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에 멍든 농한기 농촌

“마을에 노인네밖에 없고 읍내 놀러가 술내기로 시작한 것이…”

“뼈빠지게 농사 지어도 손해만 봐 자포자기 심정에…”

“불경기에 장사도 안 되고 한탕 생각에…”

“본전만 찾으면 그만 두려고 했는데…”

농한기가 끝나가는 농촌. 겨우내 도박에 멍든 농민 등이 뒤늦게 후회하며 내뱉는 한숨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다.

일부 농ㆍ어민과 영세상인들이 비닐하우스나 다방, 당구장, 식당, 펜션 등지에 모여 고스톱, 카드 도박판을 벌여 농산물 판매 대금을 날리거나 외지의 원정도박단에 속아 가산을 탕진했다는 이야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경찰청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도박 단속 건수 7,000여 건 중 군소도시와 농촌지역을 끼고 있는 지방의 건수가 2,800여 건으로 전체의 40%를 넘어서고 있다.

그러나 요즘 농촌에는 예전에 성행했던 포커게임이나 ‘도리짓고땡’ 같은 화투 도박뿐만 아니라 성인오락실을 비롯해 실내 낚시도박, 스크린 경마ㆍ경륜, 투견 등 각종 신종 도박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심지어 대도시 중심으로 성행하는 불법 카지노바까지 등장해 ‘한탕주의’를 부추기며 어수룩한 농심을 울리고 있다.

점점 도시화하는 도박 유형

경북지방경찰청이 지난달 농한기 도박사범 일제단속에서 적발한 안동의 사설 카지노바의 경우는 오피스텔을 개조해 만든 도박장에서 여고생 도우미까지 고용, 농촌 사람들을 끌어들여 4억원 대의 돈을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또 충남 홍성경찰서도 2월 7일 홍성 읍내에서 바카라, 블랙잭 게임테이블을 설치해 놓고 농촌지역 주민들 상대로 도박판을 벌여온 불법 카지노바를 적발했다.

이들 불법 카지노들은 농촌이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속이 느슨한 점을 이용해 농산물 판매 대금을 움켜쥐고 있는 농한기 농민들의 주머니를 노린 것이다.

또 경북 북부지역 농민들 사이에는 강원도 정선 카지노 원정바람까지 거세다. 중앙고속도로 개통 이후 정선의 카지노장 ‘강원랜드’와 불과 2시간 정도 거리가 된 봉화ㆍ영양ㆍ청송ㆍ안동의 일부 주민들은 마을 계모임 등을 핑계 삼아 관광버스를 빌려 카지노를 단체로 찾는 경우가 늘고 있다.

대부분 호기심으로 카지노 관광을 나섰지만 큰 돈을 잃고 ‘본전’ 생각에 발길을 끊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고 지역 주민들은 귀띔했다. 일부 마을은 반상회를 통해 주민들에게 카지노 출입 자제를 공개적으로 호소할 정도로 심각하다.

카지노로 인한 피해는 강원도 농촌도 예외는 아니다. 주민들의 도박 중독 사례가 점차 늘어 강원도는 속앓이를 하고 있지만 카지노 사업이 지역 경제의 활력소란 점에서 내놓고 비판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정선 영월 태백 삼척 등 폐광지역 4개 시ㆍ군의 주민은 카지노 출입이 한 달에 하루로 제한되어 있지만, 상대적으로 카지노 출입이 자유로운 다른 지역 주민들은 카지노에서 돈을 잃고 오도가도 못하게 된 ‘카지노 노숙자’로 전락하는 경우도 잦다는 소문이다.

일부 군에서는 주민과의 대화에서 “농한기에 카지노를 출입하며 큰 돈을 탕진한 군민이 있다”며 카지노 출입을 자제해 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원랜드’가 들어선 후 강원도에 번진 도박열풍은 카지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 평창경찰서의 한 경찰관이 지역신문에 기고한 내용을 살펴보면 상습 도박단들에 의한 지역 주민들의 피해가 상상 이상으로 극심하다.

이들 도박꾼들은 속칭 ‘잔펀치(하루 저녁의 판돈이 500만원)’라는 유형의 도박으로 여관방을 순회하며 장기간 상습적으로 소액 도박자금을 챙겨 많은 지역주민에게 피해를 입혔다.

사기 도박단의 폐해는 금전적 피해에 그치지 않았다. 억대의 도박금을 챙긴 도박꾼들은 흥청망청 돈을 뿌리며 지역의 부녀자들을 농락하기도 해 농촌가정까지 파괴하고 있다. 이로 인한 지역 주민의 원성은 드높다.

공주ㆍ연기는 원정 도박단의 표적

행정도시가 들어서는 충남의 공주ㆍ연기 지역도 토지 보상금을 노린 사기 도박꾼들이 원정와서 요즘 바짝 긴장하고 있다.

대전 지역의 신문들은 외지의 사기도박꾼이 들어와 주민들을 유혹, 수백만원씩 딴 뒤 사라지는 경우는 다반사라며 관할 자치단체와 경찰의 발빠른 대응을 촉구하고 있다.

충남 조치원경찰서 장승복 강력팀장은 “현재 지역 주민들 대부분이 토지보상금을 타가지 않은 상태 때문인지 아직 큰 도박사건은 없었지만, 곧 돈이 돌기 시작하면 각종 사기도박이 난무할 것”이라며 감시의 눈을 늦추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넷에서 도박 관련 사이트를 운영하는 K씨는 “굴이나 전복 양식을 하는 어촌이나 특용작물, 과일ㆍ채소 농사를 짓는 농촌의 경우는 1년 매출이 1억원을 훌쩍 넘는 경우가 많다”며 타짜들(전문도박꾼들)이 이런 곳을 노려 농한기에 집중 침투한다고 전했다.

이들은 사기 도박을 위해 사전 ‘설계(범행모의)’를 치밀하게 하기 때문에 한 번 덫에 걸리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이들 사기 도박단은 자금당담ㆍ유인책ㆍ선수 등으로 각자의 역할을 분담하고 대상을 선정한 뒤, 아는 사람을 통해 도박판으로 유인하는 수법으로 돈을 털어간다고 한다.

특히 이들이 동원하는 사기도박 수법은 특수 제작된 카드와 적외선 카메라 등을 활용, 바깥에서 카드를 읽은 뒤 이어폰을 낀 ‘선수’에게 상대방 카드 패를 알려주는 등 영화 속 장면을 방불케 한다는 것이다.

결국 농촌 지역의 사기 도박 피해자들은 자신이 당했다는 사실을 알 때는 이미 이들이 유유히 떠난 뒤가 대부분이다.

가정파탄 등 후유증 심각

전북 완주군의 야산 비닐하우스에서 상습도박을 벌이다 경찰의 단속에 걸린 농촌지역 여성들.

문제는 농촌지역의 도박은 단속이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도박단은 비닐하우스나 식당 등에 도박판을 벌여 농민들의 호주머니를 턴 뒤 수시로 장소를 옮겨 다니며 경찰의 추적을 교묘하게 피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사기 도박단의 피해자들 대부분이 ‘돈은 이미 잃었고 혹 마을에 소문나면 창피나 당할 것’이란 생각에 피해 신고를 꺼리기 때문이다.

또한 최근 신문의 독자투고란에는 문상객을 가장한 원정 도박단들 피해 사례도 심심찮게 올라온다.

초상집에서 도박판을 벌여도 주변에서는 으레 관행적인 행위로 묵인해 순식간에 문상 온 농민들의 호주머니를 털고 달아난다는 것이다. 경찰 단속의 사각지대를 노린 수법이다.

한편 도박이 남긴 후유증은 크다. 어렵사리 성사된 결혼이 파경으로 치닫는 경우도 적지 않다.

충남 논산의 한 마을은 재중동포와 결혼한 뒤 현재 이혼했거나 별거 중인 10여 명의 농촌 가정 중 거의 절반이 도박 빚과 그에 따른 음주가 원인이라는 것.

잘 살아보겠다는 마음 하나로 낯선 이국 땅에 왔건만 그동안 땀 흘려 모아놓은 영농자금 등을 하루아침에 도박으로 날리고 음주를 일삼는 남편의 불성실한 생활에 못 견뎌 마을을 떠나고 있다는 전언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발표한 ‘농촌 도박의 원인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 농촌 지역의 도박은 사회보장제도의 미비, 소득 발생 시기의 집중, 문화 여가 시설의 부족 등의 이유가 종합적으로 작용해 도박이 관습화하고 극심해진다고 풀이했다.

또 최근 가속화하고 있는 사회적 양극화 현상에 대한 좌절감이 농촌 주민들로 하여금 ‘한탕’을 노리는 도박의 유혹에 쉽게 빠져들게 하는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정부, 농촌 도박과의 전쟁 선포해야

전남 지역의 한 농민운동가는 “지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막는 게 발등의 불이라서 농한기 농민들의 생활지도 등을 세심하게 신경 쓸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또한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데 어떻게 노름할 여력이 있겠느냐”는 논리를 내세워 고질병처럼 성행하고 있는 농촌도박에 대해 다소 무감각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갈수록 지능화하는 사기도박단과 각종 신종 성인오락실의 범람, 도박을 농한기의 유일한 소일거리로 여기는 관습, 양극화에 따른 한탕주의 만연 등으로 농촌은 여전히 도박이라는 암에 노출되어 있다.

갈수록 거세지는 농산물개방 물결에 맞서 잘 사는 농촌을 만들려면 정부는 이제라도 ‘농촌 도박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농촌이 도박으로 피폐해지면 아무리 지원을 많이 하더라도 그 열매는 원정 도박꾼들이 거두어 가기 때문이다.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