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캐피탈 감독 김호철'컴퓨터 배구'로 삼성화재 9년 아성 깨고 프로배구 재패

영국은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초석을 마련했다.

당시 보잘 것 없던 영국 함대가 막강 전력을 자랑하던 ‘무적함대’를 물리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정확한 정보수집과 치밀한 전략에 따른 결과였다.

영국이 국가적으로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정보력 강화. 엘리자베스 1세의 지시를 받은 비밀 첩보조직은 유럽 각국 궁궐에 침투했다. 결전에 앞서 스페인 해군의 동정을 손바닥 보듯 파악한 영국 함대가 절대적으로 유리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1980년대 변화무쌍한 토스로 세계 배구계를 호령했던 김호철(51) 감독. 세계 최고의 프로배구 무대 이탈리아에서 마지꼬(마술사), 마니도로(황금의 손)으로 불리던 그는 2003년 말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어려울 때 부르면 다시 돌아오겠다”던 현대캐피탈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김 감독이 한국 남자 배구의 ‘무적함대’ 삼성화재를 격침시키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도 정보 확보였다. 전력분석관 도메니코 라사로(55)를 영입한 것도 ‘지피지기(知彼知己)’를 위해서 내린 결정이다.

2005~2006 프로배구 챔피언 결정전 최종 5차전이 벌어진 2일 천안 유관순체육관. “우승의 문턱에서 삼성화재에 질 때마다 남 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다”는 김 감독은 ‘무적함대’ 삼성화재의 9년 아성을 드디어 무너트렸다.

선수들에게 평소 엄격해 ‘호랑이’ 감독으로 불리는 김 감독은 “아들과 딸이 보고 싶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애써 참았던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이번에는 반드시 삼성화재를 꺾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과학을 접목한 전략 수립

김 감독은 선수 시절 ‘컴퓨터 세터’로 불렸다. 작전 수립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전략을 세울 때는 과학의 힘을 빌린다. 2002 한ㆍ일 월드컵 당시 축구대표팀 히딩크 감독이 압신 고트비 전력분석관과 함께 비디오 분석한 것과 비슷하다.

챔프전을 앞두고 전력분석관 라사로와 함께 삼성화재의 전력을 집중 해부했다. 수집한 자료와 비디오 화면을 분석하느라 밤을 지새운 날은 셀 수가 없을 정도다. 그는 삼성화재의 선수별, 상황별 분석 자료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내용만 간추려 선수들에게 전달했다.

“신진식이 네트에 붙었을 때와 떨어졌을 때 공격을 비교해 보자. 공을 때리는 손의 각도와 구질이 다르지?” 삼성화재 에이스 신진식과 서로 블로킹해야 하는 오른쪽 공격수 후인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상황을 분석하면 각자의 습관이 보인다. 승부처에서는 결국 신진식, 김세진에게 공이 갈 테니 그 때 너희들이 그들의 공격 성향에 맞춰 블로킹하면 우리가 우승한다.”

이겨도 화내는 호랑이 감독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다.” 호랑이 감독은 자신을 ‘다혈질’이라고 설명한다. 지고는 못 사니 삼성화재에 눌렸던 지난 2년간 속병이 날 수밖에. 남 몰래 울기도 많이 울었단다.

현대캐피탈 선수들은 스파이크를 성공시키고도 혼날 때가 많다. 득점에 실패했지만 칭찬 받는 상황에도 익숙하다.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지론을 가진 호랑이 감독이 눈앞의 승패보다 선수들이 작전을 제대로 수행했는지를 따지기 때문이다.

“공격을 성공시키면 소리를 지르고 좋아하란 말야!” 현대캐피탈 선수들은 공격을 성공시키고도 새색시처럼 조용하면 꾸중을 듣는다. 히딩크 감독이 “반칙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고함치던 모습과 흡사하다.

▲ 김호철 감독이 선수들로부터 행가래 축하를 받고 있다.

“정신력이 흐트러진 선수는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던 호랑이 감독은 현대캐피탈이 95년 슈퍼리그 우승 후 무려 11년 만에 챔피언에 오른 뒤 “선수들에게 불만이 많지만 오늘은 좋은 말만 하겠다”면서도 자만심을 경계했다.

우승보다 재미있는 배구가 우선

‘무적함대’ 삼성화재를 격파한 현대캐피탈은 대영제국처럼 향후 3~4년 이상을 독주할 수 있는 전력을 갖췄다. 하지만 승부사 김호철 감독은 “현대캐피탈이 독주하기보다는 재미있는 배구를 해야 한다”는 승부의 세계에서 있을 수 없는 말을 꺼냈다.

김 감독은 3일 천안에서 벌어진 우승 축하연에서 정태영 구단주에게 “승부에 연연하지 않고 배구팬을 위해 재미있는 경기를 할 수 있도록 사장님께서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만년 하위팀 LG와 대한항공이 현대캐피탈과 삼성화재를 이길 수 있어야 한국배구가 살 수 있다는 것이 ‘마지꼬’의 생각이다. 최근 국가대표 사령탑을 맡은 마술사 김 감독은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야구가 인기몰이에 나선 것처럼 배구도 국제대회를 통해 옛날의 인기를 부활시키겠다”고 다짐했다.

마지꼬는 또 한국 배구를 위해서라면 모든 노하우를 아낌없이 공개하겠다고 말했다.

현대캐피탈은 그의 이런 모습이 달갑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승 노하우가 담긴 전력분석기법과 체력훈련방법이 고스란히 노출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만이 전체 배구인들이 살 길이라고 판단하기에 감수하겠다고 한다.

아내를 그리워 하던 간 큰 남자

김 감독은 외기러기 마냥 한국에서 혼자 지낸다. 국가대표 세터 출신 아내 임경숙(48)씨와 이탈리아 프로배구 2부리그 만토바에서 세터로 뛰고 있는 딸 미나(22)는 이탈리아에서 산다.

골프를 즐기는 자신을 따라 어린 시절부터 골프장을 오갔던 아들 준(18)은 이탈리아 골프 국가대표다. 항상 가족이 그리운 김 감독은 휴대폰 액정에 담긴 아내 사진을 보고 또 본다. 우승 인터뷰 도중에 “애들이 보고 싶다”며 갑자기 눈물을 흘릴 정도로 그의 가족 사랑은 지극하다.

“그동안 혼자 잤는데 집사람이 옆에 있으니 잠이 안 오더라구. 그래서 따로 잤지.” 그는 3일 새벽 곁에 누운 아내를 매정하게 밀쳤다.

천안에서 벌어진 우승 축하연(2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자신을 차에 태우고 경기도 분당의 집까지 운전한 아내였다. 경상도 사나이의 무뚝뚝함을 감안하더라도 도가 지나쳤다. 멀리 있을 때는 그토록 아내를 그리워하던 그였지만 정작 곁에 있을 때는 간 큰 남자로 변신했다.

그토록 바라던 우승트로피를 거머쥔 그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늙어서 힘이 떨어지기 전에 아내한테 잘 해야 하는데…”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상준 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