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익빈' 상처 치유할 아름다운 몸짓들…나눔은 '플러스섬' 사회로 가는 첫걸음

[신년기획 나눔] "나눔 다음역은 사랑과 희망입니다"
'빈익빈' 상처 치유할 아름다운 몸짓들…나눔은 '플러스섬' 사회로 가는 첫걸음

자고 나면 수백억원의 돈이 ‘차떼기’로 오갔다는 소식이 꼬리를 무는 곳, 다른 한편에서는 적빈에 내몰린 자들의 동반 자살 행렬이 끊이지 않는 곳…. 빈익빈 부익부의 양상이 고삐 풀린 망아지가 돼 이른바 OECD 국가의 체신을 흐리는 곳이 21세기 한국이다.

널뛰기 하는 주택 가격, 부의 불균등 분배, 열악한 사회 보장 제도 등으로 그 같은 양상은 심화일로다. 최근 “최저 366만명에서 최고 743만명”을 한국 사회의 빈곤층 숫자로 결론 내린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분석은 점입가경이다.

사단법인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지난 12월26일 오후 7시 현재, 서울 시청앞 등지의 ‘사랑의 체감 온도탑’ 수치는 36.5도를 기록했다. 2003년 결산치다. 전반적 불경기가 그대로 반영돼 있다. 12월1일부터 시작된 연말연시 불우이웃돕기 성금 모금액이 현재 336억으로 당초 목표액 921억원의 3분의 1남짓이라는 집계다.

1년 전만 해도 일반인은 160억원을 기부했던 반면, 2003년이 되자 80억여원으로 크게 줄었다는 것. ARS 모금 역시 1년 전의 62%에 겨우 미치는 4억1,900만원에 불과했다. 1998년 이래 쭉 증가일로였던 연말 이웃돕기 성금 모금액이 전년에 비해 떨어지기는 올해가 처음이다.

신문 방송사의 이웃 돕기 성금, 고속도로 톨 게이트 모금, 사랑의 열매 판매금 등을 모두 합쳐 올해 목표액 677억원을 모두 채울 경우, 100도가 된다.

이웃과의 공동체적 연대감

나눈다는 것은 아래를 내려다 보는 게 아니다. 의인이 되고자 하는 몸짓도 아니다. 공동체적 연대감으로 이웃과 결합해 새로운 신뢰 관계로 진입하고자 하는 증표다. 연말연시, 제 갈 길만을 재촉하던 사람들이 옆을 돌아 보게 하는 여유다. 최근의 극심한 불황은 뜻밖에, 각성의 계기이기도 하다. 망년회 대신 봉사활동으로 한 해의 뒤끝을 깨끗이 마무리 하는 기업들이 그 징표다.

인근 온산 지역 농가에서 생산한 벼 9,000여 가마를 6억5,000만원에 사 들여 울산 지역의 불우 이웃을 돕는 데 사용하는 S-오일, 연말 격려금 등으로 받은 OK 캐쉬백 포인트(약 1,860만원 상당)를 12월26일 사회복지 공동모금회에 모두 기탁한 SK㈜는 나눔이 창출해 내는 무형의 가치를 새삼 생각하게 한다.

또 23일에는 삼성전자가 고아원과 독거 노인 등에게 사랑의 도시락을 전달했고, 같은 날 SKC는 정신지체 장애인의 재활 시설 ‘교남 소망의 집’ 원생과 교사 100여명과 함께 눈썰매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송년회를 대신했다.

교수들도 나눔의 대열에 참가, 각별한 세밑 풍경을 일궈 냈다. 박홍이 연세대 교수(물리학) 등 30명의 교수가 2003년 4월에 만든 ‘TOM(Three One’s Movement)’이 대표적이다. ‘한(one) 주일에, 한(one) 시간씩, 한(one) 사람을 위해 봉사하자’는 것.

이밖에 4년째 매년 연말마다 자선 전시회를 열어 수익금을 불우 이웃에게 전하는 예술인의 모임 ‘아트 미션’(대표 윤미란 홍익대 교수)의 송년 사업, 동남아 등지에서 온 유학생들을 위해 겨울옷 등 월동 장비를 모아 선물한 ‘유학생을 위한 겨울옷 나누기’ 등 이즈음 교수들이 조용하게 펼치는 활동도 온기를 머금고 있다.

가족해체 살풍경 녹일 온기

그러나 그것만으로 제 2의 IMF 한파를 견뎌내기에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내 식구만을 챙기는 식의 혈족연대감조차 옛말이 된 상태에서 사회보장제도가 채 자리 잡기도 전에 가족 해체가 진행되면서 한국은 곳곳에서 신음하고 있다. 무한 경쟁에서 밀려 난 자들은 변변한 설 자리조차 없다.

142만 2,890명. 우리나라의 장애인의 숫자에 관한 최신 통계치다. 소외자들의 기층이다. 2002년9월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전국 장애인 등록 현황’은 여러 장애 유형에 따른 수치도 밝혀 장애인 문제 접근에서 하나의 신기원을 이뤘다는 평가다. 그러나 1만~2만여명당 1명 정도의 비율로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진 희귀병 환자 가족들의 절절한 사연은 제대로 들어설 틈도 없다.

각종 장기에 심각한 장애를 유발하는 윌슨병, 각 장기들이 심각히 퇴행해 가는 뮤코 다당증 등 100여종의 희귀질환으로 고통 받고 있는 환자수는 2002년 말 현재 1만 1,469명. 2001년 이후 국가의 관리체제로 들어 온 희귀병은 만성신부전증, 근육병, 혈우병,다발성경화증 등 모두 8개 질환이다. 그러나 일부만 보험 적용되는 등 약값 대는 데만도 등골이 휠 정도다.

현재 희귀 질환에 대한 지원은 전체 의료비 지원의 0.002%. 2001년 226억, 2002년 220억, 2003년 263억 등으로 집계된다. 이 분야에 대해 2조원 정돛?예산을 쓰는 일본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한국 희귀ㆍ난치성질환연합회 심현민 회장은 “희귀병 환자에 대한 정부의 집계는 종합 병원 40곳에서 산출한 47만명이란 숫자에 훨씬 못 미친다”며 “대당 최소 400만~500만원은 나가는 전동 휠체어만 있어도 삶의 질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병고, 생활고, 가족고 등 3중고에 치인 삶은 자신을 주장하기에도 역부족이다.

이처럼 병고ㆍ생활고ㆍ가족고를 안고 살아가는 소외 계층에게 2004년은 하나의 원년이 된다. 지난해 말 한국사회복지 유권자 연맹을 주축으로 해 벌어진 ‘사회복지당(가칭) 창당 결의 대회’가 주축이다. 또 47개 장애인 단체 대표단 60여명은 ‘장애인 단체 총선 연대 출범식’을 갖고 “장애인의 진정한 시민권을 실현하는 데 2004년4월 제 17대 총선에서 총력을 다 할 것”을 결의했다.

정외택 복지연합신문사 편집국장은 “실업 증가, 빈부 격차 심화, 신빈곤층의 자살 행렬, 노인 인구 급증 등의 흐름속에서 시혜의 대상자로서 굴종의 삶을 살아야 했던 사회적 소외자들이 이제는 자기 목소리를 내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복지는 낭비’라는 식으로 복지예산안을 깎으려 드는 정부와 정치권의 행태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는 다짐이다. 이미 11월 25일 참여연대와 경실련 등 시민단체가 펼쳤던 ‘노무현 정부 보건복지정책토론회’ 의 결정 사항을 한 단계 더 밀고 가자는 것.

인간의 얼굴을 한 행위

불합리한 현실에 대해 공격의 언어로 대응했던 김지하 시인이 생명에 안착 했음을 알렸던 94년의 시집 ‘별밭을 우러르며’ 중의 ‘생명’이 주는 전언이 새삼스럽기만 한 때다.

‘생명/한 줄기 희망이다/캄캄 벼랑에 걸린 이 목숨/한 줄기 희망이다//돌이킬 수도/밀어붙일 수도 없는 이 자리//노랗게 쓰려져 버릴 수도/뿌리쳐 솟구칠 수도 없는/이 마지막 자리//어미가/새끼를 껴안고 울고 있다/생명의 슬픔/한 줄기 희망이다.’

나눔이란 무한 경쟁과 사이버 논리가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이 시대, 생명의 비원(悲願)에 가깝다. 무한 경쟁의 제로 섬 사회가 아닌, 인간의 얼굴을 한 플러스 섬의 사회로 나아가자는 첫 발걸음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찬란한 가능성이다. 참고로, 자선 행위의 빈도는 국가 신뢰 지수를 높이는 데 결정적 자료가 된다는 게 국제적 관례다. 앞으로 계속될 이웃들의 이야기는 그러므로 ‘세계속의 한국’을 가늠케 하는 지표도 될 것이다.

장병욱차장


입력시간 : 2004-01-02 16:44


장병욱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