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해례본 낙장 권두서명이 ‘御製訓民正音’인 직접 증거 4가지

보물 제745-1호 1459년 월인석보 내 언해본…‘임금이 지은 글’을 뜻하는 명사‘御製(어제)’있어

1446년 음력 9월 29일자 세종실록 기록…‘御製曰’은 “임금이 지은 글은 다음과 같다”를 뜻해 2015년 박대종 복원 언해본… 훈민정음 언해본 권두 서명은 ‘御製訓民正音’ 밝혀

국보 제71호 동국정운 서문…‘御製訓民正音’ 뚜렷이 남아 있어

박대종 대종언어연구소 소장

이번 문화재청 훈민정음 해례본 복원 및 정본 프로젝트에 있어서 최고 핵심 사안은 권두서명에 ‘御製(어제)’가 있느냐 없느냐를 밝히는 것이다. 물론, 결정적인 직접 증거들이 있기 때문에 권두서명은 ‘御製訓民正音(어제훈민정음)’이 전적으로 옳다.

그런데 문화재청과 용역을 맡은 훈민정음학회 한재영 회장은 ‘한계(Limit)’ 운운하며 이 사항을 고민하고 있다. 2007년 문화재청이 해례본의 쌍둥이격인 언해본 정본 작업을 할 때 동국대 정우영 교수(훈민정음학회 감사)의 잘못된 연구결과를 받아들여 언해본의 권두서명에서 ‘어제’를 삭제하는 중차대한 실수를 저질렀고, 그런 정 교수가 2017년 해례본 정본 작업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훈민정음(국보 제70호)
훈민정음 해례본 복원 및 정본 프로젝트 핵심은 권두서명의 ‘御製’

총 33장으로 구성된 훈민정음 해례본은 순 한문으로 된 책이다. 그것 중 글쓴이가 세종대왕인 앞 4장의 기록을 정음으로써 번역한 것이 언해본이므로, 당연히 해례본과 언해본의 결과치는 서로 일치해야 한다.

따라서 이번 해례본 작업 시 ‘어제’를 집어넣어 바르게 복원하려면, 절차상 먼저 2007년 문화재청 언해본부터 정정해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즉 신뢰도 면에서 문화재청과 용역을 도맡은 훈민정음학회 담당자들의 고민이 존재한다. 어제를 무시하고 강행하자니 박대종이 제시한 각종 직접 증거와 설득력 있는 논리들이 걸리고, 증거에 입각해 하자니 어제를 무시한 2007 문화재청 언해본과 자신들의 잘못된 처신이 걸린다.

문화재청이 이 사업 발표 이후 현재까지 공개토론을 벌인 것은 사실상 두 차례다. 첫 번째는 2017년 8월 28일 뉴시스의 “문화재청이 복원한다는 훈민정음, 이래서 예산낭비”를 필두로 그에 대한 문화재청의 해명 및 9월 27일 “문화재청, 어제도 모르는가? 훈민정음 참모습 결정적 증거”까지 언론의 주관 하에 정우영 교수와 박대종 소장 간의 온라인 공개변론(論戰)이었다. 그 뒤 12월 15일 열린 훈민정음 학술토론회는 사실상 정 교수가 소속된 훈민정음학회가 주관한 오프라인 공개토론회이다.

사 회: 이현희 교수, 훈민정음학회 제4대 회장(2014~2015)

기조발표자: 한재영 교수, 훈민정음학회 현 회장 / 2017 해례본 용역책임자

제1 발표자: 백두현 교수, 훈민정음학회 제2대 회장(2010~2011)

제2 발표자: 정우영 교수, 훈민정음학회 감사 / 2007 문화재청 언해본 입안자

제4 발표자: 황선엽 교수, 훈민정음학회 현 총무이사

종합토론좌장: 김주원 교수, 훈민정음학회 제1대 회장(2008~2009)

문화재청의 ‘모시는 글’ 행사일정표를 보면 ‘훈민정음학회’라는 문구는 어디에도 없지만, 위에서처럼 공개토론회 및 본 사업을 추진하는 사람들의 구성은 가히 ‘짜고 치는 고스톱(?)’ 의혹을 받지 않을 수 없다. 2007년 문화재청 언해본 제작 시 주도적으로 참여한 정우영, 김주원, 이현희 교수가 소속된 훈민정음학회의 현 한재영 회장이 2017 문화재청 해례본 연구용역 책임자이고, 한재영 교수가 재직하고 있는 한신대 산학협력단이 이번 사업 제작용역을 맡았으니 말이다.

금번 학술토론회의 원고를 살펴보니, 훈민정음학회의 결론은 정우영 교수가 입안한 ‘어제’를 무시한 2007 문화재청 언해본을 수정하게 되면 자신들의 신뢰도에 치명타를 입기 때문에 권두서명을 어제 없는 그냥 ‘훈민정음’으로 강행하겠다는 것이다.

기조발표자인 한재영 교수는 토론회 원고 15쪽에서, “한편 卷頭書名(권두서명)에 ‘御製’가 있을 가능성과 없을 가능성은 둘 다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하나의 안만을 제시해야 할 경우에는 ‘御製’를 넣는 쪽이 더 부담스럽다는 의견이 있었고, 이미 이루어진 언해본 정본 제작 사업에서는 ‘御製’를 넣지 않는 것으로 하였기에 그 안을 근거로 卷頭書名을 ‘訓民正音’으로 하는 편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31쪽에서 문제가 되는 권두서명에 대해 “본 연구에 참여한 연구자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정본을 확정하기로 하나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도 열어 두기로 한다”고 말했다.

참여 연구자들 중 권두서명 관련 주요 연구자는 백두현 교수와 정우영 교수이다. 정 교수는 2007년 문화재청 언해본 작업 시 권두서명을 ‘훈민정음’이라 한 기존의 견해를 바꾸지 않았다. 백 교수는 토론회 원고 42쪽에서 “만약에 정음편의 권두서명이 ‘御製訓民正音’이었더라면 정음해례편의 권두서명은 ‘御製訓民正音解例(어제훈민정음해례)’로 표기되었을 것이다.” 44쪽에서 “필자는 정음편의 권두서명을 ‘訓民正音’으로 보고, 이것을 해례본 전체의 책이름으로 삼는다”라고 하면서 정 교수의 편을 들었다.

그러나 御製라는 말은 언해본의 주석이 증명하듯 ‘임금이 지은 글’을 뜻하는 명사(noun)이다. 그런데 총33장으로 이루어진 훈민정음 책 중에서 세종임금이 지은 앞 4장의 글은 임금이 지은 글이므로 구별을 위해 ‘어제’를 붙여야 하지만, 그 뒤 정인지 이하 8명의 집현전 학사들이 참여하여 쓴 29장의 글 제목에 ‘어제’를 붙일 수 없음은 자명하다. 고로 신하의 글에 어제를 붙인다는 주장은 어처구니없는 말이다.

정우영 교수는 박대종과의 온라인 공개변론 때는 말하지 않았던 ‘월인천강지곡’ 관련 주장을 토론회 원고 74쪽에서 다음과 같이 하였다. “세종 승하 후에 새롭게 합편된 1459년 ≪월인석보≫(권1․2)의 권두 패기(牌記)에 “世宗御製月印千江之曲 / 昭憲王后同證正覺”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서명 ≪月印千江之曲≫에 “세종임금께서 지으심”을 명시하기 위해 그 앞에 <世宗御製>를 추가하였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월인석보 권1의 1장에 실린 월인천강지곡 권두서명 ‘월인천강지곡제일’(오른쪽). 월인석보 내 어제월인석보서 뒤에 있는 비석 문구는 권두서명이 아님.(왼쪽)
그러나 정 교수는 국민들을 속여서는 안될 것이다. 월인석보 권1의 앞장에 나오는 권두서명이 아닌 “世宗御製月印千江之曲” 문구는 비석 그림 안에 쓰인 문구이다.

비석이나 위패에는 묘호인 世宗을 써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월인석보에 합편된 월인천강지곡 권두서명에는 그냥 월인천강지곡이지 그 앞에 ‘세종어제’를 붙이지 않았다. 그러니 이는 정 교수의 주장과는 반대로 훈민정음 언해본의 권두서명이 ‘어제훈민정음’이었음을 강력 증명하는 것이다.

훈민정음 권두서명이 ‘어제훈민정음’인 직접 증거 4가지

훈민정음 책 중에서 앞 4장 분량의 세종이 지은 글 제목(권두서명)이 ‘어제훈민정음’이라는 직접적 증거는 사진에서처럼 총 네 가지이다. 이 중 ①②③은 정우영 교수와의 공개변론 시 이미 밝힌 것이고, ④는 지금 처음으로 공개하는 증거자료이다.

박대종 소장이 제시한, 해례본 낙장의 권두서명이 ‘御製訓民正音(어제훈민정음)’이라는 직접 증거 4가지. ①보물 제745-1호 1459년 월인석보 내 언해본 ②1446년 음력 9월 29일자 세종실록 기록 ③2015년 박대종 복원 언해본 ④국보 제71호 동국정운 서문
첫 번째 직접 증거(사진 ①)는 보물 제745-1호 1459년 월인석보 내 언해본이다. 거기 분명히 ‘임금이 지은 글’을 뜻하는 명사 ‘御製(어제)’가 보인다.

두 번째(사진 ②)는 1446. 9. 29일자 세종실록 기록이다. “이달에 훈민정음이 이루어졌다” 바로 뒤의 “御製曰”은 “임금이 지은 글은 다음과 같다”를 뜻한다.

세 번째(사진 ③)는 규칙을 발견하여 2015년 박대종이 복원한 훈민정음 언해본 복원본이다. 2007 문화재청 언해본 작업 시 ‘어제’를 집어넣으면 ‘나랏말싸미’ 부분이 왼쪽으로 한 칸 이동해야 한다는 정우영 교수의 주장이 틀렸음을 입증한다.

정우영 교수의 논문 ‘훈민정음 언해본의 성립과 원본 재구’(2005)의 다음 문구는 탁견이다. “한문본(해례본)의 권두서명을 밝힐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는 1459년 월인석보 제1권 권두에 실린 ‘世宗御製訓民正音’에 있다. 변개되기 이전의 언해본으로 복원할 수만 있다면 한문본의 권두서명은 저절로 밝혀진다. 변개되기 전의 ‘언해본’의 권두서명은 곧 한문본의 권두서명임을 증명하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된다.”

네 번째 직접 증거(사진 ④)는 세종대왕의 찬저인 국보 제71호 동국정운(1447)의 신숙주 서문이다. 거기에 “나 여기 있소” 하며 ‘御製訓民正音’이 뚜렷이 남아 있다. 주의할 점은, 언해본 주석에서 밝혔듯이 御製의 製(제)는 동사 ‘만들다’가 아니라 명사 ‘지은 글(기록)’을 뜻하니 여기에 일절 오해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훈민정음에서 동사 ‘만들다’는 ‘制(제)’자를 썼다.

따라서 御製를 동사로 보고 동국정운의 “以御製訓民正音定其音(이어제훈민정음정기음)”을 “어제하신 훈민정음으로 그 음을 정하고”로 본 기존 해석은 완전 오역이다. “(훈민정음 책 중 세종의) ‘어제훈민정음’ 편에 따라 그 음을 정하고”가 바른 번역이다. 다시 말해, 御製訓民正音은 “어제하신 훈민정음 28자”가 아니라 “훈민정음 책 중 맨 앞 세종이 지은 4장 분량의 기록”이다.

좀 더 정밀하게 설명하면, 동국정운은 음운서로 ‘음운(音韻)’은 ‘성운(聲韻)’과 동의어이다. ‘성운’에서의 ‘성’은 ㄱ ㄴ 같은 ‘초성’을 뜻한다. 고로 위 문장 중 “定其音(정기음)”에 대해 “그 음을 정하고”는 직역이며 “그 초성을 정하고”가 음운학적 전문번역이다. 중국은 표음문자가 없어 홍무정운(洪武正韻)이나 광운(廣韻), 절운지장도(切韻指掌圖) 등에서는 ㄱ 소리를 한자 ‘見’으로, ㅋ은 ‘溪’자로 표시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독창적으로 ‘어제훈민정음’ 편에서 ㄱ은 ‘君’, ㅋ은 ‘快’자로 표시하였다. 동국정운은 편집 시 초성 표시할 때 중국의 운서들을 따르지 않고 ‘어제훈민정음’에서 정한 세종의 방식을 따랐기 때문에, 신숙주가 “以御製訓民正音定其音” 운운한 것이다.

이처럼 ‘어제훈민정음’은 직접 증거들이 여럿 있고, ‘훈민정음’은 그 근거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안위와 신뢰 유지를 위해 훈민정음학회 담당자들이 권두서명에서 ‘어제’를 뺀 결과물로 밀어붙이고 싶다면, 박대종이 제시한 위 직접증거 네 가지에 대해 무력화시키는 반론을 제시한 후에 강행해야 할 것이다.

대종언어연구소 소장 박대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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