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법관 인사교류 때 ‘향판’ 논란…‘지역법관제’로 대체

한 지역에서 오래 머무른 향판들로 인한 ‘황제 노역’ 사건이 온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조세포탈과 횡령 등의 혐의로 기소된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에 대해 최초 검사가 징역 5년에 벌금 1016억원을 구형하였다. 그런데 1심 판사가 벌금을 절반으로 깎아 508억 원으로 줄여주고, 벌금을 안내면 1일 2억5000만원으로 환산해 노역장에 유치하도록 봐줬다. 2심 판사는 벌금 508억을 또 절반 254억으로 줄여주고 노역 일당은 5억 원으로 높여줬다. 이는 15,600원을 훔친 죄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은 노숙자 사건 등과 비교할 때, 너무나도 형평성에 어긋난 판결이 아닐 수 없다.

시골판사를 뜻하는 향판(鄕判)은 1990년대 우리나라 판사들 사이에서 조어된 한자어로, 경판(京判: 서울판사)의 반댓말이다. 그 최초의 출전은 1993년 5월 18일자 한국일보 30면이다. 「사법부 일신 건의 왜 나왔나」라는 제하의 기사 중에 설명과 함께 향판이 보인다. “향판(지방만 도는 판사) 경판(서울에서만 근무하는 판사)식의 편가르기와 집단이기주의 성향은 사법부 개혁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1993년 6월 대법원 전국법관회의에서 그간의 주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법관의 서울, 지방간 인사교류문제를 놓고 격론이 벌어진 것이다. 서울지역 근무를 원하는 지법 법관이 전체법관의 90%에 이르지만 서울지역 법관의 수는 32%에 불과해, 지방에서 초임판사 생활을 하는 법관들은 자신을 향판(시골판사) 등으로 비하하고 있는 실정이 노출됐다.

이러한 불만을 해결코자 대법원은 판사임용 자체를 지역별로 실시하는 개선책을 강구, 2004년 ‘향판’이란 촌스런 명칭을 고급스럽게 ‘지역법관’으로 바꾼 ‘지역법관제’를 공식 도입한다. 당시 대법원은 인사운용의 안정성, 재판업무의 효율성, 법관의 생활안정 등을 내세우며 지역법관제를 시행하였지만, 오늘날 그것은 국민의 법감정과 이치를 무시한 오판으로 드러났다.

法(법)자에 水(물 수)자가 들어 있음은 법이 물과 관련된 말이기 때문이다. 한 곳에 너무 오래 고여 있는 물은 필히 썩기 마련인 법. 법기강 해이로 인해 국력약화를 초래하는 부패한 향판들의 모습을 보니,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법에 따라 처결하였던 추상같은 판관 포청천의 대단함을 알겠다. 대종언어연구소장 www.hanj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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