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소비 중시하는 소비자 중심으로 ‘탈퇴운동’ 확산

뼈대 드러낸 쿠팡 덕평물류센터. (사진=연합뉴스 제공)
[주간한국 송철호 기자] 쿠팡의 경기도 이천 덕평물류센터에서 지난 17일 발생한 화재가 6일 만에 완전히 진화됐다. 소방당국이 지난 22일 오후 4시 12분경 잔불 정리 작업을 완료하고 완전 진화를 선언한 것이다. 화재 당시 쿠팡 직원들은 모두 대피했지만 안타깝게도 경기 광주소방서 119 구조대 김동식 구조대장이 화재가 확산될 때 미처 나오지 못하고 숨진 채 발견됐다.

아직 재산 피해가 집계되지는 않았지만 쿠팡 덕평물류센터가 가입한 재산종합보험의 보험 가입금액이 4015억 원에 달하는 점을 감안하면 피해액이 수천억 원대에 이를 것이라는 보험업계의 분석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쿠팡은 화재로 입은 재산 피해를 걱정할 상황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잘 나가는 줄만 알았던 쿠팡의 민낯이 이번 화재로 크게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화재 계기로 소비자 분노 한꺼번에 터져…MZ세대가 주도

쿠팡은 지난해 매출액 13조9235억 원으로 이커머스 업계 1위를 달리고 있다. 특히 설립 이후 쿠팡의 로켓배송, 새벽배송, 당일배송, 로켓와우 멤버십 서비스, 쿠페이 원터치 결제 서비스 등은 유통업계에 혁신의 바람을 일으켰던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미국 증시 상장 이후 5조 원의 실탄을 확보한 쿠팡은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해외 진출 등 공격적인 투자를 이어가는 중이다.

분명 쿠팡은 업계를 선도하는 기업이다. 하지만 이번 물류센터 화재 사고로 드러난 쿠팡의 안전 불감증과 화재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부각됐던 열악한 노동자 처우 논란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로 부각됐다.

실제로 화재가 발생한 이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쿠팡을 탈퇴하겠다는 소비자들 분노가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 주로 MZ세대(밀레니얼+Z세대)를 중심으로 한 젊은 세대들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양새다.

쿠팡 서비스를 애용하던 정모(39세) 씨는 “이렇게 큰 기업에서 재난시스템 등이 여러모로 엉망인 점에 크게 실망했다”며 “기업이 클수록 위기상황에 대한 대응은 좀 더 체계적일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어 “쿠팡 탈퇴 후 기존의 소비습관에 대해 한 번 더 되돌아보게 됐다”며 “애플리케이션(앱)에서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소비해왔던 나쁜 습관에 대해 반성하고 앞으로도 이런 습관을 고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특히 가치 소비를 중시하는 MZ세대를 중심으로 쿠팡 불매운동이 번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리서치의 자체 ‘여론 속의 여론’팀이 지난해 8월 14~17일 전국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착한 소비에 관한 인식 및 실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1000명 중 62%는 ‘법을 위반하거나 사회적 피해를 미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영향을 고려해 소비해야 한다’고 답변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반적인 소비 행태에 큰 변화가 포착되고 있는 것이다.

유통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번 화재가 계기가 됐지만 쿠팡 탈퇴 움직임은 쿠팡의 기존 행보와도 무관하지 않다”며 “특히 기존에도 수시로 터져 나왔던 쿠팡 배송기사의 열악한 노동환경 문제에 이번 화재에서도 공개된 물류센터의 구조적 노동환경 문제까지 더해져 소비자의 분노가 한꺼번에 터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실 쿠팡의 노동환경 문제는 그 이전부터도 논란이 이어져온 이슈였다. 공공운수노조 전국물류센터지부 쿠팡물류센터지회에 따르면 지난해 5월부터 1년 간 쿠팡 물류센터에서 사망한 노동자는 모두 9명에 달한다. 또 지난해에는 쿠팡이 집단감염에 취약한 작업장 환경을 방치했다는 문제도 제기됐다. 당시 쿠팡 부천 물류센터에서는 노동자 84명과 가족·관계자 68명 등 모두 152명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에 집단 감염된 바 있다.

이미 남양유업의 ‘갑질 논란’과 GS리테일의 ‘남혐 논란’ 등 유통기업을 대상으로 한 소비자 운동의 강도가 점차 커지고 있다. 흔히 제품과 서비스로 승부하면 된다는 말은 최근에는 통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글로벌 기업들이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에 주력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성장에 집착해왔던 쿠팡이 놓치고 있던 지점에서 누적된 불만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셈이다.

쿠팡 창업자 김범석 사임…중대재해처벌법 회피 논란

정부도 유통 혁신의 근간으로 근로자 안전 확보 등 ESG 경영을 강조하고 있다. 최근 유통업계와 소비자들의 충돌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을 우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23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제1회 디지털 유통대전’에서도 이 부분이 부각됐다. 이번 전시회에는 쿠팡 등 주요 유통기업들이 부스를 열고 참가했다.

박진규 산업통산자원부 차관은 이날 개막 행사에서 “최근 비대면 온라인 소비가 급격히 늘어나자 배송 물류 현장에서 크고 작은 사고들이 발생하고 있다”며 “매우 안타깝고 유사 사고가 반복돼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박 차관은 이어 “유통의 진정한 혁신은 혁신적인 서비스뿐만 아니라 근로자의 안전과 보건, 소비자 보호와 친환경”이라며 “모든 산업은 안전·환경 등이 함께 가야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에 ESG가 앞으로 유통업계가 가야 할 길”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17일 쿠팡 덕평물류센터 화재 당일 쿠팡 창업자인 김범석 의장이 국내 법인의장과 등기이사직에서 사임한 것도 큰 논란이 되고 있다. 내년부터 시행되는 중대재해처벌법을 피하려는 꼼수가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면 사업장에서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사업주나 경영책임자가 주의의무를 다하지 않은 경우 1년 이상 징역 또는 10억 원 이하 벌금을 내야 한다.

순직한 김 구조대장을 일제히 애도하고 있는 정치권도 김 전 의장의 사임에 유감을 표하고 있다. 특히 오현주 정의당 대변인은 논평에서 “1994년 소방 일을 시작해 27년 간 베테랑 소방관으로 일해온 김 구조대장의 죽음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며 “쿠팡 화재 발생 후 5시간 만에 사과 한마디 없이 무책임하게 쿠팡 이사회 의장직에서 사퇴한 김 전 의장에 대해 별도의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김 전 의장이 쿠팡 등기이사에서 사임한 것은 지난달 31일이다. 다만 사임 발표는 이번 달 14일 주주총회 이후인 17일 오전 11시 이뤄졌다. 공교롭게도 화재 발생 5시간만이다.

쿠팡 측은 “김 전 의장의 사임은 지난달 말 이사회에서 확정된 사안으로 화재 당일 이 사실을 공개한 것은 초기 진압에 성공한 상황이어서 불이 다시 커질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면서 김 전 의장 사임과 이번 화재는 무관하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오얏나무 아래서 갓 끈을 고쳐 맨 오해를 산 격이지만 그 배경에는 쿠팡의 안전 불감증과 위기관리 시스템의 부재가 작용한 것이다.

유통업계의 한 관계자는 “아직 구체적인 법안 적용 사례가 없는 탓에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전까지 산업계에 진통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며 “김 전 의장도 현재 대표이사는 사임한 상태이지만 실질적으로 회사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로 해석하면 처벌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와 경제민주화실현전국네트워크, 전국가맹점주협의회 등의 회원들이 지난 22일 오전 서울 송파구 쿠팡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쿠팡이츠 등을 규탄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열악한 물류환경 이어 점주들 고충 문제도 부각

사실 소비자와 정치권에서 쿠팡에 대한 비난이 이어지고 있지만 역시 피해자는 해당 노동자들과 관련 업주들이다. 또 이러한 문제는 쿠팡만의 문제가 아니다. 배송 전쟁을 벌이는 유통과 물류업계 전반에 만연한 문제가 쿠팡의 화재로 더 크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류호정 정의당 의원은 “하루 최대 170만개 상품을 출고하는 로켓배송, 새벽배송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일하는 배송현장”이라며 “업계의 수많은 비정규 노동자가 계약해지를 당하고 정규직 노동자가 퇴사하는 실정”이라 밝혔다.

노동자들은 수시로 열악한 물류환경에 대한 개선을 호소하고 있지만 실상은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 대형 유통기업을 상대하는 관련 업계 점주들도 그동안 쌓인 불만을 이번 화재 사건을 계기로 한꺼번에 쏟아내고 있다.

참여연대와 전국가맹점주협의회 등은 지난 22일 서울 송파구 쿠팡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블랙컨슈머(악성 소비자)를 양산하는 현재의 배달앱 리뷰·별점 제도를 개선해 악성리뷰에 대한 삭제 및 블라인드 처리, 리뷰에 대한 점주의 댓글 작성 등 점주의 대응권 강화가 필요하다”고 규탄했다. 쿠팡이츠를 통해 음식을 주문한 소비자로부터 새우튀김 1개를 환불해달라는 압박에 시달린 점주가 사망한 사건과 관련된 집회였다.

실제로 배달앱의 리뷰와 별점은 메뉴와 음식점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보다. 점주 입장에서 리뷰와 별점에 따라 매장의 배달앱 내 노출 순위가 달라지는 등 매출과 직접 연결되기 때문에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최근 리뷰와 별점을 무기로 한 소비자의 과도한 요구, 허위 및 악의적인 후기 등으로 인한 점주 피해도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김종민 전국가맹점주협의회 사무국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 같은 문제를 개선키 위해 악성리뷰에 대한 삭제 및 블라인드 처리, 리뷰에 대한 점주의 댓글 작성 지원, 비공개 리뷰기능 지원, 배달품질과 음식품질에 대한 평가 분리 등 점주 대응권 강화가 필요하다”면서 “별점평가 제도에 객관적인 매장 평가 기준을 마련하고 환불 규정 정비 등의 가이드라인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쿠팡이츠는 입장문을 통해 “일부 이용자의 갑질과 무리한 환불요구, 악의적 리뷰 등으로 피해를 입은 점주 여러분께 적절한 지원을 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재발방지 조치를 발표했다.

입장문의 주요 내용은 ▲점주 보호를 위한 전담조직 신설 ▲점주 대상 전담 상담사 배치 ▲악성 리뷰에 대해 점주가 댓글을 달아 해명할 수 있는 기능과 블라인드 처리 기능 ▲음식 만족도와 배달 만족도의 분리 평가 기능 강화 등이다.

쿠팡 관계자는 이번 화재에 대해 “유가족들이 평생 걱정 없이 생활하실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지원을 하겠다”며 “장례 절차가 끝난 뒤 유족들과 협의를 통해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밖에 쿠팡은 순직 소방관 자녀를 위한 ‘김동식 소방령 장학기금’을 만들었다. 또 해당 물류센터에서 일하던 쿠팡 직원들에 대해 다른 물류센터로 순환 배치되기 전까지 급여를 지원할 계획이다.

일각에서는 쿠팡의 물류센터 화재와 관련한 차단 시스템과 매뉴얼 문제, 그리고 수시로 불거지는 노동환경과 관련해서는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지만 이후 대처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했다.

물류업계의 한 관계자는 “산재로 인정된 경우가 아니면 피해자 유족을 지원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상황에서 유족을 지원하는 쿠팡의 이번 대처는 이례적인 것이 사실”이라며 “특수노동자로 분류되는 경우 산업재해를 적용받기가 쉽지 않은데 실제로 30%에 미치지 못하는 택배 노동자 정도만 산재보험 적용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송철호 기자 song@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