닻 올린 핌 베어벡 號… 공식 데뷔전 미진한 스타트 불구 비전 심어줄 적임자로 평가

그는 결코 이방인이 아니다. 우리에게 너무도 낯익은 얼굴이다.

한국 축구대표팀의 새로운 미래를 책임질 핌 베어벡(50) 감독. 독일월드컵이 끝난 직후 6월 26일 대한축구협회는 서둘러 베어벡을 대표팀의 새 사령탑으로 선임했다. 통상적으로 대표팀 감독 선출이 장시간의 여론 수렴과 축구협회 수뇌부의 난상토론에 의해 이뤄지는 것에 비하면 대단히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한국 축구와 함께 한 지 어언 5년. 과연 침체일로에 빠져 있는 한국 축구에 베어벡은 어떤 비전과 희망을 심어줄 수 있을까.

'2인자'의 굴레를 벗어나

한국 축구는 지난해 8월 본프레레 감독이 중도 사퇴하고 월드컵을 이끌 후임 감독을 고르느라 일대 홍역을 치렀다. 그 와중에 선택된 감독이 바로 아드보카트였다. 아드보카트 외에 비엘사(아르헨티나), 보비 롭슨(잉글랜드) 등 세계적 명장들이 후보군에 있었지만 한국 축구의 선택은 아드보카트였다.

그리고 그 선택의 이면에 바로 핌 베어벡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2002한일월드컵에서 히딩크의 제1선 참모로서 4강 신화를 이끈 주역인 베어벡은 누구보다 한국 축구에 대한 깊은 식견을 갖고 있었다.

축구협회 관계자들은 “아드보카트를 선임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베어벡이 함께 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공공연히 밝혔다. 이미 독일월드컵 준비 단계부터 베어벡은 감독 못지않은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는 존재였던 셈이다.

56년생인 베어벡은 대표팀의 역대 외국인 감독 중 나이가 가장 젊다. 그만큼 선진 축구의 최신 흐름에 대해 꿰뚫고 있고 데이터에 의존한 전략을 수립한다. 과거 2002년 히딩크 감독도 베어벡 수석코치의 철저한 데이터수집 능력에 효과를 톡톡히 봤다는 후문.

감독이 되어서도 물론 이 같은 흐름은 이어지고 있다. 베어벡 감독의 슬로건은 ‘생각하는 축구(Thinking football)’. 운동장 위에서 뛰고 있는 11명의 선수들에게 철저한 전략적 사고를 요구하고 있다.

베어벡은 아드보카트호에 합류하기 전부터 지속적으로 한국 축구에 대한 관심을 표시해왔다.

한국 취재진은 2005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베어벡과 조우한 일이 있다. 당시 베어벡은 ‘축구천재’로 명성이 높았던 박주영(21)에 대해 누구보다 자세히 알고 있었다. 베어벡은 “잉글랜드의 빅클럽들이 박주영에 대해 관심을 표시하고 있다”며 취재진에 ‘뉴스거리’까지 제공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지한파’ 베어벡의 한국 축구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은 2006독일월드컵을 준비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됐다. 베어벡은 아드보카트와 함께 지난 10월 첫 부임하자마자 무려 70여 명의 방대한 선수 리스트를 기술국으로부터 제공받았는데 베어벡은 큰 시간을 들이지 않고 베스트 멤버들을 추려냈다.

만약 아드보카트가 베어벡 없이 70여 명의 선수를 단지 비디오 자료만으로 파악하려 했다면 난관에 봉착했을 것이 자명하다. 독일월드컵 직후 대한축구협회가 아무런 망설임없이 베어벡을 차기 사령탑으로 선정한 가장 큰 이유, 역시 누구보다 한국 축구에 대해 깊이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성의 지도자

베어벡 감독의 특징은 단적으로 얘기하자면 ‘치밀함과 세세함’이다. 베어벡은 대충 얼개만 그리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세부적인 사항을 꼼꼼히 확인해 나간다. 이것이 전임 외국인 감독들과 가장 차별화되는 베어벡의 특징이다.

베어벡의 꼼꼼함은 스케줄 관리에서부터 묻어나온다. 대표팀 대외협력 업무를 맡고 있는 전한진 차장은 “베어벡은 스케줄 관리를 접근하는 방법 자체가 대단히 치밀하다. 무엇이든지 미리미리 준비하는 스타일이다”며 기존 감독들과는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고 설명한다. 아무래도 오랜 기간 코치 생활을 하다보니 작은 부분 하나하나에 세심한 정성을 기울이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는 설명.

이 같은 치밀함은 베어벡의 프로근성과도 밀접히 연결돼 있다. 축구협회 관계자들은 “베어벡은 일 중독자”라고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축구 기술적인 면뿐 아니라 행정적인 부분까지 완벽히 일에 파묻혀있는 ‘워커홀릭’ 스타일이란 전언. 밤이고 낮이고 베어벡의 전화기는 항상 꺼져 있는 법이 없다. 전임 감독들과는 달리 올림픽대표팀과 성인 대표팀을 모두 이끌어야 하는 버거운 짐을 흔쾌히 맡을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한국에 오랜 시간 머물렀기 때문에 선수들과 문화적 충돌이 별로 없다는 것도 베어벡의 커다란 장점이다. 베어벡은 한국뿐 아니라 98년부터 2년간 J2리그 NTT오미야의 사령탑을, 또 2003년에는 교토 퍼플상가의 사령탑을 지낸 바 있다. 아시아 문화에 그만큼 익숙하다.

그렇다고 ‘코리안’으로 쉽게 동화되는 스타일은 아니다. 여전히 그는 서양식을 좋아하고 김치에 자발적으로 젓가락을 옮길 정도로 ‘오버’하지는 않는다.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음식 역시 대부분의 외국인이 선호하는 비빔밥. 맵고 짠 다른 음식에 비해 지극히 무난한 비빔밥 정도 외에는 한국 식도락 문화에 적절한 거리를 두고 있다.

감독으로서 역량검증은 지금부터

지금까지 열거한 베어벡의 특징들은 그가 한국 축구 대표팀의 외국인 사령탑으로서 얼마나 적당한 자격조건을 갖추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와는 별도로 대표팀 감독으로서의 진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부호가 달린다.

히딩크ㆍ아드보카트와는 달리 감독으로서의 이렇다할 경력이 없다. 2003년 도쿄 퍼플상가와 2004년 네덜란드령 안틸레스의 감독직을 맡았지만 별다른 성과없이 물러났다. 독일월드컵 이후 유명 클럽이나 국가대표팀의 사령탑 후보로 거론된 적도 없다. 수석코치로서의 능력은 검증이 끝났지만 이와는 별도로 ‘수장’으로서의 자질은 아직 더 지켜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지난 16일 그의 공식 데뷔전으로 치러진 대만과의 아시안컵 2차 예선에서 이 같은 우려는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코치가 사전에 준비하는 역할이라면 감독은 현장에서의 기민한 판단과 과감한 결단이 필요한 위치다. 과연 베어벡이 감독으로서도 새로운 성공 스토리를 써나갈 수 있을까? 그 해답은 일단 오는 9월 2일 펼쳐지는 FIFA랭킹 45위 이란과의 아시안컵 예선 홈경기에서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낼 전망이다.


김기범 기자 kik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