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단들, 대표팀 선수 차출 거부… 사상 초유 국제대회 참가 취소 불러

2007년 정해년 벽두 한국 축구는 세계 축구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해프닝을 겪었다. 21일 카타르에서 열리는 8개국 올림픽대표 국제친선대회에 선수 소집을 못해 출전을 취소한 것. K리그 14개 구단이 일치단결해 대표팀에 ‘반기’를 들었다. 한국 축구역사상 초유의 일이다.

카타르 차출 파동의 전말

사건의 발단은 지난해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K리그 플레이오프와 챔피언결정전이 아시안게임 대표팀 일정과 겹치면서 프로와 대표팀 간의 ‘타협’이 필요하게 된 것. 베어벡 감독은 당시 4강 플레이오프에 올라간 수원과 성남 소속 선수들을 대표팀 소집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뛰게 해주는 배려를 했다. 베어벡 감독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K리그에 소집 규정을 양보하면서 K리그 구단으로부터 1월 올림픽대표팀 해외 전지훈련에 대한 협조 약속을 받았다.

하지만 베어벡 감독이 철석같이 믿고 있던 그 ‘약속’은 결국 실현되지 않았다. K리그 14개 구단 단장으로 이뤄진 프로축구연맹 이사회는 지난 15일 올림픽대표팀 차출 요청에 대해 일괄적으로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프로구단 소속 선수들이 단 한 명도 올림픽대표팀 차출에 응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유는 규정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대표팀 소집 규정에 따르면 올림픽대표팀 국제대회 참가는 대회 개막 4일 전 프로 구단들과 사전 협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카타르 국제대회와 관련해 대한축구협회와 프로축구연맹의 사전 협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 K리그측의 설명이다. 축구협회는 부랴부랴 긴급 회의를 소집해 대책을 숙의했지만 결론은 카타르 대회 불참이었다. 베어벡 감독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K리그에 앞으로 절대 타협과 양보는 없다”고 분노했지만 K리그측에서는 “카타르 대회 차출과 관련해 협회와 제대로 된 논의가 없었다”고 반박했다. ‘약속’과 관련해 협회는 사전 조율이 됐다고 주장하고 있고 K리그는 사실이 아니라고 되받아쳤다.

취재 결과 협회는 14개 구단을 개별적으로 만나 이해와 협조를 구하지는 않고 연맹을 통해 간접적으로 의사를 타진한 것으로 확인됐다.

구단들 오랜 불만의 폭발

K리그는 그동안 축구협회의 일방적 행정에 감정이 쌓일 대로 쌓여 있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전후해 K리그 구단은 단 한 번도 겨울 전지훈련에 태극마크를 단 선수들을 데려가지 못했다. 말 그대로 반쪽짜리 훈련에 그쳤다. 시즌을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단계인 겨울 전훈에 소속팀의 간판 선수들이 대표팀 차출로 빠지면서 적잖은 차질을 빚었다.

특히 수원, 서울, 성남 등 대표팀 선수들을 많이 보유한 이른바 ‘명문’ 팀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이번 차출 거부 파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세력들도 바로 그들이었다. 지난해까지는 프로팀들이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월드컵이라는 국가적 대사를 앞두고 해외 전훈을 거부할 수 없었기에 프로 구단들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소속 선수들을 내줘야 했다. 하지만 월드컵이 끝난 뒤인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올해가 바로 적기라는 공감대가 퍼졌고 사상 초유의 ‘집단 거부’ 사태로 이어졌다.

한국 축구 패러다임의 변화

이번 사태의 핵심은 한국 축구의 중심이 대표팀에서 프로로 이동하고 있는 흐름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그동안 한국 축구의 중핵적 과제로 지적된 것이 지나친 대표팀 중심의 운영이었다. 모든 행정의 초점이 대표팀에 맞춰지다보니 프로 구단들의 희생이 너무 컸다는 것이다. 한국 축구가 유럽과 같은 선진 축구로 또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는 프로축구의 질적 성장과 발전이 필수적이다. 이제는 서서히 한국 축구가 대표팀이 아닌 프로 중심으로 체질 개선을 해야 한다는 것이 축구계의 공통된 지적이다.

물론 대표팀 중심주의가 그동안 한국 축구에 기여한 바는 결코 적지 않다. 또 부정적이 아닌 긍정적 측면에서 바라봐야 하는 대상임에 틀림없다. 국민들의 역량을 하나로 결집시켰고 억압된 정서를 분출시킬 수 있었던 훌륭한 통로였다. 하지만 그 역할은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를 기점으로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고 바라보는 것이 옳다. 한국 축구가 월드컵 4강 신화 이후 새로운 성장과 발전의 동력을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프로축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차출 거부 파동을 협회와 K리그의 단순한 힘겨루기 양상으로 해석해선 안 되는 이유다.

이번 사태가 축구협회와 K리그의 감정 대립으로 인해 발생한 결과라 하더라도 ‘대표팀 우선주의’에서 ‘프로 중심주의’로 바뀌는 전환기의 물꼬를 튼다면 한국 축구에 큰 획을 긋는 역사적 결정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도마에 오른 베어벡 감독의 직설화법

한국 축구의 ‘선장’이 살얼음판 위를 항해하고 있다. 거침없이 쏟아내는 베어벡 감독의 도발적인 발언으로 한국 축구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대표팀과 프로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번 카타르 차출 거부 파동에 대해 베어벡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K리그에게 더 이상 양보와 타협은 없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양자의 이해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에서 대표팀의 수장인 사령탑의 발언 치고는 너무 경솔했다는 평가다. 베어벡 감독은 코치 시절부터 하고싶은 말은 다하는 직설화법으로 유명했다. 베어벡 감독이 남긴 ‘어록’을 살피면 이런 성향이 잘 묻어난다.

"박주영이 유럽 갈려면 아직 멀었다"(2005년 11월)

베어벡이 아드보카트 감독과 함께 수석 코치로 부임한 직후의 일이다. 당시 최대 화두였던 ‘천재’ 박주영에 대한 그의 견해를 축구전문사이트 ‘골닷컴’의 한 기자가 물었다. 선수 개개인에 대한 언급은 통상적으로 자제하는 것이 대표팀 코칭스태프의 관행인데 베어벡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 같은 발언을 했다.

"우리는 스키나 타러 가는 것이 아니다."(2006년 1월)

지난 13일 대표팀 차출에 대해 프로 구단이 거부 의사를 밝힐 조짐이 있다는 소식에 베어벡 감독이 내뱉은 일성이다. 프로팀에 대한 조롱의 성격이 담겨 있어 논란이 된 발언. 당시 통역을 담당하고 있던 박일기 대한축구협회 홍보국 직원이 “우리는 놀러 가는 것이 아니다”고 ‘의역’을 했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발언이었다.

"2002년 전까지 유럽은 한국 선수를 단 한 명도 알지 못했다."(2006년 1월)

차출 거부로 인해 카타르 대회 출전이 무산된 뒤 베어벡 감독이 두바이로 걸프컵을 관전하기 위해 출국하면서 쏟아낸 말. 베어벡 감독은 차출 거부에 대한 섭섭한 감정을 조금도 자제하지 않은 채 거침없이 K리그에 대한 ‘감정’을 퍼부었다. 출국 직전 정몽준 축구협회 회장이 베어벡을 직접 만나 “섭섭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말을 아끼라”고 충고했지만 베어벡 감독의 직설화법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김기범 기자 kik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