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산 살인' 엇나간 부정이 빚은 참사영화 뺨치는 사적 보복도 범죄… 법으로 금지된 '자력 구제' 빈번사법부에 대한 깊은 불신이 문제

"네가 어디에 있든 난 널 찾아서 꼭 죽일 거야." 할리우드 배우 리암니슨이 영화 '테이큰'에서 딸을 납치한 범인에게 남긴 말이다. "사형이요, 전부 다." 영화 '돈 크라이 마미'에서 영화배우 유선은 법정에서 딸을 성폭행한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울부짖는다. 예상과 달리 가벼운 처벌을 받자 직접 그들을 살해한다.

그런데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 "성폭행을 당했다"는 딸의 말을 듣고 격분한 아버지가 딸이 지목한 남성을 살해한 것이다. 사법부를 믿지 못하고 직접 '보복 살인'을 한 비극을 두고 논란이 거세다.

사건의 재구성

지난 24일 오후, 전북 군산에 사는 박모(47)씨는 저녁을 먹던 중 아내(43)에게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전해 들었다. 이틀간 외박을 하고 돌아왔던 딸(14)이 아내의 추궁에'성폭행을 당했다'고 털어놓은 것이다. 분을 참지 못한 박씨는 딸의 스마트폰을 뒤져 문제의 남성이 중학교를 중퇴하고 음식점에서 배달을 하던 최모(17)군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자신의 호주머니에 식칼을 넣고 아내, 아들(19)과 함께 최군을 찾아 집을 나섰다.

그날 밤 10시께 박씨 부부와 아들은 최군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군산 미룡동의 한 치킨가게 앞에 도착했다. 흥분을 참지 못한 아내는 가게 문을 열자마자 최군의 뺨을 때렸다. 최군도 욕설을 하며 아내에게 대들었다. 차 안에서 지켜보던 박씨가 나서면서 최군과의 몸싸움으로 번졌다. 격분한 박씨는 집에서 가져온 흉기를 꺼내 최군의 등을 찔렀다. 최군은 사건 발생 40여분 만에 과다출혈로 숨진 채 발견됐다. 박씨는 1시간 만에 자수했고, 군산경찰서는 그를 살인혐의로 구속했다.

엇갈리는 주장

아버지의 엇나간 부정이 초래한 비극으로 안타까움을 산 사건은 최군 유족들이 성폭행 여부를 강하게 반발하면서 진실공방으로 번지고 있다. 발단은 최군과 박양이 주고받은 스마트폰 문자메시지. 박씨는 경찰조사에서"딸과 최군이 나눈 대화에서 성관계를 연상시키는 내용을 봤다"고 밝혔다. 하지만 최군 측은 "두 사람은 사귀는 사이였고 강압적으로 성관계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면서 "최군의 SNS에 이 같은 내용을 입증할 진실이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최군 유족은 억울한 심경을 토로하고 나섰다. 최군 유족은 "아버지가 딸의 얘기만 듣고 사람을 찔러 죽이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이냐"면서 "충분히 정확한 정황을 확인하고 부모를 찾아와 따져 묻거나 경찰에 고발할 수도 있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최군의 친구라고 밝힌 A씨는 "미성년자끼리 성관계를 가졌다는 게 자랑할만한 일은 아니지만 죽을 만큼 잘못한 일이냐"고 따져 물으며 "어떤 경우에도 살인을 정당하다고 생각할 순 없다"고 분개했다.

경찰은 조심스러운 모습이다. 당초 경찰은 "박양의 스마트폰에서는 강압적인 성관계를 입증할 내용은 없었다"고 밝혔다. 경찰이 추가 확보한 최군 스마트폰 문자메시지 내용과 박양의 진술 등에 따라 진실이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경찰 관계자는 "수사의 초점은 성폭행 여부가 아니라 보복 살인"이라면서 "성폭행 진위여부를 파악하고 있지만 사건이 확산돼 2차 피해가 있을 수 있어 조심스럽게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줄 잇는'사적 보복'

사법부를 믿지 못하고 직접 응징에 나선 아버지의 행동을 두고 찬반 논란이 뜨겁다. 특히 사건의 단초를 제공한 '성폭행 여부'를 놓고 진실공방이 벌어지면서 정당성 논란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사적 보복'이 법 앞에서 용서 받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가해자를 직접 응징하는 '자력구제'는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개인간 의견 대립 발생시 상대방의 처벌을 요구하는 일이 생기면 고소ㆍ고발을 통해 형사상 책임을 지게 하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사법체계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개인적으로 보복을 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9월 경기도 부천의 한 오피스텔에서 B씨가 친누나(28)를 성폭행하려 한 회사원 최모(34)씨를 붙잡아 흠씬 두들겨 패 부상을 입혔다. 최씨가 이미 범행현장을 떠난 뒤 벌어진 일이라 정당방위냐, 폭행이냐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올해 초에는 김모(58ㆍ여)씨가 딸을 괴롭히던 남자친구를 4년 전 살해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김씨는 "딸이 남자친구에게 오랜 시간 데이트폭력을 당해 훈계하기 위해 만났다가 다툼이 벌어졌다"면서 "처음부터 살해할 용의는 없었지만 의도와 다르게 사건이 극단적으로 흘러갔다"고 참회했다.

사법부 불신이 '불씨'

전문가들은 문제의 핵심은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라고 입을 모은다. 강력 범죄에 대한 관대한 처벌이 이어지면서 수사기관의 수사력과 사법기관의 충분한 처벌을 믿지 못해 보복 범죄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최근 성폭력 사건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이나 반감이 높아지면서 가해자에 대한 법적 처벌이 미흡한 게 아니냐는 사회적 인식이 있다"면서 "법에 호소를 하기보단 자기들이 직접 처벌하는 것을 우선시하는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지만 사적 보복도 엄연한 범죄"라고 지적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심부름센터나 흥신소가 성행하는 건 사적 보복을 의뢰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인데 보복 범죄가 늘어나는 건 안타까운 일"라면서 "우리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여주는 만큼 대책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김지현기자 hyun1620@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