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통치행위 존중 위해(?)… 곳곳에서 드러나는 모순

남재준 전 국정원장 등 前 국정원 사람들, 반성하지만… “죄 안 돼” 반박

국정원장, ‘국가 회계사무 처리 관계자’인가… 국고손실혐의 입증 변수

특수활동비가 정당한 집행이었다는 前 국정원 사람들… 은밀히 전달할 필요 있었나(?)

박근혜 정부 전직 국가정보원장 3인. 왼쪽부터 이병호 전 국정원장, 이병기 전 국정원장, 남재준 전 국정원장. (사진=연합)
한민철 기자

박근혜(66·구속기소) 정권 국가정보원의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에 대한 특수활동비 상납을 두고, 전직 국정원 사람들의 설득력 떨어지는 주장이 주목을 끌고 있다. 재판에 넘겨진 이들 전직 국정원 사람들은 당시 청와대에 특수활동비를 상납한 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며 반성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다만 이와 관련해 자신들에게 뇌물공여나 국고손실죄 등을 물을 수 없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잘못은 했지만 죄를 물을 수 없다’라는 다소 모순된 주장에 검찰 측 역시 논리적 반박을 이어 나가며 치열한 법정공방을 예고하고 있다.

지난 20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31부(부장판사 김연학) 심리로 열린 추명호(55·구속기소) 전 국가정보원 국익정보국장에 대한 재판에서, 추 전 국장 측은 국정원의 청와대에 대한 특수활동비 상납이 뇌물공여 및 업무상 횡령죄 등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혔다.

추 전 국장은 이병기(71) 전 국정원장 시절, 이 전 원장의 지시로 지난 2014년 9월부터 2015년 2월까지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현금으로 인출, 조윤선(52·구속기소)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에 500만원 그리고 신동철(58·구속기소) 당시 청와대 정무비서관에게 300만원, 총 4800만원을 전달한 혐의 등을 받고 있다.

추 전 국장도 검찰 조사 과정에서 “이병기 원장 부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원장과 독대를 했을 때, ‘신동철 정무비서관에 매월 300만원과 500만원을 지급하라’고 지시했다”라며 “이병기 원장의 지시로 신동철 정무비서관에 돈 봉투를 전달한 사실이 있다”라고 이 부분 혐의에 대한 사실 인정을 한 바 있다.

또 추 전 국장의 검찰 진술조서 내용에 따르면, 이 전 원장 지시로 서울 프라자호텔 커피숍에서 한 달에 한 번 신동철 전 비서관을 만나 해당 돈 봉투를 전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추 전 국장은 당시 신 전 비서관에게 돈 봉투를 건네며 “앞으로 매월 드리게 될 것인데, (조윤선) 정무수석과 비서관님의 활동비입니다”라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추 전 국장과 국정원 8국에서 안보처장, 경제수집 처장을 지냈던 이들의 검찰 조사 내용에서도 당시 추 전 국장의 요구로 매월 800만원을 정기적으로 현금화해 그에게 전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원의 특수활동비가 대통령을 비롯해 청와대 고위 관계자들에게 흘러들어갔다는 의혹은 대체적으로 사실로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앞서 언급한 대로 추명호 전 국장을 비롯해 당시 특수활동비를 상납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전직 국정원 사람들’은 사실관계는 인정하더라도, 죄가 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국정원 특활비 상납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남재준(74·구속기소) 전 국정원장과 이병기 전 원장 등도 같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국정원 특수활동비는 국내외 방첩활동과 특수공작 등 국정원 고유업무를 위해 배정된 비용으로 국정원장의 특수활동비는 연간 40억원에 달한다.

남재준 전 원장의 변호인단은 재판 과정에서 청와대에 특수활동비를 상납한 사실은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지만, 검찰 측 공소사실대로 국고손실죄의 주체가 될 수 없고, 수수자의 직무와 관련된 대가를 기대했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사실 검찰이 남 전 원장 등에 적용한 혐의인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국고손실죄는 회계직원 책임법에서 규정하는 국가 회계처리 직원이 국고에 손실을 미칠 것을 인식하고 그 직무에 관해 횡령 또는 배임 행위를 범했을 때 성립한다.

남 전 원장 측은 그가 회계처리 직원 또는 책임자가 아니며, 당시 회계처리 직원에 해당하는 자와의 공모를 한 것도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법리적으로 이 부분 혐의가 유죄로 인정될 수 없다는 취지였다.

또 이병기 전 원장 측 변호인단 역시 국정원장의 몫인 특수활동비를 국익을 위한 합리적인 정치적 판단의 재량 범위 내에 청와대 그리고 대통령에게 지원한 것은 ‘격려비’와 다름없다고 밝혔다.

국정원의 운영자인 국정원장과 이들의 사용자인 대통령 사이에서 오간 자금이 국고손실 또는 횡령의 범위에 들어갈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무엇보다 특수활동비를 전달하면서 국정원의 상위기관인 청와대에서 국정운영 예산을 위해 정당하게 사용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 다른 용처를 상상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정당하고 깨끗한 돈의 지급이었다면… 왜 몰래 줬나(?)

쉽게 말해 이들 전직 국정원 사람들은 청와대에서 요구하니, 그 사용처에 대한 인식은 깊게 고민하지 않고 특수활동비를 전달했다는 입장이었다.

물론 앞서 언급한 대로 대통령의 직무에 관한 대가나 반대급부를 바라고 돈을 건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뇌물공여 등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검찰은 대통령의 요구에 따라 국정원장 자신에게 배정된 특수활동비를 건넸다는 점은 굳이 복잡한 법리적 해석까지 가지 않고 상식과 경험칙 상의 판단만으로, 어떤 대가와 반대급부를 바랐다고 보기 충분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대가와 반대급부란 대통령에게 국정원장 임명을 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이나 향후 임기 보장 그리고 국정원에 대한 넉넉한 예산 배정 등에 대한 기대가 있다.정부조직법상 국정원은 대통령 소속으로, 대통령의 지시와 감독을 받는다고 명시적으로 규정돼 있다.

특히 국정원장뿐만 아니라 차장과 원장 비서실장에 대한 임명권을 모두 대통령이 가지고 있다. 물론 국정원 예산 편성에 있어서도 대통령과 그 참모들의 권한이 차지하는 비중은 막강하다.

실제로 기획재정부의 정부 예산 편성은 국회의 심의를 통과해야 하지만, 대통령의 의견을 대변하는 청와대 정무수석실에서 1차적으로 각 부처의 필요 예산을 파악하고, 국회 예산안 통과에 대한 정확·신속한 업무처리를 위해 의원들의 예산 심사를 위한 소위 민원창구 역할을 한다.

'국정원 댓글사건'에 대한 수사와 재판을 조직적으로 방해한 혐의로 기소된 남재준 전 국가정보원장이 28일 서울 서초동 중앙지법에서 열린 재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연합)
예산안 편성에 있어 정무수석실의 입김이 상당할 수밖에 없고, 최종적으로 예산안은 대통령에게 보고돼 확정되기 때문에, 국정원장들은 예산 편성에 있어 대통령과 정무수석에 상당히 의지할 수밖에 없다.

남재준 전 원장 등 전직 국정원 사람들 역시 대통령과 정무수석의 예산 편성과 관련된 직무가 국정원 그리고 국정원장에 미치는 영향력을 충분히 인식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직무와 관련된 대가나 기대로 청와대에 특수활동비를 건넸다고 봄이 타당하다는 판단이다.

사실 이들 전직 국정원 사람들의 주장 중 가장 납득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부분은 바로 해당 특수활동비가 대통령 또는 청와대 참모들에게 전달됐더라도 정당한 국정업무 또는 대통령의 통치행위를 위해 쓰일 것이라고 판단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국정원 특수활동비는 국정원장의 고유업무에 사용해야만 하는 비용이다. 만약 대통령이나 참모진들이 이 돈을 전달받는 과정에서 그 용처를 국정원장에 분명히 밝히고, 국정원과의 연관성이 높은 업무에 정당하게 사용했다면 적어도 구속기소까지 갈 정도로 문제의 소지는 없었다.

다만 여기서 고유업무라는 조건에서 볼 수 있듯이 특수활동비는 용도 자체가 엄격히 제한돼 있다. 단지 대통령이고 청와대 참모라는 ‘지위’만으로는 국정원장의 특수활동비를 사용할 수 있는 무조건적인 ‘자격’을 부여받지 못한다는 의미다.

무엇보다 대통령에게도 특수활동비가 따로 배정돼 있다. 때문에, 청와대 측이 국정원장 고유업무에만 사용해야 할 특수활동비의 상납을 요구했을 때, 그 용처를 분명히 파악해 둬야만 했고, 이에 대한 의무도 있다는 설명이다.

전직 국정원 예산관 최 모씨도 이번 사건에 대한 검찰 조사 과정에서 “국정원 자금은 정보활동과 공작 등 국가안보 관련 기밀사항에 사용돼야 한다”라며 “(특수활동비는) 국정원의 정보사업에 사용해야 한다. 구체적인 사용처를 확인해 봐야 한다”라고 진술했다.

또 다른 전직 국정원 예산관 김 모씨 역시 검찰 조사에서 “국정원장의 특별사업비 40억원은 원장 자신이 결정하면 임의로 사용 가능하지만, 특수활동비 용도에 맞게 사용돼야 한다”라며 “원칙적으로 공작 등 국정원 직무 수행 용도로만 사용해야 하는 예산”이라고 진술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정원장, 국가 회계사무 처리 관계자로 볼 수 있나

대통령의 통치행위를 존중하기 위해 사용처에 대한 확인 의무까지 져버렸다는 이들 전직 국정원 사람들의 주장은 자신들이 몸 담았던 국정원 예산의 고유성까지 무시하는 발언이라는 비판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국정원장 스스로 특수활동비 상납이 정당한 자금 집행 또는 문제의 소지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면, 그 전달 과정이 비밀리에 이뤄질 필요가 전혀 없었다.

실제로 국정원 특수활동비가 청와대에 전달되는 과정은 은밀하거나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앞서 언급한 전직 국정원 예산관 최 모씨의 검찰 진술 내용에 따르면, 지출관이 특수활동비를 은행에서 현금으로 인출해 쇼핑백에 담아 자신에게 전달 그리고 자신은 이를 국정원 기조실장에 전달해 청와대까지 흘러들어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특수활동비 지출에 관한 증빙 자료로 기조실장으로부터 간단히 금액과 영수한 흔적이 기재된 수령증을 받게 되는데, 그 용처에 대해서는 전혀 제시돼 있지 않았다.

또 특수활동비가 청와대에 전달된다는 사실을 국정원 내부의 소수 인원만이 알고 있었고, 그 전달 역시 골목길 또는 차 안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다수였다.

이들이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의 직무에 대한 부정한 대가나 기대의 의미로 특수활동비를 상납했다는 의심이 강하게 들 수밖에 없는 대목이며, 그만큼 뇌물공여 및 업무상 횡령죄 등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대통령의 통치행위를 존중하기 위해 특수활동비 사용처에 대한 확인 의무까지 져버렸다는 주장에 국정원 예산의 고유성까지 무시하는 발언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사진은 국가정보원 건물. (사진=연합)
검찰은 남재준 전 원장 등이 국정원장을 국가 회계처리 직원으로 볼 수 없어 국고손실죄를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강력히 반박하고 있다.

회계직원책임법 제2조 제1항의 ‘카. 그 밖에 국가의 회계사무를 처리하는 사람’에서 국정원장을 포함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무엇보다 국정원 예산회계사무처리 규정에 따르면, 국정원장 역시 예산회계사무 등에 관여할 수 있고, 국정원장이 특별사업비 집행을 요구하면 기조실장이 이를 준비하고 결제 뒤 원장에 보고하는 등 원장의 지시에 따라 모든 과정을 진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정원장도 국가 회계처리 사무를 담당하는 관계자로 보기 충분하다는 설명이다.

향후 이 사건과 관련해 치열한 법정공방을 예고하고 있지만, 이들 전직 국정원 사람들의 주장이 벌써부터 크게 설득력을 잃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민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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