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맹 독선·'이만기 제명'으로 내분 최고조… 씨름인·비씨름인 화해해야

▲ 씨름연맹 김재기 총재에 의해 모욕죄로 고소돼 피고인으로 법정에 서게 된 전 씨름선수 이만기(오른쪽)씨와 이기수 전 LG코치가 9월 6일 재판을 받기 위해 수원지법으로 향하던 중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어쩌다 씨름판이 이 지경까지….’

‘모래판의 황태자’ 이태현(30)은 낯선 이종격투기 무대에서 실컷 두들겨 맞고 ‘기권’을 선언하는 수모를 당했고, ‘씨름황제’ 이만기(43) 인제대 교수는 자신의 모태인 한국씨름연맹으로부터 영구 제명이라는 최악의 징계를 받았다.

한때 국민들의 성원과 사랑에 힘입어 ‘한민족의 전통 스포츠’라는 자부심에 가득 차 있던 씨름인들의 사기는 이제 땅바닥에 떨어졌다. 올해로 출범 23년째를 맡고 있는 민속씨름.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화려한 날은 가고

1983년 닻을 올린 민속씨름은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스포츠답게 전국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만기, 이준희, 이봉걸 등 굵직한 스타들의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면서 프로 스포츠다운 ‘스타성’도 야구와 축구 등 타종목에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90년대로 접어들면서 씨름은 이 같은 인기를 이어가지 못했다. 이만기로 대표되는 초창기 ‘기술씨름’은 사라지고 점차 커다란 체격조건을 바탕으로 한 ‘거인들의 스포츠’가 되어 갔다. 민속씨름의 화려한 기술에 매료됐던 팬들은 점점 흥미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점차적인 인기 하락에 97년 터진 외환위기는 씨름의 쇠락에 결정타가 됐다. 환란에 따른 긴축 경영의 최전선에 각 기업들은 홍보 효과가 미진한 프로 씨름단 해체라는 카드를 들고 나왔고 한때 8개팀에 이르렀던 프로 씨름단은 2006년 현재 현대삼호중공업 하나밖에 남지 않게 됐다.

이에 대해 씨름인들은 80년대 인기스포츠로 자리매김했던 동력을 살려나가지 못한 씨름연맹의 행정력을 비판하게 됐고 이에 따라 현장 씨름인들과의 갈등이 커져갔다. 또한 민속씨름은 호황기 때 전문경영인을 도입해 발전시켜 나갈 것이냐, 아니면 경기인 출신이 행정을 맡아야 하느냐를 놓고 소모적인 대립 속에 뚜렷한 방안을 찾지 못하는 바람에 쇄신의 기회를 놓쳤다.

2004년 취임한 현 김재기 총재 체제 하에서 위기는 더욱 심화됐다. 2004년 LG씨름단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연맹은 거의 무관심에 가까운 대응 방식으로 일관했고 이는 현장 씨름인들의 분노로 이어졌다. 이듬해에는 신창건설마저 해체를 선언, 프로 씨름단은 현대삼호중공업 하나만 존재하게 됐고 연맹은 고육지책으로 지방자치단체와 연계한 새로운 대회를 구성했지만 이 역시 각 이해 당사 주체들의 갈등으로 쉽게 정착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김 총재가 현장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은 채 독선적인 운영을 하기 때문에 씨름인들의 불만이 쌓여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연맹 총재의 독선적 리더십

작금의 위기에 대해 씨름인들은 무엇보다 연맹의 ‘수장’격인 김 총재의 독선적인 마인드를 성토하고 있다.

김 총재는 외환은행과 주택은행장을 지냈을 정도로 정ㆍ관계에서 이른바 ‘마당발’로 유명한 인물. 그만큼 업무 추진력에 대해서는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그와 동시에 씨름계 내부의 문제점에 대해 겸허하게 의견 수렴을 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실제로 김 총재는 지난 8월 기자간담회에서 “씨름 내부의 세세한 일은 내가 상관할 바 아니다. 하지만 커다란 틀에서 추진하는 일에 대해서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다소 독선적인 발언을 쏟아내 물의를 빚었다.

정치와 경제계에서 성공가도를 달렸기 때문에 체육 단체장쯤은 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김 총재의 ‘불도저식 마인드’가 씨름이 잘 나갈 때야 통할 수 있지만 현재와 같은 위기 상황에서 이 같은 포용력 부족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 이종격투기 데뷔전에서 기권패한 뒤 상처투성이 얼굴로 기자회견을 하는 이태현. 한국 씨름계의 현주소를 보는 듯 하다. / 연합뉴스

이만기 교수와의 ‘불화’도 총재의 이 같은 독선적 마인드에 기인한 바 크다는 것이 씨름계의 공통된 지적. 이 교수는 “신창건설과 LG씨름단이 해체될 때 이준희 선배와 함께 총재 면담을 신청했다. 하지만 거절당했다”며 총재와의 의사소통에 커다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일본 스모의 경우에는 경기인 출신이 협회장을 맡고 있기 때문에 내부 인사도 투명하고 현장의 소리를 비교적 잘 담아내고 있다”며 현재의 정치ㆍ관료 출신의 단체장 선임에 대해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이 교수를 명예훼손죄로 고발한 김 총재는 최근 개인사업상 저지른 문제로 인해 그 자신이 법원으로부터 실형 선고까지 받은 상태다. 징역 8월과 집행유예 2년이라면 총재직 수행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수준. 씨름연맹 정관 3장 13조 4항에 따라 연맹 총재직을 박탈당할 수 있다.

연맹측은 “재심을 청구했기 때문에 총재직을 수행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입장이지만 만약 김 총재의 실형이 확정될 경우 씨름계의 내분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대안세력 역시 지나치게 투쟁적

이렇게까지 곪아 터진 데는 이른바 ‘야당’으로 불리는 한민족씨름위원회 소속의 ‘투쟁 방식’에 대한 지적도 많다.

한민족씨름위원회는 2004년 말 신창건설 해체 뒤 정인길 전 신창건설 단장을 중심으로 이 교수 등 민속씨름동우회원들이 참여해 만든 단체. 지난 7월 창립총회를 가진 이 단체를 씨름연맹은 명백한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이만기 영구 제명 파동 역시 연맹의 ‘대안 세력’으로 눈총을 받고 있는 이 단체를 염두에 둔 조치다.

그러나 한민족씨름위원회가 연맹에 대립각을 세우는 방식 또한 도를 넘어섰다는 지적이 많다.

2005년 김천장사대회에 등장한 ‘김재기 총재를 교도소로 보내라’는 현수막은 씨름연맹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는 중대한 도전이었다. 이에 대해 연맹측은 격분했고 이 행사에 주도적으로 참가한 이 교수를 ‘총재 모욕죄’로 영구 제명시키는 조치까지 취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포용이 부족한 것은 연맹과 한민족씨름위원회 양쪽 모두 마찬가지인 셈이다.

회생의 길은 대화와 타협 뿐

이 교수는 지난 9월 11일 영구제명 조치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에서 “씨름이 다시 국민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새롭고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과 씨름이 함께 나갈 수 있고 토너먼트가 아닌 리그로 치러지는 대회방식, 그리고 관중들과 더 가까이서 호흡할 수 있는 새로운 ‘씨름 콘텐츠’를 갖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를 두고 연맹이 함께 참가하는 공청회를 열어 국민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싶다는 것이 이 교수의 바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에 앞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분명하다. 대화와 타협 없이는 아무것도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다. 만신창이가 된 씨름판을 다시 살리기 위한 ‘묘수’는 양자의 진정한 이해와 협력하고자 하는 의지라는 게 씨름인들의 한결 같은 지적이다.


김기범 기자 kik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