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지침에는 ‘직접고용’이 원칙…공공기관은 ‘자회사 간접고용’ 치우쳐

소방훈련을 받고 있는 IBK기업은행 경비직군 및 시설관리직군 노동자들과 이를 지켜보고 있는 IBK기업은행 정규직 직원들.(사진=공공연대노조)

강민경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선언한 지 1년이 지났다. 하지만 노동계에선 공공기관들이 비정규직 직원들에게 ‘자회사 간접고용’ 방식을 강요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이른바 ‘무늬만 정규직’을 통해 표면적으로 비정규직 비율을 일단 낮춰 보려는 심산이란 지적이다. 직접고용 및 간접고용에 대한 노-사간 협의가 평행선을 달리는 상황인 가운데 최근 ‘생명ㆍ안전 업무’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해당 업무에 대한 개념적 범위를 둘러싸고 노사가 팽팽히 맞서는 이유는 정부 가이드라인 내에 ‘생명∙안전 업무를 맡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직접고용이 원칙’이라는 문구가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 20일 정부가 배포한 가이드라인(‘공공부문 비정규직 근로자 정규직 전환 추진계획’)에 따르면, 생명∙안전 업무는 직접고용이 원칙이다. 해당 문서에는 ‘국민의 생명∙안전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업무에 비정규직을 사용할 경우 업무 집중도, 책임의식 저하로 사고 발생의 우려가 있으므로 직접고용이 원칙’이라고 적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공공기관 사측은 해당 업무 수행 노동자들에 대한 직접고용은 불가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내세우는 명분은 ‘다만, 생명∙안전 업무의 판단 기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으로 생명∙안전 업무의 구체적 범위는 기관별 노사 및 전문가 협의, 다른 기관의 사례, 업무 특성 등을 참조하여 기관에서 결정하라’는 문구에 있다.

그러나 노동자 측도 이에 대한 재반박이 가능하다. 노동자 측은 “사측이 유리하게 해석하는 해당 문구의 하단 문구에 또 다시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산업안전보건관리자, 폭발물∙화학물질 처리업무, 국가 주요시설 소방업무 등은 생명∙안전 업무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적힌 문구에서 정부가 생명‧안전 업무에 대한 대략의 틀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인천공항공사 사례가 공공기관들의 벤치마킹 모델

인천공항공사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정책의 시금석으로 꼽힌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3일째인 지난해 5월 12일 인천공항공사를 찾았다. 이날 문 대통령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를 선언했고, 정일영 인천공항공사 사장은 ‘비정규직 1만여명을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화답했다.

이어 지난해 8월 31일 노사전(노동자ㆍ사용자ㆍ전문가) 협의회 공식 출범 이후 본회의 10여차례와 실무자 회의 17차례 등 계속된 회의에도 불구하고 정규직 전환 방식에 대한 노사 간 의견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공청회 및 연구용역 등을 통해 협상의 물꼬가 터지면서 지난해 12월 26일 정규직 전환이 극적으로 합의됐다.

인천공항공사 노사는 ‘자회사 설립 후 간접고용 병행’에 뜻을 함께 했다. 이에 따라 모회사 직접고용 3000여명, 자회사(2개 별도회사) 간접고용 7000여명이 전환 대상으로 결정됐다. 직접고용 대상은 가이드라인의 ‘생명‧안전 업무’에 따라 소방대‧야생동물통제‧보안검색‧보안경비 등으로 정해졌다.

지난해 12월 26일 '인천공항 정규직 전환방안' 발표행사에서 정일영 인천공항공사 사장(오른쪽)과 박대성 공공운수노조 인천공항지역지부장이 합의서에 서명한 후 손을 맞잡고 있다.(사진=연합)

성공적으로 평가되는 인천공항공사의 정규직 전환 사례에서도, 노사 협의 초반엔 생명∙안전 업무에 대한 의견 충돌이 상당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비정규직 직원 1만여명 전체가 생명∙안전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비정규직 노조 측의 입장과 직접고용에 대한 부담을 느낀 사측의 입장이 서로 부딪쳤다는 것이다. 직접고용과 간접고용의 비율을 3:7로 합의했던 배경으로는 양측이 입장 차이로 진통을 겪던 당시, 연구용역 기관이었던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가장 합리적인 방안으로 해당 수치를 제시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재영 공공운수노조 인천공항지역지부 대변인은 “애초에 생명∙안전 업무 및 직군이라는 개념 자체가 모호하고 노사 입장에 따라 자의적이기 때문에 문제가 많았다”며 “인천공항공사의 사례는 이를 바라보고 있던 853개 공공기관에 최소한의 기준으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봤다”고 밝혔다.

노사간 협의 과정에서 인천공항공사 사례를 적용하는 다수의 공공기관 가운데서도 IBK기업은행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기업은행 정규직 전환 대상자는 6개 직군 2000여명 규모다. 노동계에 따르면, 이는 853개 공공기관 중 상위 20% 이내에 해당하며 공공금융기관 7개 중에서는 가장 크다.

현재 기업은행 측은 별도의 연구용역 및 공청회 절차 없이 인천공항 사례를 적용해 ‘자회사로의 간접고용’을 내세우고 있다. 최근엔 비정규직(용역업체 소속) 노조 측이 생명∙안전 업무에 대한 안건을 제시한 바 있다. 기업은행 비정규직 노조 측은 “6개 직군 중 경비직군과 시설관리직군은 생명∙안전 업무를 시행하고 있어 직접고용의 대상”이라고 주장하지만, 기업은행 측은 “경비직군과 시설관리직군 모두 생명∙안전 업무를 수행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맞서고 있다.

기업은행, 생명∙안전 업무에 대해 ‘노사 견해 차’

기업은행 비정규직 노조 측은 크게 반발했다. 비상사태 및 응급상황 발생 시 초동조치를 비롯한 응급처치를 모두 담당하고, 일부 인원은 위험물 관리 업무를 평소에 도맡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

기업은행 경비직군 및 시설관리직군 노동자들은 매년 1회 ‘소방훈련’을 받는다. 기업은행 사측의 지시하에 두 직군 노동자들은 긴급초동조치조∙화재진압조∙응급처치조∙이송조 등 4개 조로 구성되며 훈련은 각 조별로 실시된다. 이들은 또 국가비상사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종합적 비상대비 업무를 수행하는 ‘을지연습’에도 참여한다.

특히 경비직군 노동자들은 비상사태 발생 시 ‘초동조치조 편성표’에 따라 비상사태에 투입된다. 본지가 입수한 문서에 따르면, 해당 표는 직급ㆍ근무지ㆍ투입장소∙임무 등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근무지 위치에 따라 비상사태 시 투입될 장소와 임무가 각각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로비 남쪽에 있는 경비원이 환자 발생 장소에 가서 긴급구조를 하라’, ‘지하 2층 동편에 있는 경비원이 14층 계단으로 가서 안내 및 유도를 하라’ 등이다.

실제 경비직군 노동자들은 화재 혹은 응급환자 발생 시 초동조치 및 응급처치 등의 업무를 해오고 있다. 2010년 기업은행 본점 로비 화재 진압, 2014년 및 2016년 응급환자 조치 등이 이에 해당된다.

배재환 기업은행 근로자대표단 간사(경비직군 대표ㆍ공공연대 서울경기지부 기업은행지회장)는 “화재가 발생하면 경비직군 노동자들은 대피를 하지 않고 사람들의 대피를 돕거나 화재를 진압하거나 환자들을 이송하는 등의 업무를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며 “또 은행 강도 사고를 대비해 기본적으로 완전무장을 하고 경비업무를 보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생명∙안전 업무가 아니면 어떠한 것이 생명∙안전 업무인가”라고 반문했다.

시설관리직군 노동자들의 경우엔 소방훈련 이외에도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통해 직접고용 대상자로 분류한 ‘폭발물ㆍ화학물질 처리업무’를 기본적으로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직접고용이 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현재 기업은행 본점에는 위험물안전관리자∙소방안전관리자∙전기안전관리자 등이 상주하고 있다.

김웅 전국시설관리노동조합 서울경기본부장(시설관리직군 대표)는 “평소에도 위험물을 관리하고 있을뿐더러 화재 발생 시 정도가 심각할 때는 시설관리직군 노동자가 방화복을 입고 화재를 진화해야 한다”며 “사측이 생명∙안전 업무를 의도적으로 좁게 해석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기업은행 측에 생명∙안전 업무에 대한 사측 기준과 입장 등에 대해 문의했으나, 기업은행 측은 “답변하기 힘들다”며 말을 아꼈다.

산업은행은 경비‧시설관리직군 정규직화 무산 위기

산업은행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다. 산업은행은 현재 4개 직군 509명의 비정규직에 대한 정규직 전환을 추진 중이다. 산업은행 비정규직 노조 측에 따르면, 과거 노사전 협의 과정에서 경비직군 및 시설관리직군에 대한 직접고용이 논의됐으나 사측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다.

당시 비정규직 노조 측은 시설관리직군 내 방재실 근무 노동자를 예로 들며 생명∙안전 업무에 대해 강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산업은행 방재실 근무 노동자는 방화관리자(산업은행 소속 직원)를 보조하는 업무를 전담한다. 따라서 이들의 주요 업무는 방화 보조이며, 화재 대비 시설 감시∙감독 및 초기 진압 등이 해당된다. 방재실 근무 노동자는 이러한 업무 수행을 위해 소방교육 및 훈련 등을 매달 1회씩 받는다.

비정규직 노조 측은 이 같은 업무 수행을 언급하며 경비직군 및 시설관리직군이 생명∙안전 업무 수행에 해당된다고 주장했지만, 산업은행 사측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맞섰던 것으로 확인된다.

남용진 공공운수노조 산업은행분회장은 “생명∙안전 업무를 수행하는 직군의 경우엔 직접고용이 원칙이라고 주장했지만 산업은행 사측이 ‘이는 생명ㆍ안전 업무가 아니다’라고 밀어붙여서 흐지부지됐다”며 “그때가 협상 초기였는데 협의기구 자체가 ‘기울어진 운동장’이어서 관철시키기 어려웠으나 다시 안건으로 제시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산업은행 비정규직 노조 측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산업은행에 문의했지만 해당 관계자는 “사실관계 확인 후 답변을 주겠다”는 말만 남겼다.

전문가들은 가이드라인 지침을 회피하는 공공기관 사측의 태도를 지적하고 나섰다. 김세진 한국비정규직노동센터 정책국장은 “생명ㆍ안전 관리 업무 노동자는 직접고용 우선 대상자”라며 “관련 교육을 받고 있다면 명칭이 어떻든 해당 직군으로 봐도 무방하며, 가이드라인에 그러한 문구가 적혀 있는 것은 법적 효력은 없지만 최우선으로 지키라는 지침인데 변명을 붙여가며 무시하는 것은 큰 문제”라고 강조했다.

일각에서는 “인천공항공사 사례를 왜곡하며 눈치를 보는 등 꼼수를 부리는 공공기관이 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또 자회사로의 간접고용이 만연한 상황을 수수방관하고 있는 정부의 대처도 미흡하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한재영 공공운수노조 인천공항지역지부 대변인은 “현재 비정규직 노조의 목소리가 현저히 작은 상황에서 인천공항공사의 사례가 아전인수 격으로 사측에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며 “간접고용 폐해를 줄이기 위한 인천공항공사의 자회사-모회사 간 공동협의기구 설립 등은 쏙 빼고 ‘인천공항공사도 간접고용 7000여명 만들었으니 우리도 간접고용으로 가야 한다’고 왜곡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상돈 바른미래당 의원은 “수많은 공공기관의 고용환경은 사정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모든 공공기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이 비현실적일 수도 있다”며 “사정이 그러하다면 각 기관의 성격과 실정을 고려해서 정규직화를 유연하게 추진해야 하는데 정부는 공공기관 협의기구에서 자회사 간접고용이 난무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추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의원은 또 “자회사 설립을 통해서 비정규직 문제를 해소하려는 정부의 방침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에 해당 문제를 오는 국정감사에서 따져보겠다”고 덧붙였다.


강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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