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헌재의 합헌 결정 배경

[주간한국 주현웅 기자] 헌법재판소가 진실을 밝히는 행위도 죄가 될 수 있다고 최근 결정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달 25일 열린 ‘형법 제307조 1항’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에서 헌재는 재판관 5대 4의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이 형법은 “공연히 사실을 적시해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명시했다. 이른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로 불린다.
그러나 헌재의 이번 결정에 따른 후폭풍은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법조계와 시민사회는 이번 결정에 유감을 드러내며 후속 대응을 예고하고 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미투'(#MeToo) 운동의 여파에 따른 피해자의 폭로는 물론 소비자들의 각종 고발 등이 형사처벌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위헌 논란이 이어졌다.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아빠들의 신상을 공개하면서 최근 논란이 된 '배드파더스'(bad fathers·나쁜 아빠들) 사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적 약자의 표현을 위축시킨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기도 했다.(본지 2020년 10월 19일 보도/“진실 밝히려다 형사처벌 받을 수도…”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 목소리 커져)
헌재가 합헌을 결정한 배경은 ‘개인의 인격권’이 '표현의 자유'보다 사실상 우선한다는 이유다. 디지털 기술이 고도로 발전함에 따라 타인에 대한 사실적시로 명예를 훼손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는 점을 헌재는 특히 강조했다. 하지만 이는 재차 반론에 부딪히고 있다. 상호작용을 특징으로 한 디지털 환경은 피해자들에게도 발언의 권리를 평등하게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다양한 논란들이 팽팽히 맞서면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에 관한 사회적 논의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현실적 상황 비중 있게 고려한 헌재
“매체 다양해져…체면 중시하는 풍토”
헌법재판소 대심판정.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위헌 여부가 나오기까지는 약 4년이 소요됐다. 앞서 시민 A씨는 2017년 모 수의사의 부당진료 행위를 의심해 이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게재하려다가 사실적시 명예훼손에 대한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그는 수의사의 부당진료 행위를 사실 그대로 밝히더라도, 사실적시 명예훼손에 해당될 것이 우려돼 헌법으로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는 근거를 들었다.
결과적으로 헌재는 A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의 가치'보다 '인격의 가치'가 우선이라는 논리가 주요하게 작용했다. 결정문은 “사실을 적시했더라도 명예훼손적 표현행위가 공연히 이루어지는 이상 개인 인격의 의미를 떨어트리고, 회복불능의 상황으로 몰아갈 위험성이 있다”며 ”최근에는 명예훼손적 표현의 유통 경로도 다양해져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형사처벌하지 않는 점에 국민적 합의나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헌재의 결정문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오늘날 사회의 ‘현실’을 비중 있게 고려했다는 점이다. 헌재는 “사실적시의 매체가 매우 다양해졌다”며 “그에 따라 명예훼손적 표현의 전파속도와 파급효과도 광범위해지고 있다”고 바라봤다. 그러면서 “일단 훼손되면 완전한 회복이 쉽지 않다는 게 외적명예의 특성”이라며 “명예와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명예훼손적 표현행위로 피해를 입은 개인이 자살 등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례도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당초 이번 헌법소원의 핵심 쟁점은 ‘개인의 인격권(명예)’과 ‘표현의 자유’ 중 무엇을 우선할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일단 헌재는 개인의 인격권에 무게 추를 단 결정을 내렸다는 분석이다. 헌재는 “표현의 자유와 인격권의 우열은 쉽게 단정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면서 “그렇더라도, 우리 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사실적시를 통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표현행위를 규제함으로써 인격권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포기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해당 법 폐지에 대한 국민적 합의와 공감대가 미흡하다는 점도 헌재의 인식이다. 헌재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비범죄화하려면 개개인이 표현의 자유의 무게를 충분히 인식하고, 그 결과에 대해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한다는 분위기가 성숙되어야 한다”며 명예훼손죄로 기소돼 처벌되는 사례가 증가하는 등의 상황을 적시했다.
찬반의 공통분모는 ‘사생활 침해 방지’
“공익 목적 사실적시, 국회가 못 박아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사단법인 두루 등의 관계자들은 지난해 기자회견을 열고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에 대한 위헌 결정을 촉구했다.
이런 사유로 헌재가 합헌 결정을 내렸지만 관련 논란은 지속될 전망이다. 법조계와 시민사회에서는 헌재 결정에서 4인의 위헌 의견이 따랐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9명의 재판관(유남석·이선애·이석태·이은애·이종석·이영진·김기영·문형배·이미선 재판관) 중 위헌 의견을 낸 4명(유남석·이석태·김기영·문형배 재판관)은 “감시와 비판의 객체여야 할 국가·공직자가 국민의 진실한 사실적시에 대한 형사처벌의 주체가 되면 건전한 감시와 비판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이들 재판관은 또 “원칙적으로 어떤 표현행위에 대해서는 다른 표현행위로 이에 대응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합헌 결정의 근거대로 매체와 정보통신망이 다양해진 것은 사실이나, 이 같은 디지털 환경은 개방성과 상호 작용성이 특징이므로, 피해자들 역시 반박표현을 개진하는 등의 방법으로 사실적시 표현에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목되는 대목은 위헌 의견 역시 현실적 상황을 고려했다는 점이다. 다만 합헌결정이 디지털 매체 다양화와 명예를 중시하는 풍토 등 사회 전반을 살핀 것과 달리, 위헌 의견은 사법 현실에 무게를 뒀다. 4인의 재판관은 “형법 제310조는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 처벌하지 않는다고 규정한다”며 “하지만 표현행위로 인해 수사 및 재판절차에 회부될 수 있고, 공익성 입증의 불확실성을 고려하면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일각에서는 국회가 나설 것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공익 목적’을 바탕에 둔 사실적시가 가능한 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 캠페인을 벌여온 사단법인 오픈넷은 “헌재의 다수의견과 소수의견에서 공통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게 있다”며 “해당 조항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진실한 사실이더라도 개인이 숨기고 싶은 병력·성적지향·가정사 등 사생활의 비밀을 공개하는 행위 처벌이란 점”이라고 바라봤다.
오픈넷은 그러면서 “이제 공은 국회로 넘어왔다”며 “국회가 헌재의 유력한 위헌 의견과 국제사회의 권고를 반영해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하고 공익적 목적 없이 타인의 사생활의 비밀을 침해하는 사실을 공개한 경우에만 처벌하는 보완 입법을 통해 사실적시 명예훼손의 폐해를 시정해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앞서 유엔(UN)인권위원회는 지난 2011년 3월 21일 한국에 사실적시 명예훼손 폐지를 권고한 바 있다.




주현웅 기자 chesco12@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