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움’ 인권사각지대 몰린 간호사

유가족 측 “병원 내 가혹행위 때문에 투신자살했다”

병원 측 “경찰수사 진행 중… 추후 입장표명 하겠다”

대한간호협회 조사 결과… 직장 괴롭힘 113건

지난 15일 숨진 간호사 A씨가 근무했던 서울시 송파구에 위치한 서울아산병원 전경.(사진=연합)

예진협 기자

지난 설 연휴에 서울아산병원의 한 신입간호사가 숨진 채 발견됐다. 서울 송파경찰서에 따르면 이 병원 소속 여자 간호사 A씨는 지난 15일 오전 10시 40분경 송파구의 한 아파트 고층에서 투신했고 아파트 화단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남자친구와 유가족 측은 A씨가 병원에서 ‘태움’이라고 불리는 가혹 행위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 송파경찰서는 숨진 A씨의 유족과 남자친구를 상대로 참고인 조사를 벌였다고 22일 밝혔다.

A씨의 남자친구 B씨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서 프리셉터(preceptorㆍ선임) 간호사의 괴롭힘이 있었다고 주장했고, 간호계의 고질적인 병폐로 알려진 태움이 이번 비극의 원인이라고 밝혔다. B씨는 “여자친구의 죽음이 그저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간호사 윗선에서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태움이 여자친구를 벼랑 끝으로 몰아간 요소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경찰은 A씨의 죽음과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병원 관계자들도 곧 참고인 조사를 할 것이라고 밝혔고, 조사 과정에서 가혹 행위가 사실로 밝혀지면 관련자를 형사 입건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가혹 행위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 A씨의 컴퓨터에 대한 디지털 포렌식도 벌일 계획이라고 알려졌다.

한편 병원 측도 자체 조사를 진행 중이며 가혹 행위가 사실로 드러나면 곧바로 징계 조치하고 전반적인 교육 과정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해 개선 방안을 만들 계획이다. 병원은 극심한 업무량에 시달리는 간호사의 스트레스를 줄일 방안을 찾는데도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A씨가 근무했던 서울아산병원의 관계자는 “사건 발생 후 숨진 간호사의 선임과 수간호사 등을 상대로 한 1차 조사 결과 유가족이나 남자친구가 주장하는 직장 내 괴롭힘 등은 나타나지 않았다”며 “병원은 이번 사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신중하게 접근하며 진상규명에 힘쓸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서울아산병원 측은 “병원도 이번 사태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다만 지금은 경찰수사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추가적인 조사를 모두 마무리한 다음 추후 결과가 나오면 병원에서 입장표명을 하겠다”고 밝혔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A씨는 13일 저녁 근무 중 중환자실에서 환자의 배액관(수술 후 뱃속에 고이는 피나 체액을 빼내는 관)이 망가지는 등의 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했고 14일 저녁 수간호사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면담 자리에서 수간호사 등은 A씨를 문책하거나 책임을 돌리지는 않았다고 전해졌다.

간호계, “사실상 태움이 없는 병원은 없다”

태움은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간호계 은어로 프리셉터가 신입간호사를 괴롭히며 가르치는 방식을 뜻한다. 일선 간호사들에 따르면 태움은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일종의 직장 내 괴롭힘으로 변질됐다며 서울의 대학병원 등 대형병원을 비롯해 전국 대부분의 병원에서 상습적으로 행해지고 있고 대부분의 간호사들이 이를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지 취재 결과 서울의 모 대학병원을 비롯해 대부분의 병원에서 태움이 상습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간호학과 재학생들은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태움이 없는 곳이 아니라 덜한 곳이 어딘지 물어볼 정도로 태움은 간호계에 뿌리 박혀 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현직 간호사 P씨는 “사실상 태움이 없는 병원은 없다”며 “정도의 차이지 신입 간호사라면 대부분 겪는다. 나도 신입 간호사 때 태움을 겪었는데 그만두고 싶을 때가 많았고 지금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것조차 정신적으로 힘들다”고 밝혔다.

현직 간호사들에 따르면 신입간호사는 프리셉터에게 실무교육을 받는데 교육기간에도 프리셉터와 신입 모두에게 과도한 업무가 주어지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막중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프리셉터는 교육과정에서 신입간호사에게 언어 및 신체 폭력을 하는 경우가 많으며 왕따를 시키기도 한다.

아직 업무가 서툰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신입간호사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이번 경우처럼 비극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현직 간호사들의 전언이다. 특히 최근 병원간호사회에서 실시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2015년 우리나라 인구 10만 명당 간호사 수는 OECD 평균의 3분의 2 수준으로 환자 대비 간호사 수가 부족하고 그만큼 과도한 업무량에 시달린다.

인권사각지대에 몰린 간호사들.(사진=연합)

대한간호협회 조사 결과… 직장 괴롭힘 113건

대한간호협회가 지난해 12월 28일부터 지난달 23일까지 ‘간호사 인권침해 실태조사’ 설문에 참여한 7275명의 답변을 분석해 20일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간호사 10명 중 7명이 근로기준관련 인권침해를 경험했고 10명 중 4명 이상이 동료 간호사나 의사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고 답했다. 또 19%는 성희롱이나 성폭행을 경험했다고 응답해 간호사들의 열악한 업무환경이 그대로 드러났고 인권사각지대에 놓여있음이 밝혀졌다.

구체적으로 B 간호사는 “신규 간호사는 새벽 4시에 출근해 오후 6시에서 9시 사이에 퇴근하는 게 기본이다. 이렇게 근무해도 추가수당이나 특근 장부는 못쓰게 한다”고 밝혔고 C 간호사는 “15분에서 20분의 짧은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이야기하면서 먹으면 시장터냐면서 빨리 먹고 나가서 일하라고 한다”고 밝혔다.

이어 D 간호사는 “임신 시 단축근무는 있을 수도 없는 이야기라고 간호부에서 말했고 육아휴직을 사용하고 나면 당연히 연차에 인정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복귀하고 나면 월급이 인상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설문에 따르면 근로기준법 위반에 따른 인권침해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간호사는 69.5%에 달했다. 구체적으로는 원하지 않는 근로를 강요하거나 연장근로를 강제한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고 연장근로에 대한 시간 외 근로수당을 받지 못했다는 응답과 연차유급휴가의 사용을 이유 없이 제한한다는 응답도 2000여 건에 달했다.

생리휴가, 육아시간, 육아휴직, 임산부에 대한 보호 등과 관련된 인권침해 여부를 묻자 27.1%가 ‘그렇다’고 답했고, 응답자의 18.9%는 지난 1년간 직장 내 성희롱 또는 성폭행을 당했고 가해자의 59.1%는 환자, 21.9%는 의사, 5.9%는 환자의 보호자였다.

지난 1년간 직장에서 태움을 당한 적이 있는 간호사는 40.9%였고 가해자는 직속상관 간호사 및 프리셉터가 30.2%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동료간호사가 27.1%, 간호부서장이 13.3%, 의사가 8.3%로 주로 병원 관계자에 의해 직장 내 괴롭힘이 발생하고 있었다. 주로 폭언과 험담, 소문 퍼뜨리기가 많았고 일과 관련한 굴욕 또는 비웃음거리로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

이와 같이 다수의 간호사들이 열악한 업무환경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당하는 등 인권사각지대에서 시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직 간호사 P씨는 “일을 도중에 그만 두는 경우가 많고 비교적 대우가 좋은 미국 등 해외로 떠나는 경우도 많다”며 “선배로서 후배가 비극적인 선택을 한 것을 보면서 마음이 아프고 죄책감도 든다. 이번 계기로 많은 부분이 개선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대한간호사협회는 이번 실태조사와 함께 진행한 인권침해 신고 중 노동관계법 위반 내용과 직장 내 괴롭힘 113건을 보건복지부와 고용노동부에 접수한 상태이며 노동관계법 위반 건에 대해서는 구제절차를 진행할 계획이다.

예진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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