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코트 관중 몰려 후끈… 신생팀 창단 등 숙제 많아

“배구 인기를 되살릴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한국배구가 아시아 정상에 우뚝 선 지난달 15일 새벽(한국시간). 배구인들은 저마다 환호성을 질렀다. 배구 대표팀은 2006 도하 아시안게임 결승에서 중국을 3-1(25-18, 22-25, 25-18, 25-16)로 제압했다. 김호철 감독이 태극기를 오른손에 든 채 헹가래쳐질 때 배구인은 감격에 젖었다. 1970~80년대 누렸던 인기를 되찾을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서다.

아시안게임에서 우승을 장담하던 야구와 축구는 참패했다. 90년대 초반 배구를 밀어내고 겨울스포츠의 꽃으로 등장한 농구도 마찬가지다. ‘현지 적응에 실패했다’(야구). ‘훈련시간이 많았으면 어땠을까’(축구). ‘정신 자세가 썩었다’(농구). 패장의 변명에 국민의 실망은 더욱 커졌다.

아시안게임서 금메달 따 기세

이런 상황에서 배구는 프로스포츠 가운데 유일하게 금메달을 따냈다.

야구, 축구, 농구의 졸전에 실망하던 국민은 새벽잠을 설쳐가며 투혼이 넘친 배구 대표팀을 열렬히 응원했다. “우리가 실력에서 앞선 건 아니지만 꼭 이겨야 한다는 정신력은 중국을 압도했다”는 김호철 감독과 태극전사 12명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카타르 도하에서 점화된 배구 열기는 고스란히 서울까지 퍼졌다. 2006~2007 프로배구 개막전이 벌어진 지난달 24일 서울 잠실학생체육관은 뜨거운 배구열기를 보여줬다. 경기 시작 4시간 전부터 줄을 이은 배구팬들은 지난 시즌 챔피언 현대캐피탈과 삼성화재의 경기에 일희일비했다.

배구전문가는 물론 배구팬까지 현대캐피탈의 2연패를 예상했지만 개막전 결과는 딴판이었다.

브라질 출신 용병 레안드로(23ㆍ208㎝)를 앞세운 삼성화재가 지난 시즌 최우수선수 숀 루니(24ㆍ207㎝)가 분전한 현대캐피탈을 3-2(26-24, 19-25, 27-25, 25-27, 15-8)로 눌렀다. 레안드로는 이날 한 경기 최다득점(49점), 최다공격득점(44점), 최다후위공격성공(20번) 등 프로배구 각종 기록 7개를 갈아치워 루니(22점)의 코를 납작하게 눌렀다.

레안드로는 27일 대전 홈 개막전에서는 한국 최고의 거포 이경수(27ㆍ197㎝)마저 압도했다. 용병 최고가 토종 최고를 누른 셈이다. 레안드로(30점)라는 특급 용병의 활약에 힘입어 삼성화재는 이경수(16점)가 버틴 보험 업계의 맞수 LIG를 3-1(25-22, 25-20, 24-26, 25-21)로 제압했다.

비록 삼성화재에 무릎을 꿇었지만 LIG도 이경수와 용병 윈터스(24ㆍ196㎝)의 공격이 매서워 ‘만년 3위’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보여줬다. 항상 문제가 됐던 선수단의 응집력이 달라진 만큼 돌풍의 핵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크다. 208㎝의 브라질 거인 보비(27)를 영입한 ‘만년 꼴찌’ 대한항공도 만만치 않은 전력을 갖췄다는 평가다.

현대캐피탈의 독주가 예상됐던 프로배구는 절대강자도 절대약자도 없는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했다. 팬들의 관심을 집중시킬 환경이 조성된 셈이다.

프로팀 4개뿐이라 초라

하지만 지난 시즌 우승팀 현대캐피탈의 연고지인 천안에서 벌어져야 할 개막전이 서울에서 벌어지는 등 한국배구연맹(KOVO)의 행정 편의주의는 배구팬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프로스포츠의 근간인 연고지 제도를 KOVO 스스로 부인한 꼴이다.

구미에서 벌어진 LIG와 대한항공의 경기가 23일에 벌어졌기에 ‘현대캐피탈과 삼성화재의 경기는 개막전이 될 수 없다’는 비난도 있다. KOVO는 현대-삼성전(24일)을 ‘공식 개막전’, ‘그랜드(grand) 개막전’이라고 설명했지만 날짜가 다른 만큼 LIG-대한항공전(23일)이 개막전이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명색이 프로지만 팀 수가 4개 뿐이라 팬들의 관심을 끄는 데 한계가 있다. 프로 4개 팀 가운데 꼴찌만 면하면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혁규 KOVO 총재가 ‘반드시 신생팀을 창단하겠다’는 3년 전 취임 공약을 지켜야 한다”고 배구인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다.


용병들 강타 펑펑, 토종 꿈나무 가슴 멍들어

“레안드로는 정말 대단하다. 한 경기에 49득점을 올리다니 괴물이다.”

배구팬은 레안드로라는 ‘괴물’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배구를 잘 모르는 사람마저도 “레안드로가 그렇게 대단하냐”고 수군거릴 정도로 레안드로는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레안드로가 고공 강타를 펑펑 터트릴 때마다 국가대표 오른쪽 공격수 장병철(30ㆍ194㎝)은 벤치를 지켰다.

레안드로와 장병철의 뒤바뀐 처지는 용병제도의 득과 실을 잘 보여주는 예다.

세계 배구계를 호령하던 이탈리아는 최고의 프로배구리그를 갖고 있다. 각국의 내로라하는 배구선수는 모조리 이탈리아로 모인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겨우 5위에 턱걸이했다. 이탈리아 출신 유망주들이 주전으로 뛸 기회를 박탈당했기에 대표팀의 수준도 하향 평준화됐다.

한국 프로야구와 프로농구는 용병제도가 도입되면서 유소년 야구와 유소년 농구가 시들해졌다. 야구 ‘꿈나무’들은 용병과 경쟁할 가능성이 큰 1루수와 외야수를 기피하는 경향이 생겼다. 특히 농구는 용병이 센터와 파워포워드를 독식하자 꿈나무들이 가드로만 뛰려고 한다. 프로농구 출범 10년 만에 센터의 씨가 마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용병제도가 한국농구의 근간을 송두리째 흔든 셈이다.

프로배구도 지난 15년간의 침체로 유소년 배구 환경이 척박해졌다. 레안드로와 루니의 등장이 프로배구의 인기몰이에 도움이 되지만 장기적으로는 야구나 농구처럼 배구 발전에 ‘해’가 될 수도 있다. 프로농구처럼 용병에 의해 승패가 좌우되면 득보다 실이 많은 게 용병제도다.

배구계가 용병의 맹활약에 박수만 칠 게 아니라 배구 꿈나무 육성에 힘쓸 때다.


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