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용도변경 귀재’ 이영복과 시작을 함께 했던 조력자의 고백

동방주택 첫 사업, 다대·만덕 아닌 천안시 극동아파트 사업

해운대 오션타워, 초기 예상보다 분양률 저조해 애먹었던 적 있어

다대·만덕 도시계획 변경 위한 로비 난무… 이영복 로비 리스트 K의원 사무실도 오션타워에

한민철 기자

이영복(67·구속기소) 청안건설 회장의 숨겨진 과거 이야기가 폭로됐다. 이 회장의 과거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준 이는 그가 부동산 시행사업에 발을 들이고, 동방주택 사장으로 ‘전성기’를 달리던 시기 함께한 A씨다. 그는 과거 동방주택의 이사를 맡기도 했고, 이영복 회장의 조력자로서 다양한 사업에서 그를 돕는 데 열정을 아끼지 않았다. <주간한국>은 인터뷰에 조심스러워 하던 A씨를 수차례의 설득한 끝에 그의 말을 들어볼 수 있었고, 그동안 언론보도 등에서 알려져 있지 않던 이영복 회장에 대한 과거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 어렵게 인터뷰에 응해주셨다.

“사실 이전에도 몇몇 기자들이 나를 어떻게 알고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한 적이 있었다. 당시 그들이 이영복 회장에 대해 궁금해 하던 부분들 중 일부는 알려줬지만, 어느 누가 어떻게 이 회장의 로비 리스트와 연관이 돼있는지에 대해 상세히 밝힐 수 없었다. 기자들이 아직 이영복 회장에 대해 모르거나 과장되게 알고 있는 것들이 많아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이유도 있었고, 내 이야기가 언론에서 흘러나가면 파장이 커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다들 이영복 회장이 얼마나 무섭고 대단한 사람인지 잘 모른다. 나는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동안 언론 노출을 되도록 꺼려왔다.”

- 현재까지 이영복 회장의 엘시티 비리에 관해 많은 언론에서 보도를 쏟아냈다. 대부분의 보도 내용이 사실이었다고 생각 하는가.

“내가 접한 이영복 회장의 비리 의혹과 관련된 언론 보도와 방송은 내가 알고 있는 선에서 대부분이 사실과 부합했다. 그러나 추측성이 난무하고 사실과 다른 것도 있었는데, 취재가 잘못 된 것이 아닌 이영복 회장에 대해 너무 한쪽 면만을 바라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표적으로 지난해 SBS 한 시사고발 프로그램이 이영복 회장의 엘시티 개발 비리 의혹에 대해 두 차례나 보도했지만, 이 회장의 과거 행적 일부와 엘시티에만 초점을 맞췄으니 전체를 볼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영복 회장에 대해 앞과 중간을 자르고 부산에서 벌어진 일부분의 사건만 봐서는 신문과 방송에서 알고 싶어 하는 정·관계 로비 의혹에 대한 사실을 절대 못 잡아낸다.”

- 그렇다면 A씨와 이영복 회장과의 과거 인연에 대해 묻고 싶다. 이영복 회장과는 1989년부터 동업을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과거 서울시 공무원으로 3년 간 근무했고, 주택 건설회사에서 6년 정도 있었다. 퇴직 후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 88올림픽이 열리던 해의 10월경, 건설회사에서 같이 일했던 지인으로부터 서울시 역삼동 소재 D개발의 김 모 사장을 소개받았다. 그때 김 사장은 부동산 개발 사업에 관해 흥미를 가지고 나에게 사업 제안을 했었는데, 그러면서 나에게 소개시켜준 사람이 이영복 회장이었다. 당시 이 회장은 영화 친구에서 나온 것으로 유명한 부산 국제호텔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던 사장이었다.”

- 김 사장이라는 사람이 제안한 부동산 사업은 어떤 것이었는가.

“김 사장과 이영복 회장은 한 대형 건설사가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 대규모 부동산 개발을 기획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나에게 토지 매입 절차 상 생길 수 있는 지주들과의 법적 문제 해결과 협상 등을 해결 해주길 원했다. 나도 공무원 출신이라 지역 행정과 부동산 분야에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제안을 받아들였고, 1989년부터 조력자 중 한 사람으로 일을 시작했다.”

- 이때부터 이영복 회장이 토지 용도변경과 건설 시행사업을 했던 것인가.

“그것은 아니었다. 언론 등을 통해 이미 수차례 보도가 됐듯이 이영복 회장이 건설 시행사업을 시작했던 시점은 동방주택을 설립한 이후로, 1988년에는 아직 동방주택이 생기기 이전이었다. 당시 이영복 회장 등이 제안했던 서산 지역 부동산 사업의 내용은 아파트 분양 대행이나 시행사업이 아니었고, 대형 건설사의 시공 프로젝트가 예상되던 인근 부동산을 매입해 향후 시세 차익을 얻자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땅 투기’였는데, 나는 이 내용을 나중에 파악하고 투기를 하지 말자며 김 사장과 이영복 회장을 말렸고 이들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었다. 부동산 매입 후 시세차익을 얻는 것보다 정식적으로 개발 사업에 참여해 건축물 분양을 하게 되면 건설사의 면모도 갖춰 남 보기에도 좋고, 수익도 얻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자고 6개월 이상 끈질기게 설득했다. 결국 김 사장과 이영복 회장은 나의 제안을 받아줬다. 나중 이야기지만, 이후 두 사람의 사업은 크게 성공했고 현재 김 사장은 조 단위의 부동산 개발사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 동방주택을 설립해 서산 지역 부동산 개발에 참여했던 것인가.

“나의 제안에 두 사람이 동의를 하면서 우리 모두는 사실상 서산 지역 개발에 대한 관심을 끊은 상태였다. 정확히 기억이 나는 것이 당시 이영복 회장이 고향인 충청북도 청주시의 원프라자 백화점이 부도가 나서 이것을 인수해 첫 사업을 시작하자고 했었다. 그러나 부도가 난 회사를 인수하는 것은 리스크가 컸기 때문에 나는 과감히 반대했는데, 원프라자를 인수할 자금으로 바로 개발이 가능한 부동산을 매입해 허가 후 분양하면 그 효과가 배가 될 것이라고 이 회장을 설득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부도난 원프라자는 진로에서 경매 입찰로 취득했으나 유통업에 폭넓게 진출하려던 진로가 이 백화점을 인수한 뒤 유통업을 포기하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와 이영복 회장은 가슴을 쓸어 내릴 수밖에 없었다.”

- 원프라자를 인수하려던 자금으로 대체한 부동산 매입 사업은 무엇이었는가.

“여기서부터 동방주택의 설립과 첫 번째 사업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언론에서는 이영복 회장의 동방주택이 다대·만덕 지구 개발이 첫 사업이라고 오해하고 있지만, 절대 아니다. 동방주택이 처음으로 실시했던 사업은 현재 천안시 청수동 소재 아파트 부지 개발이었다. 1989년 당시 청수동 부지는 천안역 부근에 위치있고 청수장 공원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입지가 좋았다. 다들 이곳 주변 환경이 부동산 개발 사업에 적합한 곳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당시 해당 부지 내에는 28가구의 무허가주택, 소위 판자촌이 형성돼 있었는데 토지주들은 이 부지를 건설사에 팔고 싶어도 28가구 주민들이 이주에 난색을 표해 부지 매입에 응한 건설사들이 없었다. 나는 이영복 회장에게 이들 28가구 사람들을 옮기겠다고 장담했었고, 이 회장은 다음날 내 통장으로 30억원을 송금해줬다. 그리고 이들과의 협상 일주일 만에 이주 동의를 얻어냈었다. 이후 이주 소문이 나자 이곳의 지가는 잔금도 치루기 전에 3배 이상 뛰었고, 동방주택의 첫 시행사업이 여기서 이뤄졌다. 시공은 극동건설에서 맡았고, 분양도 100% 기록을 달성해 동방주택의 첫 사업은 대성공이었다. 여기서 벌어들인 자금이 나중에 만덕부지 매입에 많이 활용된 것으로 알고 있다.”

- 그렇다면 두 번째 사업이 다대·만덕 지구 개발이었는가.

“청수동 분양사업을 마친 뒤 동방주택의 다음 사업은 부산 해운대 우동의 오션타워였다. 당시 이영복 회장은 지인이 소유하던 오션타워 부지를 나에게 소개했고, 이곳에 어떤 사업을 하면 좋을 지 적당한 사업 아이템만 나온다면 부지를 매입할 마음이 있다고 소개했다. 이곳은 해운대가 바로 앞에 보이고, 조선호텔 옆에 위치한 부지였기 때문에 호텔보다는 오피스텔(리조텔)로 개발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결론을 얻었었다. 이영복 회장도 동의했고, 결심만 하면 바로 진행하는 열정을 보여 그때는 '제2의 정주영이 탄생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했었다. 오션타워의 시공사는 천수동 극동아파트 사업으로 인연을 맺었던 극동건설에서 맡아 첫 삽을 떠줬고 이후인 1992년 초반 분양이 시작됐다. 그러나 건물의 해운대 바닷가를 향하지 않는 쪽의 분양률이 저조했고, 당시 내부에서는 오션타워 사업이 실패한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있었다.”

- 당시 이영복 회장은 오션타워의 미분양을 어떻게 극복하려 했는가.

“이영복 회장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겠지만, 그와 같이 일해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이영복은 건설업계의 대통령 감’ 그리고 ‘천운을 타고난 사람’이라는 찬사다. 이런 찬사는 법보다 돈과 인맥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그의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하고 싶다. 당시 이영복 회장과 나는 오션타워 미분양 벽에 막혀 적극적으로 분양 홍보에 나섰는데, 그러던 중 신문에서 삼성에서 자동차 사업 진출을 위해 부산에 공장을 짓는다는 소식이 들려왔었고 여기서 이영복 회장에 천운이 따른 것 같다.”

- 부산 신호공단에 세워진 삼성자동차 공장을 말하는 것인가. 당시 삼성이 자동차 사업에 진출하며 동방주택이 다대·만덕 지구 사업에 연관됐다는 것은 이미 언론 등을 통해 잘 알려진 사실 아닌가.

“그렇다. 당시 삼성은 자동차 공장 부지로 바다 매립지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부산시에 200억원을 기탁하면서 바다 매립에 사용할 흙을 채취하는 토취장(土取場)과 매립 업체를 선정해 달라고 요구했었다. 그때 이영복 회장은 부산시 공무원 및 고위 인사들과 친분이 두터웠고, 동방주택의 실적 기준치는 분명 자격미달 수준이었지만 사업권을 따냈다. 이영복 회장이 ‘의혹’이라는 문구가 붙은 채 매스컴 등에 등장했던 시기는 이때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이영복 회장이 삼성 자동차 공장 사업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던 때, 나는 오션타워의 분양률을 끌어올리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오피스텔 시장이 과다하게 보급돼 아무리 노력해도 분양률을 끌어올리기에 한계가 있었다. 동시에 이영복 회장은 나에 대한 보상도 제대로 해주지 않았고, 단지 돈 걱정 말라는 식으로만 설득해와 나는 약 1년 정도 부산을 떠나있었다. 나는 이 회장과도 연락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과 시행 법인을 만들어 보려는 계획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삼성의 부산시 자동차 사업 진출은 지난 1994년경 삼성자동차 부산유치 운동 범시민운동이 전개될 정도로 적극적으로 추진됐었다. 삼성이 공장과 직원 공장을 세우기로 한 부지는 현재 신호공단 인근으로 이곳은 지반 상태가 연약해 이를 다지기 위한 상당량의 흙이 필요했다. 이영복 회장은 이미 1993년경 다대지역 임야 14만 5000여평을 동방주택 명의로 집중적으로 매수했었고, 삼성은 이곳 다대부지에서 발생되는 흙을 사용해 신호공단 부지를 다지려 했다. 당시 부산시는 토취장에서 흙과 돌을 운반한 뒤 부지 용도를 시행업체가 원하는 방향으로 변경해준다는 조건을 달았었고, 삼성과 부산시가 영세한 주택건설 업체에 불과한 동방주택에 특혜를 주려 했다는 의혹에 대한 보도가 다수 흘러나왔었다.

- 이영복 회장과는 이후 어떻게 다시 연락이 닿게 됐는가. 다대·만덕 지구 택지전환 특혜의혹 등에 대해 현재까지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던 일화가 있는가.

“서울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중 어느 날 동방주택 직원으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그때가 1993년 가을 경으로 이영복 회장이 나에게 부동산 개발을 원하는 업체가 있는데 조력자가 필요하다면서 법인 물색 등을 도와달라는 요청한다는 전화였다. 나는 그때 ‘부산에 비행기를 타고 가고 싶은데 표를 구할 돈도 없다’라고 말했는데, 즉시 동방주택에서 비행기 티켓을 사라며 200만원을 송금해줬었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저녁에 비행기를 타고 해운대 오션타워를 오랜만에 찾았다. 거기서 동방주택 직원들과 오션타워 내 중국집에서 식사를 했고, 언론에서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내연녀로 알려진 임 모 여인이 운영하고 있던 룸살롱에서 술 접대도 받으며 하루를 보냈다. 다대동 부지 사업에 대한 제안을 들은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이영복 회장이 꼭 사들이고 싶어 하는 다대동 부지 한 가운데에 중종 묘소(약 8000평)가 자리 잡고 있었고, 부산 내 부동산 업자들만으로는 이 묘소를 옮기고 주거지역으로의 용도변경 문제를 해결하는데 한계가 있어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 그래서 제안을 받아들였는가.

“망설였지만, 충분한 시간을 주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면 조력사로서 힘을 쓰겠다고 응해줬다. 이후 반년 동안 애를 써서 중종 묘소 부지를 사들이는데 성공했고, 해당 부지가 아파트 용지로 도시계획을 변경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역시 다대부지 도시계획변경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대형 프로젝트였다. 그때 자연녹지가 주거지역으로 바뀌려면 최소 5년의 기간이 필요했고, 인근 주민들의 공청회를 거치는 등 철저한 협의 과정도 요구됐었다. 여기서 도시계획 변경의 기간 단축 및 동방주택 살리기에 ‘권력자들’이 부산시 내 매스컴을 통해 얼굴을 자주 비추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다대·만덕 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적이 있는 지역구 내 K모 의원이었다. K의원은 오션타워 17층에 자신의 국회의원 사무실을 두고 있었고, 이영복 회장과 친했던 국회의원 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이영복 회장을 위해 다대지구 도시계획 변경에 힘써준 것은 사실이었지만, 권력자들에 뇌물이 없으면 일이 진척되지 않는 상황에 이르는 악순환이 생기기 시작했다.”

- 결국 다대·만덕 지구 택지전환 특혜의혹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그렇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도시계획 변경을 위해 이곳 저곳에 로비를 했고, 일반사람들에게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특혜’로 동방주택의 사업이 진행되고 있었으니 탈이 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어느 날 중앙일보에서 다대·만덕 지구 택지조성으로 이영복 회장이 1000억원을 벌게 됐다는 사설을 신문에 게재하면서, 동방주택 내에서 난리가 났었다.”

- 이영복 회장은 당시 향후 사업 방향을 어떻게 틀었는가.

“1995년 말 경에 부동산 소개업을 하는 지인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서울시 금천구 독산동에 있는 군부대를 이전하는데, 이 부지를 사면 나중에 아파트 부지로 변경이 될 수 있어 매입할 의사가 있느냐고 물어왔다. 이에 나는 당시 금천구청 관계자들로부터 군부대가 이전하면 금천구청을 건립한 부지를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은 민간업자가 요청하는 대로 도시계획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곳이 바로 독산동 도하부대 부지였다.”

- <주간한국>도 이영복 회장의 독산동 도하부대 이전 로비의혹에 대해 수차례 보도한 적이 있다.

“해당 기사들을 읽어봤다. 그런데 이영복 회장이 독산동 도하부대 부지를 어떻게 알고 접근했는지 그 이전 이야기에 대해서는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금천구청으로부터 사실 확인을 거친 뒤 당시 육군본부에 근무하고 있던 지인에게 추가적으로 도하부대 부지에 대해 파악하면서, 이곳이 삼양사 소유 징발토지라는 것까지 알 수 있었다. 이후 도하부대 이전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었고, 이곳 독산동 도하부대 이전을 위해 함께 할 인물이 필요했다. 그가 바로 이영복 회장이었고, 이 회장은 이미 1989년 독산동 도하부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독산사거리 인근에 건물을 사들인 상태로 해당 지역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상태였다.”

- 독산동 도하부대 이전 로비의혹은 처음부터 이영복 회장이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이영복 회장은 당시 징발토지 재산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물론 향후 부대 이전을 위해 국방부 및 정·관계 인사들에 대한 로비를 주도한 이는 이영복 회장이 맞지만, 이 사업은 내 머리에서 나와 이영복 회장에게 전달된 것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영복 회장이 부산 엘시티 사업이 다대·만덕 지구 택지조성에서 나온 자금으로 이뤄졌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엘시티 사업은 이영복 회장이 독산동 도하부대 용도변경으로 벌어들인 자금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한민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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