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장 세 번째 홀… 관록의 버디퍼팅김미현, 美 LPGA 제이미파오웬스코닝클래식에서 극적 역전우승

“잊혀져 가는 김미현이 되기 싫었어요.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죠.”

지난 7월 17일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제이미파오웬스코닝클래식에서 우승 트로피를 번쩍 치켜올려 시즌 2승째를 거둔 ‘슈퍼 땅콩’ 김미현(29ㆍKTF)의 우승 소감에는 그간의 마음 고생이 그대로 묻어났다.

김미현은 2002년 8월 웬디스챔피언십 우승 후 올해 4월까지 무려 3년 9개월간 침묵을 지켜왔다. 103차례의 투어에 나서 톱10 진입 31차례, 준우승 2차례였다. 나쁜 성적은 아니었지만 우승과는 지독하게 인연이 닿지 않았다.

지난해 박세리도 나란히 부진하면서 한때 세계 여자 골프계를 쥐락펴락했던 한국 여자골프 1세대는 이제 한물갔다는 말까지 공공연히 나왔다. 지난해 KTF와 재계약하면서 연봉이 대폭 삭감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슈퍼 땅콩’은 그대로 무너지지 않았다. 지난 5월 1일 진클럽앤드리조트오픈 우승으로 화려하게 부활하더니 두 달 반 만에 또 다시 1승을 보탰다. 투어 통산 7승째.

김미현의 우승으로 한국 선수들은 올 LPGA 투어에서 모두 9승을 따내 역대 최다인 2002년과 타이를 이뤘다. 사상 처음으로 두 자리 승수 합작도 가시권에 들어왔다.

김미현은 올 시즌 101만 4,724달러를 벌어들여 상금랭킹 4위로 올라섰다. 2002년에 이뤘던 생애 시즌 최고 상금 104만 9,993달러 경신도 충분히 가능해졌다. 제2의 전성기가 아니라 최고 전성기가 눈 앞에 찾아온 것이다.

노련미가 만들어낸 통쾌한 역전 우승

김미현의 이번 우승은 연장 끝에 나온 짜릿한 역전극이라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

그간 김미현은 4차례의 연장전에서 1승3패로 약한 모습을 보였다. 뒷심 부족은 늘 그의 고민거리였다. 더구나 김미현의 연장 상대는 LPGA 투어에서 가장 높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미녀 골퍼’ 나탈리 걸비스(미국).

연장까지 간 것부터 엄청난 뒷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걸비스는 최종 라운드 3번홀부터 7번홀까지 5개홀 연속 버디를 몰아쳐 4타차 선두로 달아났다. 그러나 8번홀과 9번홀, 10번홀에서 3개의 줄버디를 솎아내 2타차까지 차이를 줄인 김미현은 16번홀과 17번홀에서 다시 버디를 잡아내며 마침내 걸비스를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일방적인 응원이 걸비스에게 쏟아졌다. 김미현의 이름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프로 데뷔 첫승을 앞두고 초조한 모습을 보인 걸비스와 달리 백전노장 김미현은 침착했다.

연장 세 번째 홀. 걸비스가 2.7m의 버디 퍼트를 놓친 반면 김미현은 5m의 먼 거리 퍼트를 성공시켰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김미현 역시 자신이 뒷심이 약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뒷심이라는 것이 어차피 정신적인 문제잖아요. 체력은 부가적인 요인일 뿐 노련미와 정신력에 달린 것이라 생각했어요.”

쌍춘년 신부되는 '슈퍼 땅콩'

앳된 외모로 항상 소녀 같은 김미현이지만 어느덧 한국 나이로 서른. 입춘이 두 번이나 들어 있어 결혼에 적기라는 쌍춘년을 맞아 김미현도 웨딩 드레스를 입는다. 상대는 동갑내기 세미프로 임재근 씨.

임 씨는 경기 용인시에서 ‘골프원 아카데미’라는 골프 스쿨을 운영하고 있으며 157㎝인 김미현보다 25㎝나 큰 182㎝의 훤칠한 키와 준수한 용모를 갖췄다.

주니어 시절 함께 운동을 하면서 알게 된 두 사람은 용인대 95학번 동기로 오랜 인연을 이어온 사이다. 지난해 가을부터 본격적인 교제를 시작해 장래를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김미현은 지난 겨울 임 씨의 골프 스쿨을 자주 찾아 데이트를 즐겼으며 스키장에 함께 가기도 했다.

최근 틈만 나면 “결혼하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냈던 김미현은 지난 5월 진클럽앤드리조트 오픈 우승 후 “우승도 했으니 올해 결혼할 생각이다. 이제 나도 서른 살인데 이참에 아버지와 딜을 해서 올해를 넘기지 않을 것”이라고 당당히 밝혔다.

임 씨는 마침 이때 미국으로 건너와 힘을 보태줬고, 연인이 3년 9개월 만에 우승을 하고 눈물을 펑펑 쏟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봤다.

김미현에게는 또 하나의 든든한 지원군이 있다. LPGA투어에서 함께 활동 중인 후배 조령아(22). 동생이 없는 김미현에게 조령아는 친동생과도 같은 존재다. 대회가 있을 때는 물론, 쉬는 기간에도 항상 붙어다닐 정도로 각별한 사이다.

나이는 김미현보다 한참 어리지만 이해심과 배려심이 많아 김미현에게 많은 위안을 주고 있다. 김미현은 시즌 2승째를 달성한 후에도 “US오픈 때 둘 다 성적이 안 좋았는데 서로 위로하면서 조만간 일을 한번 내자고 얘기한 게 현실이 된 것 같다”며 조령아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남은 것은 메이저 우승 뿐

벌써 7번이나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춘 김미현이지만 아직 성취하지 못한 꿈이 있다. 바로 메이저 대회 타이틀이다. 김미현 역시 “메이저 대회 우승이 없다는 것이 항상 머리 속에서 맴돌곤 한다”면서 아쉬움을 드러냈다.

김미현은 이제 8월 초 열리는 메이저 대회 브리티시오픈을 향해 정조준하고 있다. 최근 추세를 보면 누구보다 우승 가능성이 높다. 올 시즌 첫승을 올린 이후 9차례 대회에서 6차례나 톱10에 올랐을 만큼 기복이 없다.

LPGA투어에서 단타자에 속하는 김미현의 장점은 정확도. 높은 그린 적중률로 짧은 비거리를 보완한다. 올 시즌을 앞두고는 피나는 동계훈련을 통해 스윙을 가다듬었다.

김미현이 “주니어 시절보다 운동량이 많았다”고 할 만큼 훈련에만 매진했다. 퍼팅 실력도 눈에 띄게 향상됐고, 이는 스코어로 직결됐다. 여기에 투어 8년차 다운 노련미가 보태졌다. “무조건 체력만 앞세워 투어를 한다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았다. 투어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노련미가 생겼다”고 자평할 정도.

오랫동안 무관의 설움을 겪으면서 우승에 대한 의지와 집념도 누구보다 강해졌다. 뒷심 부족에 대한 우려의 시선 역시 깨끗이 잠재웠다. 4타차를 극복하고 역전 우승한 제이미파오웬스코닝클래식뿐 아니라 3, 4라운드에서 성적을 끌어올리는 경우가 올들어 유독 많았다.

그렇다면 김미현의 최대 라이벌은 누구일까. 김미현과 함께 부활에 성공한 박세리? 몇 년간 세계 골프계를 주름잡아온 ‘골프 여제’ 아니카 소렌스탐?

그의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기량이 나날이 발전해가고 있는 한국 선수들을 비롯해서 좋은 선수들이 많지만, 저의 최대 라이벌은 ‘코스’라고 생각해요. 코스가 점점 길어지고 있는 LPGA의 추세를 감안한다면 극복해야 할 문제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고 봅니다.” 김미현은 앞으로도 코스와의 고독한 전쟁을 계속할 것이다.


김지원 기자 eddi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