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낙태죄는 여성 자기결정권에 대한 과도한 침해
“직장생활 및 경제적 여건 등도 낙태의 원인 될 수 있어”

한국 사회가 66년 만에 낙태죄와 이별을 고했다. 1953년 제정된 낙태죄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위헌’ 결정을 내렸다. 낙태 자체만을 두고 더 이상 죄로 봐선 안 된다는 뜻이다. 갖은 논란에도 견고함을 보였던 사회적 가치관이 바뀌었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관계자들이 환호하고 있다.

헌재 “낙태죄, 임산부의 자기결정권 침해해…22주까지는 허용해야”

헌법재판소는 지난 11일 지금의 낙태죄는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2012년 합헌 결정 후 7년 만에 결론이 뒤집힌 셈이다. 이번 결정으로 현행 낙태죄의 개정 법안이 만들어질 예정이다. 국회는 개정안을 2020년까지 마련해야 한다. 해당 법안이 만들어지지 않더라도 지금의 낙태죄는 그 시기부로 효력을 상실한다.

산부인과 의사 정모씨의 헌법소원심판 청구로 진행된 해당 재판에서 헌재는 7대 2의 의견으로 이 같이 결정했다. 낙태죄를 위헌으로 본 재판관 7명 중 4명은 헌법불합치, 3명은 단순위헌 의견을 냈는데 다수의견을 따라 ‘헌법불합치’가 결정으로 내려졌다.

헌법불합치는 법률이 사실상 위헌이지만 바로 법을 없앨 시 사회적 혼란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법 개정 등이 이뤄질 때까지 법률을 일시 존속시키는 결정이다. 헌재는 2020년 12월 31일까지를 낙태죄 관련 법조항의 개정 기간으로 설정했다.

이 같은 결정은 현행 낙태죄가 임산부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헌재는 임산부가 경제적·사회적 상황 등을 스스로 따져보고, 각종 정보를 수집한 다음 숙고하고도 아이를 낳을 수 없겠단 판단이 들면 이는 마땅히 존중해야 한다고 봤다.

유남석, 서기석, 이선애, 이영진 재판관이 헌법불합치 의견을 냈다. 4명의 재판관들은 형법 제 269조 1항(낙태 여성 처벌), 270조 1항(낙태 시술 의료진 처벌) 모두 헌법과 맞지 않다고 판단했다. 유남석 헌재소장은 “두 형법은 헌법에 합치되지 아니하므로 관련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이번 결정이 낙태의 무조건 허용을 뜻하지는 않는다. 헌재는 낙태가 가능한 기준점을 임신 22주로 제시했다. 임신 22주까지만 낙태할 수 있고, 이 기간을 넘어서면 불가하다는 것이다. 이는 태아가 헌법상 생명권을 지닌 주체임을 부정해선 안 된다는 의미다.

22주가 기준으로 설정된 이유는 태아가 혼자 살아남을 수 있는 기간이 이와 같다는 의학적 분석 때문이다. 헌법불합치 의견을 낸 재판관들은 “산부인과와 학계에 따르면 현 시대 기준 최선의 의료기술 등이 따라줄 때 태아는 마지막 생리기간의 첫날부터 기산해 22주 내외부터 독자적인 생존이 가능하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참고로 이 대목에서는 위헌 의견을 낸 재판관 사이에서도 이견이 나왔다. 단순위헌 의견을 낸 재판관들은 '안전한 낙태'가 가능한 기간을 들어 14주를 제시했다. 이석태, 이은애, 김기영 재판관은 FIGO(국제산부인과학회) 연구 결과를 인용하며 “14주 시기에 적절히 수행된 낙태는 만삭 분만보다도 안전하다”면서 “그 이후의 낙태는 수술방법은 그 이전보다 복잡하다”고 밝혔다.

‘모자보건법 쟁점’ 사회적 가치관 변화가 뒤집은 66년 역사

조용호, 이종석 재판관은 인간의 존엄성을 내세워 합헌 의견을 냈다. 두 재판관은 “인간의 생명적 가치는 이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며 “이는 존엄한 인간 존재의 근원으로서 태아와 출생한 사람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다"라고 밝혔다.

합헌 의견을 낸 두 재판관은 모자보건법을 강조하기도 했다. 낙태죄와 관련해 해당 법이 일종의 예외조항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지금의 낙태죄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고만은 볼 수 없다는 게 요지다.

모자보건법은 5가지 경우에 한해 낙태를 허용한다. 임신 24주 이내의 임산부 중 △본인 및 배우자가 우생학적 유전학적 정신질환 혹은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본인 및 배우자가 전염성 질환을 앓는 경우 △(준)강간에 따른 임신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인척간 임신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가 낙태 허용 조건이다.

모자보건법은 이번 재판에서 주요 쟁점 중 하나였다. 합헌 의견을 낸 재판관들의 입장에 대해 위헌 의견을 낸 재판관들은 이 법안이 여성의 ‘법적 책임을 면제’할 뿐 여성에게 ‘자기결정권’을 부여하지 못한다면서 시각차를 드러냈다.

낙태죄의 위헌 결정은 최근 한국사회의 가치관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바뀌었는지를 보여준 단면이다. 낙태죄는 법으로 제정된 이래 66년의 시간 동안 여러 논란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인명 경시 풍조가 확산할 우려가 있다”는 등의 이유로 합헌 결정이 내려진 때가 불과 7년 전이다.

6.25전쟁 직후인 1953년 9월 형법으로 제정된 낙태죄는 탄생과 함께 갈등의 역사를 썼다. 제정 당시부터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인구가 4000만명 이상은 돼야 한다”는 주장에 더욱 힘이 실렸고, 그렇게 낙태죄는 현재까지 유지돼 왔다.

1973년 출산억제 차원에서 모자보건법이 제정됐지만 이 역시 시끄러운 문제였다. 제정 후 낙태 허용 사유 범위 확대를 골자로 한 개정안이 다수 발의됐다. 대표적으로 1976년에는 사회·경제적 사유, 1983년에는 비혼 여성 및 영세민 가구, 1985년에는 비혼 등을 낙태 허용 범위에 포함해야 한다는 법이 발의됐다. 물론 실현되지는 못했다.

이런 측면에서 헌재의 이번 결정은 1976년 발의된 모자보건법 개정안과 결이 같다. 학업이나 직장생활 및 경제적 여건 등이 낙태를 허용할 다양하고 광범위한 이유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결정이 논란의 종지부를 찍었다고 볼 수는 없다. 종교계를 포함한 사회 각계에서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어서다.

주현웅 기자



한국아이닷컴 주현웅기자 chesco12@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