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과자 김일곤, 보복 범죄에 여성 희생양 삼아

'트렁크 시신' 사건 피의자 김일곤이 지난달 19일 오후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성동경찰서를 떠나고 있다.
사건 발단은 올 5월 오토바이 접촉사고… 복수극 계획
피해여성은 보복 살인 유인용… 범행 흔적 지우려 방화
동물병원서 안락사약 소동 피우다 범행 8일 만에 검거

서울의 한 빌라에 주차된 차량 트렁크에서 숨진 채 발견된 '트렁크 시신' 살인사건의 피의자 김일곤(48)이 지난달 25일 검찰에 송치됐다. 그는 범행 3개월여 전부터 복수 살인극에 쓸 목적으로 젊은 여성을 납치할 계획을 세운 것으로 드러났다.

김씨는 올 5월에 발생한 접촉사고에 앙심을 품고 보복 범행 계획을 세웠고 자신에게 피해를 줬다고 생각하는 사람 28명의 '살생부'를 만들기도 했다.

강도와 특수절도 등 전과 22범으로 '교화되지 못한 괴물'이 된 김일곤에 대해 추적해봤다.

'마트 납치극' 후 잔혹하게 살인

서울의 한 빌라에 주차된 차량 트렁크에 숨진 채 발견된 주모(35) 씨의 살해 용의자 김일곤은 충남 아산의 한 마트에서 주씨를 5분 만에 납치한 것으로 밝혀졌다. 김씨는 "운전석에 타려는 주씨의 목을 눌러 제압하고 주씨를 조수석으로 밀쳐낸 뒤 차를 몰고 나왔다"고 말했다.

경찰은 김씨가 차량에 짐을 싣는 주씨에게 접근해 뒤에 몰래 서 있다가 김씨가 운전석에 타려는 찰나 주씨를 차량 운전석으로 밀어 넣고 납치한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김씨는 천안(충남)을 지나다 주씨가 용변을 보고 싶다고 말하자 천안시 서북구 두정동의 한 골목에 주씨를 잠시 내려줬다. 주씨가 이 틈을 타 도망가자 김씨는 다시 끌고 와 목을 졸라 살해했다.

김씨는 범행 후 주씨의 시신을 트렁크에 실은 채 8일 동안 전국 곳곳을 돌아다닌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과 속초, 부산, 울산 등지를 돌아다니며 김씨는 주씨의 시신이 실린 차 안에서 잤다고 진술했다.

그는 "차량과 휴대전화만 훔칠 생각이었지 처음부터 살해할 의도는 없었다"며 "여성이 계속 도망가고 차 문을 두들기며 '살려달라'는 소리를 질러 목 졸라 죽였다"고 범행을 시인했다.

지난달 10일 삼척시 소재 공원 주차장에서 시신을 훼손한 김일곤은 11일 서울로 올라와 그날 오후 성동구의 한 빌라 주차장에서 주씨의 시신이 있는 차량에 불을 질렀다.

피해여성은 유인용, 다른 사람 죽이려 했다

경찰 조사 결과 김씨는 주씨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살해하려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드러났다. 주씨는 원래 죽이고 싶던 20대 남성 A씨를 유인하는 데 이용하려 납치했는데 주씨가 반항해 홧김에 살해한 것으로 조사됐다.

주씨를 납치한 것은 올해 5월 자신과 폭행 시비가 붙었던 노래방 종사자 A씨에게 복수하기 위한 유인용이었다. 김씨와 A씨는 올해 5월 초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서 접촉사고로 시비가 붙었고 김씨는 이 사건으로 6월에 벌금 50만 원 처분을 받았다.

이에 격분한 김씨는 8월 초까지 A씨의 집과 그가 일하는 노래방 주변으로 7차례 찾아가 벌금을 대신 내라고 요구하는 등 시비를 벌인 것으로 확인됐다. 8월 초에는 A씨의 노래방 앞에 칼을 들고 찾아가기도 했다. 20대 중반인 A씨는 김씨에게 욕설 등으로 맞섰고 거꾸로 김씨의 집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8월 초에는 "이제부터 너나 나나 전쟁 시작이다"라는 말을 했고, 이에 격분한 김씨는 A씨를 살해하기로 마음먹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노래방에서 일하는 A씨를 유인하기 위해 노래방에 취직하려는 도우미 여성이 연락해 나오면 살해할 생각으로 주씨를 납치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주씨를 납치하기 전 일산에서 한차례 여성을 납치하려 시도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주씨 시신을 잔혹하게 훼손한 것은 주씨가 자신에게 모욕적인 언행을 했으며 A씨를 죽이려는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로 인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김씨는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한 동물병원에 흉기를 들고 들어가 "개를 안락사시키는 약을 달라"고 요구하고 달아나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체포됐다. 김씨는 동물병원에서 안락사 약을 훔치려고 한 것에 대해 "A씨에 대한 복수를 끝내고 자살하려고 그랬다"고 진술했다.

김일곤 "내가 피해자"…살생부 명단 공개

김일곤은 검거 당시 자신에게 피해를 주었다고 생각하는 판사와 형사, 간호사, 식당주인 등 28명의 이름을 적은 '살생부'를 소지하고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일부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의사, 간호사 등 직업만 적혀 있었다.

경찰 조사에서 김씨는 "교통사고가 났을 때 나를 치료한 의사와 돈을 갚지 않은 식당 여사장, 과거 나를 조사한 형사 등을 적어 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간호사를 적은 이유는 "불친절했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김씨는 혼잣말로 "이것들을 다 죽여야 하는데"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경찰은 "메모지 명단에 오른 인물 중 실제로 김씨가 범행 대상으로 삼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며 "아직은 허무맹랑한 계획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경찰에 "예전에 식자재 배달일을 했을 때 마트 주인 중 여주인들이 미수금이 많았고, 돈을 주지 않고 달아난 여주인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 점에서 김씨가 평소 여성에 대한 증오심이나 혐오감을 키워온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수사에 투입된 프로파일러는 김씨의 심리상태가 "충동적인 성향에다 타인과의 공감능력이 부족하며, 숨진 주씨에 대한 미안함보다는 '주씨가 사망해 복수극이 실패로 돌아가게 됐다'며 오히려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는 소견을 냈다.

경찰 관계자는 "김씨의 추가 범행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아직 찾지 못한 시신 훼손 부위를 유기한 장소를 확인하고 김씨의 여죄를 계속 수사하겠다"고 말했다.

경찰은 지난달 25일 김씨에 대해 강도살인ㆍ사체손괴ㆍ일반자동차방화ㆍ특수강도 미수 등과 더불어 살인예비 혐의를 추가해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김민정 인턴기자 mjk@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