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 '기시감' 느껴지는 이유는?

여객선 '세월호'가 전라남도 진도 해역에서 침몰, 300여 명에 달하는 실종ㆍ사망자가 발생했다. 수학여행을 가던 어린 학생들이 무수히 희생당한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국민들의 마음도 함께 침몰, 상심 가득한 한 주간을 보냈다.

주목되는 점은 발발한 지 이제 갓 일주일이 넘은 사건임에도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물론 국민 대부분이 TV와 인터넷을 통해 수시로 세월호 침몰 사고를 주시하고 있긴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렇다면 마치 기시감처럼 여겨지는 이 느낌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정답은 먼 곳에 있지 않다. 너무나도 익숙한 이 느낌은 우리가 그동안 이런 일을 여러 차례 겪어 왔기 때문이다. 원칙대로만 했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는 점, 매뉴얼은 어디에 뒀는지 연신 헛발질만 하고 있는 대책본부, 무책임한 담당자에 대한 가벼운 처벌까지….

세월호 침몰 사고는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발생했던 대형 참사들과 많은 부분에서 너무나도 비슷하다. 벌써 여러 차례 있어 왔고 그때마다 후회하고 대책을 강구했지만 또다시 일어난 대형 참사다. 세월호 침몰 사고가 국민들로부터 공분을 사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선박, 비행기 사고 사망확률 높아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 주목되는 점은 탑승객 대비 실종ㆍ사망자가 많다는 점이다. 부실한 범정부사고대책본부의 잦은 번복 때문에 세월호의 정확한 탑승객 수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24일 현재까지 파악된 결과만을 놓고 보면 세월호의 탑승객 476명 중 302명이 실종ㆍ사망자 명단에 포함돼 있다. 이것만 놓고 봐도 1995년 일어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502명 사망 6명 실종) 이후 최대치다.

세월호 침몰 사고의 실종ㆍ사망자가 많은 것은 선박 사고의 특성 때문으로 해석된다. 일단 배가 물속으로 잠기면 선내에 남아 있는 실종자의 생존 확률은 급격히 떨어진다. 아무리 에어포켓 형성 가능성을 감안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처럼 10일 넘게 생존해 있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이는 그동안 있었던 선박 관련 대형 참사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1953년 전라남도 여수항을 출발해 부산항으로 향하던 정기여객선 창경호는 부산 서남쪽에 위치한 다대포 앞바다에서 강풍을 만나 침몰했다. 당시 탑승객 236명 중 선장과 선원 3명, 승객 3명을 제외한 229명 모두가 사망했다.

1963년 전라남도 목포시 허사도 앞 해역에서 침몰한 여객선 연호도 마찬가지다. 연호 침몰 사고 당시 생존자는 단 1명에 불과했고 나머지 140명 전원이 사망했다. 1970년 일본 대마도 서쪽 해상에서 침몰한 남영호의 경우 탑승객 338명 중 323명이, 1993년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에서 가라앉은 서해훼리호의 경우 362명 중 292명이 사망했다.

선박 사고와 비교해 발생확률은 미미하지만 사망률은 더욱 높은 참사가 있다. 바로 비행기 사고다. 1983년 미국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을 출발해 김포국제공항으로 오던 대한항공 소속 보잉 747기는 소련 상공을 비행 중 소련 공군 소속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269명에 달하는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1987년에는 이라크 바그다드공항에서 출발한 대한항공의 보잉 707기가 인도양 상공에서 북한이 파견한 공작원에 의해 공중 폭파, 115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폭발 및 화재사고도 사망자가 많았던 대형 참사로 꼽힌다. 1971년 발생한 대연각호텔 화재 사고는 1층의 LPG가 폭발, 이어진 화재로 163명이 사망한 참사다. 대연각호텔 화재 사고는 세계 최대의 호텔 화재로 기록돼 있다. 1995년의 대구지하철 도시가스 폭발 사고에서는 101명이 사망했고 2003년 일어난 대구지하철 방화 사고에서는 19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원칙대로만 했어도 참사는 없어

세월호 침몰 사고가 가장 안타까운 점은 기본적인 안전수칙만 제대로 지켰더라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인재(人災)였다는 점이다. 운항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해양수산부의 권고항로를 이탈하지만 않았더라도, 구명뗏목(라이프래프트)만 제대로 작동했더라도, 승무원들이 안내방송을 통해 '움직이지 말라'고만 하지 않았더라도 지금처럼 어린 목숨들이 무수히 희생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애석하다.

돌이켜보면 역대 대형 참사 대부분은 인재였다. 1995년 붕괴된 삼풍백화점은 설계단계부터 사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설계도 상 32인치였어야 하는 건물 기둥은 실제로 23인치에 불과했고 4층 건물로 설계됐음에도 무리하게 5층 증축을 강행했다. 1993년에는 15톤에 달하는 대형 옥상환풍기들을 바닥에 끌면서 이동시켜 건물을 위태롭게 했다. 사고 전날 너비 1m 깊이 20㎝의 함몰 지점을 발견했음에도 보수공사로 넘겼던 점, 사고 발발 몇 분 전에야 비상벨이 발동한 점 등 안전불감증도 대규모 인명피해를 자초했다.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도 전형적인 인재로 꼽힌다. 건설허가를 따내기 위한 뇌물 비용 때문에 공사 자재를 아낀 것이 결국 사고로 이어진 것이다. 실제로 철근 70개를 넣어야 유지되는 건물 기둥에 5개의 철근을 넣는 등 부실공사가 심각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 때도 부실공사 및 소홀한 유지관리가 참사를 불러일으켰다. 유동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불안한 트러스식 공법을 채택한 점이나 연결부위 용접 불량을 제대로 점검하지 못한 점 등이 성수대교 붕괴 사고로 이어졌다.

세월호 침몰 사고와 마찬가지로 과거 벌어진 선박 사고 때도 인재로 보이는 요소가 많았다. 창경호는 구명보트 한 척 및 구명조끼 70벌을 모두 본사 창고에 두고 다녔던 것이 국회 특별조사단의 조사로 드러났고 연호나 서해훼리호의 경우 사고 당일 승객 정원 및 화물 적재량을 초과한 것이 사고 원인으로 지목됐다.

매뉴얼 있음에도 활용 못해

세월호 침몰 사고가 국민들의 공분을 사는 이유 중 하나는 정부의 부실한 재난관리체계 때문이다. 시스템 작동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상황보고, 현장관리, 인명구조, 대국민 공보 등 모든 과정에서 허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특히 사고 발발 이후 사실상 식물인간 상태로 변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에 대한 비판이 거세다.

본래 중대본은 현 정부 재난관리체계의 정점에 있는 법정기구다. 안전행정부(이하 안행부) 소속의 중대본은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이 2004년 개정된 이후 재난관리의 컨트롤 타워를 맡아 왔다. 중대본이 설치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안행부가 재난관리를 담당해온 지는 20년이 훌쩍 넘었다. 그 사이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성수대교 붕괴 사고, 대구지하철 도시가스 폭발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씨랜드 화재 사고, 대구지하철 방화 사고, 마우나리조트 붕괴 사고 등 수많은 대형참사를 겪어온 것이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행정안전부에서 '안전'에 방점을 찍은 안전행정부로 개명했지만 안행부 주도의 재난관리시스템은 44년 전 남영호 침몰 사고 당시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실제로 안행부는 주요 참사마다 발간한 '백서' 형태의 사고 대응 매뉴얼이 있음에도 과거 사고 때와 동일한 실수를 반복, 사고를 키웠다는 평이다.

살인죄 적용 가능할까

세월호 침몰 사고 과정을 통틀어 가장 주목받은 인물은 세월호의 선장을 맡은 이준석씨다. 사고가 나면 승무원들을 지휘해 탑승객들을 구조하는 선장의 책임을 방기하고 가장 먼저 탈출했기 때문이다.

해경 측은 이씨에게 형법상 업무상 과실치사상, 선원법, 선박매몰죄 위반 혐의 적용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형법 268조(업무상 과실ㆍ중과실 치사상)는 "업무상 과실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인하여 사람을 사상에 이르게 한 자는 5년 이하의 금고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선원법 11조(선박 위험시의 조치)에는 "선장은 선박에 급박한 위험이 있을 때에는 인명, 선박 및 화물을 구조하는데 필요한 조치를 다하여야 한다"며 "이를 어겼을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형법이나 선원법을 감안할 때 이씨 또한 5년 이하의 금고나 징역에 처해질 가능성이 크지만 검찰의 처벌 의지가 강력해 귀추가 주목된다. 대형 참사가 터질 때마다 불거지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에 대한 법리검토까지 하고 있는 이상 최대 사형이나 무기징역까지 선고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실제로 검찰은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당시에도 사고 책임자들에 대해 주위적으로 살인죄, 예비적으로 과실치사상죄를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한 바 있다. 검찰의 법리검토 끝에 피의자들은 살인죄가 아닌 업무상 과실치사상죄로 기소됐다. 결국 징역 7년 6월을 선고받은 이준 전 삼풍 회장은 형기를 다 채우고 2003년 출소했으나 각종 지병으로 치료를 받다가 출소 6개월 만에 사망했다.

대형 참사의 책임자 중 검찰로부터 살인죄로 기소, 사형을 구형받은 사례도 있다. 1970년 남영호 침몰 사고의 선장인 강태수씨가 그 주인공이다. 당시 검찰은 주위적으로 살인죄, 예비적으로 업무상 과실치사상죄로 기소했지만 법원은 후자만을 인정, 징역 3년형을 선고했다.

세월호 선장인 이씨와 비슷한 사례로 2003년 대구지하철 방화 사고 당시 기관사였던 최성열씨를 꼽을 수 있다. 기관실에 꽂혀 있는 마스터키마저 빼서 달아나 142명의 승객을 불길과 유독가스가 가득한 지하철 내에 사실상 감금한 최씨는 업무상 중과실치사상죄로 구속, 금고 5년형을 받았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