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 낙인’ 굴레를 벗어나려… 억울함 뒤로 한 채 공소사실 인정

미국에서 벌인 범죄행위를 한국에서 재판… 형사소송법 위반 소지

억울하지만 마음의 짐 덜기 원했던 피고인, ‘벌금 300만원 형’

재판부, ETS가 칼리지보드의 저작권을 관리한다고 착각


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SAT) 문제유출 사건의 재판이 열리며,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범죄사실을 인정해 재판을 끝내려 하는 피고인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주간한국>은 ‘SAT 문제유출 사건 재판, 초유의 사태 되나’ 등 5차례의 보도를 통해 SAT 문제유출 사건의 수사 및 재판에서 이뤄진 다양한 문제점과 부조리를 지적했다. 이중 가장 큰 문제점은 피고인들이 장기간 범죄 혐의자 신분으로 낙인 찍혀 제대로 된 학업·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다는 것 그리고 그 억울함을 제대로 해결하지도 못한 채 재판을 끝내서라도 마음의 짐을 덜 수밖에 없었던 점이다. <주간한국>은 이 사건의 수사와 재판을 지켜봐 왔던 한국NGO연합 사법감시배심원단(이하 사법감시배심원단)과 해당 재판의 현장에서 피고인들의 울분을 들어볼 수 있었다.

지난 12월 19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18단독 SAT 문제유출 및 저작권법 위반 사건 재판의 있었다. 재판은 오전 11시 30분과 오후 2시에 2회로 나눠 열렸다.

오전 재판은 피고인 이 모씨가 참석했다.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던 이씨는 재판부에 자신의 공소사실을 전부 인정했고, 때문에 재판은 약 15분 동안 짧게 진행됐다.

물론 재판 전 그가 털어놓은 심경과 자신의 죄를 시인한 배경에는 부당함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이씨는 <주간한국>이 그동안 다뤄온 SAT 문제유출 사건과 재판에 대한 보도를 뒤늦게 접한 뒤, 자신이 과거에 경험했고 현재도 겪고 있는 일이 보도내용에 드러난 대로 상당한 문제가 있었음에도 담당 변호사가 전혀 이야기해 준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변호인도 사실상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상황에서 그에게 더 이상의 재판은 무의미했다.

SAT 문제유출 사건이 일어나던 시기, 이씨는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이에 그는 SAT 기출문제를 입수해 한국에 유통했음에도 자신의 행위가 모국에서 범죄에 해당한다는 사실조차 인지할 수 없었다.

특히 SAT 문제의 저작권자인 칼리지보드(College Board)의 당국인 미국에서는 해당 시험의 기출문제를 공유한다고 해서 법적문제로 번지는 경우는 전혀 없었고, 기출문제를 게재한 인터넷 사이트도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씨는 대학생이 된 뒤에도 한국에서 자신이 SAT 기출문제 유통 및 판매로 인한 범죄 혐의자로 조사대상에 올라있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이씨는 “어느날 한국에 모처럼 입국을 했는데 고등학교 시절 SAT 시험지를 판매했다는 이유로 (자신이) 기소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고, 검찰로부터 20시간에 걸친 압수수색과 12시간의 조사를 받아야 했다”라며 “당시 미국에서 교수님과의 일로 인해 미국으로 되돌아가야만 했는데, 검찰에서 출국금지 조치를 내리는 바람에 난감한 상황이었다”고 밝혔다.

이씨는 자신의 잘못을 무조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억울한 사연을 둘째로 치더라도 당시 그에 대한 검찰 측의 수사는 형사소송법을 위반했을 소지가 컸다.

현행 형사소송법 상 형사재판의 관할권은 원칙적으로 피고인의 주소지 및 거소지, 현재지 그리고 해당 사건이 일어난 발생지를 관할하는 법원이 맡게 돼있다. 이씨가 한국 검찰에서 규정한 불법행위를 저질렀던 시점에 그는 미성년자 신분으로 미국에 주소 및 거소지를 두고 있었다. 사건발생지 역시 미국이었다.

때문에 SAT 문제의 저작권자인 미국 칼리지보드가 자신들이 저작권을 침해받았다고 주장한다면, 이씨는 재판관할권 상 미국 법원에서 재판을 받으면 된다. 특히 칼리지보드가 SAT 문제를 유출한 이들을 처벌해 달라며 고소한 적이 없기 때문에 한국 법원이 이를 재판할 권리를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씨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며 컴퓨터범죄에 대한 논문을 썼고, 해당 논문에 컴퓨터범죄는 사건발생지에서 재판관할권을 가지는 것이 옳다는 내용을 실어 이 부분을 납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이씨는 직접 칼리지보드에 연락해 한국 검찰과 법원에서 말하는 자신의 범죄행위 여부를 확인했다.

그는 미국 고등학교 재학시절 미국 대학입시 준비를 위해 SAT 시험에 응시했고, 당시 입수한 시험지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일부는 판매했는데 이 행위가 칼리지보드가 저작권을 침해한 것인지 여부와 만약 그렇다면 자신이 직접 칼리지보드에 배상하겠다는 의견을 전했다.

이에 칼리지보드 측은 “SAT 기출문제 시험지는 미국 고등학교에서 거의 다 풀어보고 있기 때문에 그 정도에 대해 배상하지 않아도 된다”며 “만약 당신이 문제지를 많이 팔아 향후 문제가 된다면 그때 (칼리지보드가) 나서서 손해배상을 청구할 것”이라고 답변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기서 손해배상이란 한국에서 SAT 문제유출 사건의 당사자들을 기소할 때 적용한 형사사건이 아닌 민사사건에 해당한다. 저작권자들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고, 미국에서 최대 민사소송으로 다루는 SAT 문제유출 사건에 대해, 먼 나라 대한민국에서만 형사사건으로 다루며 억울하며 불쌍한 피고인들을 양산한 셈이다.

이씨는 21일 진행된 결심공판에서 벌금 300만원을 선고받았고, 이제 SAT 저작권법 위반 재판으로부터 자유로운 몸이 됐다. 피고인의 억울한 부분에 대해 끝까지 싸워주지 않았던 변호사도 더 이상 만나지 않아도 된다.

이씨의 재판을 지켜본 사법감시배심원단 관계자는 “이씨는 미국 명문공과대학을 2년 만에 조기졸업하고 현재도 미국 명문대학 박사과정에 있는 전도유망한 청년이지만, 이번 사건에 휘말리며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며 “법이란 죄가 있는 사람에게라도 억울함이 없이 공정하게 내려져야 맞지만, 당사자가 지쳐서 ‘빨리 끝내고 싶다’라며 자신의 억울함을 제대로 소명하지 못한 채 끝내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 법이라고 할 수 있고 이 나라에서 불안해 살 수 있겠는가”라고 주장했다.

아직도 ETS가 칼리지보드의 저작권을 관리한다고 착각하는 한 사람

이씨의 19일 오전 재판이 끝난 뒤 오후 2시부터는 같은 법정에서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18단독 SAT 문제유출 및 저작권법 위반 사건 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에는 김 모씨 등 3명의 피고인이 참석했다.

재판은 이씨의 경우보다 피고인 측과 검찰·재판부 측의 깊이 있는 진실공방이 이어졌다. 주목할 부분은 재판부의 증거 확인을 위해 피고인 김씨가 사법공조회신자료를 살펴보는 시점부터다. 재판을 맡은 오 모 판사는 법원행정처를 통해 받은 사법공조회신자료라며 김씨가 이를 확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김씨는 변호인과 같이 해당 자료가 담긴 박스를 개봉해 확인했고,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씨는 “이 파일은 복사본으로 저작권자인 칼리지보드에서 보내온 것이 아니라, ETS에서 작업한 것”이라며 “이 자료들은 지금도 칼리지보드 홈페이지에 가면 모두 다운로드받을 수 있는 것들이지만, 지금 제가 인정하지 않으면 앞으로 (재판 진행을 위한) 시간이 한참 걸린다고 이야기를 해서…”라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칼리지보드에서 저작물을 보내왔다면 억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호소했다. 이에 오 판사는 “ETS가 칼리지보드 저작권을 관리하고 있지 않는가”라고 반문했다.

오 판사에 이 발언에 변호인 측, 사법감시배심원단 등 재판에 참석한 대부분은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사건의 수사와 재판이 국정감사에서 문제로 수차례 다뤄지며, 일부 시민단체와 언론에서 문제를 제기한 핵심 내용 중 하나는 이 사건이 저작권자가 피의자(피고인)들에 대한 고소(처벌)를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SAT 문제유출 사건은 ‘고소인이 없는, 아니 피해자가 고소를 원치 않았던 사건’으로 불리고 있다.

ETS는 SAT 시험의 운영사로 오 판사의 반문 내용과는 다르게 엄연히 해당 시험의 저작권자가 아니었다. 칼리지보드와 미국 ETS 사이트 어느 곳에서도 ‘ETS가 칼리지보드의 저작권을 관리하고 있다’는 설명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만약 ETS가 칼리지보드의 저작권을 관리한다면, ETS가 칼리지보드보다 상위기관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ETS는 SAT 시험을 위한 칼리지보드의 협력사에 불과하며, 시험의 큰 틀을 맡고 있는 응시와 주관은 칼리지보드에서 맡고 있다. 특히 STA 시험문제의 개발과 출판 등 저작권과 관련된 부분 등은 전적으로 칼리지보드 측에 권한이 있다.

때문에 오 판사의 반문은 명확한 근거가 없었고, 가장 납득할 수 없는 이는 바로 피고인 김씨였다.

이에 김씨는 “칼리지보드 홈페이지에는 시험지가 이미 과목별로 공시돼있기 때문에 (증거물로 가져 온) 시험지가 원본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라며 “칼리지보드에서 공시한 내용을 내가 잘못 이용했다면 이를 칼리지보드 측에서 문제삼고 배상청구를 했어야 했고, 나를 범죄자로 만들려면 자료를 칼리지보드에 보냈어야 억울함이 없을 것”이라고 호소했다.

그는 검찰 측의 피고인 심문을 통해 과거 검찰조사를 받을 때 조사관이 ‘당신은 무조건 돈 많은 변호사를 불러라. 그렇지 않으면 소용없다’라는 모욕적 언사와 기타 유도심문으로 답변을 받아냈다고 회상하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물론 재판부는 검찰 측이 적법한 절차로 증거를 제출했다며, 피고인 측의 억울한 목소리를 그대로 넘겼다.

한편 <주간한국>이 보도한 SAT 문제유출 사건에 대한 기사를 봤다며, 과거 자신도 해당 재판의 피고인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로부터 제보가 들어왔다. 그는 현재 미국에 거주 중으로, 자신이 겪었던 SAT 저작권위반 재판의 초기 피고인들 중 일부 미국 시민권자 그리고 공무원 자녀들은 기소에 제외됐다는 사실을 밝히며 이에 대한 증거와 자세한 이야기를 털어놓겠다고 전했다.

한민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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