애인이나 노숙인들의 강제노역 현장이 적발돼 국민적 공분을 샀지만 관심은 그때뿐"이라면서 "결국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게 염전 노예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이 상임활동가는 "강제 노역만큼 심각한 문제는 명의 도용으로 인한 신용피해"라면서 "사회적 약자들이 신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약탈당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결국 염전 노예 사건을 계기로 경찰이 사회적 약자 인권 침해 행위 단속에 나섰지만 브로커로 촉발되는 연결고리를 끊지 않는다면 '제2의 염전 노예'가 또 나올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 상임활동가는 "경찰이 치안유지를 위해 가장 많이 하는 일이 노숙인 불심검문인데 피해 표적을 검문해서 브로커가 잡히겠느냐"면서 "정작 피해를 입은 노숙인이 신고를 해도 해결된 사건은 거의 없다는 게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지현기자 hyun1620@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