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

세상을 바꾸는 '덕후'의 힘

음지에서 양지로 나온 '전문가'… 트렌드 주도, 새로운 문화 생산
  • 일본 만화 캐릭터와 사랑에 빠진 '십덕후' 이진규 씨 모습. 사진=tvN '화성인바이러스' 방송캡처
'음침한 사람'에서 전문성 바탕으로 '트렌드 리더' 된 덕후들
단순한 마니아 넘어서 전문가로…콘텐츠 생산하기도
방송에서 '덕후' 주목, '이 시대의 신지식인'
셧다운제, 게임중독방지법 등 규제…문화콘텐츠 발전에 장벽


집에 틀어박혀 게임이나 TV 등 오로지 한 가지 관심사에만 몰두하느라 시력이 나빠져 안경을 쓰고 뚱뚱해진 몸은 과거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인식하던 '오타쿠'의 모습이다.

하지만 점차 '덕후'는 관심 분야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정보를 공유하고 2차 콘텐츠를 제작하며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었다. 이제 덕후는 '특정 분야에 몰입하는 전문가'와 '학위 없는 전문가'로 인식되며 트렌드를 주도하는 주역이 됐다.

덕후 문화 긍정적 인식

2010년 초 tvN '화성인 바이러스'를 통해 소개된 '덕후' 이진규씨는 대중이 인식하던 '오타쿠'의 모습이었다.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 덕후 이진규씨가 나와 캐릭터 베개와 6년째 열애 중이라며 일상을 공개해 화제가 됐었다. 출연 이후 오타쿠의 2배 정도 된다는 뜻의 '십덕후'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 개그맨 정진욱이 게임마니아 의뢰인으로 출연한 모습. 사진= XTM '수컷의 방을 사수하다' 방송캡처
대중문화에서 덕후는 보통 우스꽝스럽거나 평범하지 않은 사람으로 그려졌다.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은 덕후를 떠올리며 수집벽이 있는 음침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하게 됐다. 방송이나 영화에서 조명하는 덕후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을 때 덕후는 '일반인 코스튬플레이(일코)'를 했다. 만화, 영화, 게임, 캐릭터, 연예인 등에 빠진 덕후이지만 사회적 시선 때문에 덕후가 아닌 척하는 것을 뜻한다. 덕후 성향은 일상생활에서 드러내지 말아야 할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덕후는 1980년대 일본에서 생긴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오덕후' '오덕' '십덕후' 등으로 단어가 변형됐다. 좋아하는 대상을 파고든다는 '덕질'이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덕후와 연관된 말에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 가지에만 몰두한다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경멸과 우려의 시선을 피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던 덕후들이 최근 주목받고 있다. 대중문화의 여러 영역에서 '학위 없는 전문가'인 덕후들을 찾아내려 하고 있다. 드라마, 예능, 만화, 1인 방송 등을 통해 덕후는 다양하고 긍정적으로 조명되고 있다.

최근 덕후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변화하고 있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응팔)의 안재홍(김정봉 역)은 '원조 덕후'라고 소개된다. 드라마 속에서 김정봉은 음반과 우표 등을 수집하고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들고 다니며 특이한 이름을 가진 사람을 찾는 등 자신이 관심을 갖는 분야에 대해 무서울 정도로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대중들은 독특한 정봉의 행동에 '귀엽다'며 호감을 표시했다. 또한 데뷔 18년 차 배우 심형탁은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 '도라에몽'에 빠져 있다는 것이 알려지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대중이 생각한 덕후의 모습이 아닌 잘생긴 배우가 덕후라고 공개되자 '숨은 매력'으로 보는 이들이 늘어났다.

과거 하위문화라고 인식되던 만화, 게임 등의 장르가 더 이상 비주류 문화로 단정 짓기 어려워졌고 미디어의 생산과 유통 방식이 다양해지며 개인이 자신의 취향을 찾고 드러내기 쉬워졌다. 이 같은 변화가 덕후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대중은 점차 덕후가 '음침하고 위험한 사람'이 아닌 '특정 분야에 몰입하는 전문가'라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경제 불황에도 불구하고 소비 충성도가 높은 덕후를 타깃으로 한 시장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업계에서도 영향력 있는 소비자인 덕후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노력하고 있다.

  • '능력자들'에 출연한 '치킨 덕후'. 사진=MBC '능력자들' 방송캡처
20대 덕후, 콘텐츠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과거 덕후는 집안에서 한 가지 우물만 깊게 파고 몰두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요즘의 덕후는 좋아하는 것을 드러내고 관심 분야가 같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문화가 활발해졌다. 덕후는 특정 취미 분야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 단순한 마니아를 넘어선 그 분야의 전문가로 인식되며 교류가 활발해졌다.

덕후 문화가 긍정적으로 인식되며 덕후와 관련된 여러 신조어가 생겨났다. 입덕은 '들입' 자를 써 덕후의 길로 입문한다는 뜻이며 반대로 덕후 생활을 끝낸다는 '탈덕'도 있다. 또한 입덕이 교통사고처럼 예상치 못하게 시작하게 됐다는 뜻의 '덕통사고' 등의 신조어들이 생겨났다.

사회적으로 부정적 시선을 받던 덕후는 최근 20대를 중심으로 '성공한 덕후', '떳떳한 덕후'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직업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하며 엄청난 정성과 열정으로 덕질을 하는 부지런함을 보인다. 또한 혼자 숨어서 활동하지 않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같은 분야의 관심사를 가진 덕후들과 모여 소통하며 덕질을 한다.

20대 덕후는 단순히 자신의 관심사를 소비하는 것뿐만 아니라 스스로 콘텐츠 생산자가 된다. 과거 아이돌은 10대들이 열광하던 팬덤 문화였지만, 사회생활을 하는 20대와 30대도 아이돌 문화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인다.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를 망원렌즈를 장착한 전문가용 카메라로 '대포직찍'을 찍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가장 멋지고 예쁜 모습을 찍기 위해 전문가용 카메라를 구입해 사진을 찍는 경우가 많다. 이들이 찍는 사진은 전문 사진작가가 찍는 것만큼 뛰어나 팬 사인회에서 따로 팬 프레스 석을 만들기도 하고 이들이 만든 포토북을 판매해 큰 수입을 얻기도 한다. 또한 자신이 덕질하는 만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를 활용해 그림, 피규어 등을 제작하기도 하고 만화나 드라마의 장면을 덕후들만의 버전으로 각색하는 등 2차 콘텐츠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 '도라에몽' 덕후로 알려진 심형탁. 사진=MBC '나혼자산다' 방송캡처
방송에서 활약하는 덕후, 음지에서 양지로

지난 11월에 시작된 MBC의 예능프로그램 '능력자들'은 덕후들이 '덕력'을 발휘하는 모습을 담았다. 덕후들은 스튜디오에서 자신이 덕질을 하는 분야에 관한 지식을 풀어놓았고 매회 화제가 됐다. 지난달 10일 기자간담회에서 이지선 PD는 "덕후가 학위 없는 전문가라는 기사도 있더라, 그런 사회 현상을 읽었다"며 "덕후들이 자신이 (특정 대상을) 애정 하는 만큼 보여줄 수 있는 장을 만드는 게 목표였다"고 말했다.

능력자들은 덕후를 축적된 지식이 있는 색다른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바라본다. 무한도전, 모차르트, 치킨, 막걸리, 추리, 오드리 헵번 등 다양한 분야의 덕후들을 불러 모았다. 방송에서 '역사드라마 덕후'는 조선의 11대 임금 중종의 12명 부인을 품계 순으로 막힘 없이 말했고 '버스 덕후'는 엔진 소리만 듣고 차종을 알아채는 능력을 보이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치킨 덕후'로 출연한 서보근씨는 한 치킨 업체의 메뉴 개발 전문가와 치킨을 감별하는 대결을 벌였고 전문가를 상대로 승리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지선 PD는 "'무한도전'에 출연한 아이유 덕후를 보면서 '한 가지만 보고도 성공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됐다"며 "덕후는 이 시대의 새로운 인재이자 신지식인이다"고 설명했다.

덕후의 다양한 영역이 방송 아이템으로 등장하며 대중적으로 통하는 코드가 되기도 했다.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는 걸그룹 AOA의 멤버 초아가 등장해 '미연시'(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PC 게임 콘셉트로 방송을 진행했다. 또한 XTM '수컷의 방을 사수하다'는 게임ㆍ장난감ㆍ만화 등의 분야에 취미가 있는 남편들이 자신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도록 집 개조를 돕기도 했다. '겟 잇 기어'는 스쿠터나 건담 프라모델 등 각 분야의 덕후가 출연해 전문적인 지식과 수집해온 물품을 공개하며 관심 분야에 입문하기 위한 장비나 방법을 소개한다.

방송에서 자신의 관심사를 밝히는 연예인도 늘어났다. 래퍼 데프콘은 일본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 시리즈에 대한 애정을 보였고 가수 이승환은 피규어 수집가로 유명하다. 또한 배우 심형탁은 극장판 '도라에몽' 한국어 녹음에 참여하는 등 자신이 덕질하는 분야에 대해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대중도 그 모습에 친근함을 느꼈다.

  • /연합뉴스
문화콘텐츠 사업 규제 심해

우리나라의 덕후 문화는 최근 부가가치가 높아 잠재력 있는 시장으로 주목받고 있다.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덕후 문화는 게임 IT기기, 피규어,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돼 덕후를 겨냥한 한정판이 쏟아져 나오고 덕후는 열광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시장 규모가 10조 원 이상 된다고 전망하고 있다.

하지만 게임을 마약과 같은 중독 물로 규정하려는 법안과 게임회사의 매출 일부를 게임 중독 치료비용으로 강제 징수하자는 법안 등 관련 규제들이 가로막고 있다. 한국콘텐츠 진흥원의 '2015 게임백서'에 따르면 지난 2010년 국내 게임업체 수는 2만658개였다. 하지만 지난해 1만4440개로 50% 가까이 감소했다. 또한 게임 업계 종사자 수도 2012년 5만2466명에서 지난해 3만9221명으로 줄었다

이에 대해 '셧다운제', '게임중독방지법', '게임산업진흥법 개정안' 등 몇 년 사이 게임을 규제하는 법안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이어졌다. 게임을 문화 콘텐츠가 아닌 범죄의 일종으로 분류하고 있어 산업 자체를 위축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게임을 바라보는 시각이 부정적이기 때문에 개발자와 마케터, 기획자 등 관련 종사자들에 대한 사회의 시선도 차가워져 국내 게임 산업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도 이어졌다.

한 게임정책관계자는 "오타쿠가 초기 문화콘텐츠 산업의 성장동력이 됐다"며 "특히 게임 산업의 성장에 오타쿠의 영향이 컸다" 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셧다운제나 게임 중독방지법 등 게임 규제 법안으로 인한 산업적인 영향보다는 게임종사자들에게 미치는 심리적 영향이 더 크다"며 "게임 규제 법안은 게임이 청소년들의 행위 중독을 유발하기 때문에 정부가 막아야 하는 것으로 치부한다는 인식을 유도해 관련 종사자들을 위축시킬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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