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KCC 끝모를 추락으로 감독인생 첫 시련… 장기플랜 세우며 와신상담

프로농구 전주 KCC의 홈구장인 전주실내체육관 바로 옆에는 전북대가 자리잡고 있다. 서울로 치면 신촌쯤 되는 대학가. KCC의 홈 경기가 있는 날이면 자연스레 교정에서 농구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젊은이들로 체육관 인근은 북새통을 이룬다.

KCC는 ‘영원한 오빠’ 이상민을 비롯해 조성원(천안 국민은행 코치), 추승균으로 이어지는 전국구 스타 3인방을 보유했고, 전신인 현대 다이냇 시절을 포함해 3차례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차지한 최고 명문팀이다.

흥행을 위한 3박자를 완벽히 갖춘 KCC는 지난 99년 해체된 프로야구단 쌍방울 레이더스 이후 끊어졌던 전주의 프로스포츠 열기를 되살리며 프로농구의 메카로 자리를 잡았다. 적어도 지난시즌까지는 그랬다.

2006~07시즌. KCC는 끝모를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달갑지 않은 일이지만 고개 숙인 ‘농구대통령’은 화제의 중심일 수밖에 없다.

▲ 실력으로 장악한 권력

허 감독은 농구를 시작한 이후 엘리트 코스를 밟아 왔다. 용산고와 중앙대를 거쳐 실업인 기아 자동차, 프로농구 출범 이후에는 부산 기아, 원주 나래, TG 삼보까지 최고 팀을 거쳐 왔다. 아니 허재가 그들을 최고로 만들었다는 표현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꼴찌’를 모르는 게 당연했다. 현역 시절 ‘농구 9단’, ‘농구 천재’라는 수식어가 모자라 미국프로농구(NBA)의 ‘농구황제’ 마이클 조던을 능가하는 ‘농구대통령’이라는 칭호가 따라붙기에 이르렀다.

‘농구대통령’은 한번 잡은 권력을 놓지 않았다. 언제나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서 승승장구했다. 지난 2001~02시즌 원주 TG삼보(현 원주 동부) 시절 9위로 내려앉은 적이 있었지만 이듬해 챔피언결정전 우승으로 만회했다.

타고난 슛 감각과 동물적인 농구 센스는 어느 누구도 따라오지 못했다. KCC의 정찬영 홍보마케팅 과장은 “지금도 선수들과 연습 중 재미삼아 슛 내기를 하면 어느 누구도 허 감독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한다. 두말이 필요없는 농구 실력에 열혈남아 허재의 강한 카리스마는 ‘대통령’으로 손색이 없었다.

▲ 대통령보다 어려운 감독

원주 동부에서 은퇴 뒤 미국에서 연수 중이던 허 감독은 지난 시즌 직전 KCC의 사령탑에 앉았다.

허 감독과 절친한 프로야구 해태 출신의 선동열 감독이 라이벌팀이었던 삼성의 수장으로 옮긴 것처럼, 현역 시절 영원한 맞수였던 KCC의 지휘봉을 잡은 것은 ‘깜짝 뉴스’였다. 우여곡절 끝에 데뷔 첫해 허 감독은 4강까지 진출했다. ‘스타 출신 감독은 성공할 수 없다’는 스포츠계의 통념을 보기 좋게 깨뜨렸다.

그러나 불과 1년 만에 허 감독의 흰머리는 부쩍 늘었다. 책임을 통감하느라 밥도 넘어가지 않고 잠도 제대로 청하지 못한다. 허 감독은 “농구를 시작하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농구가 가장 쉬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 걸 새삼 느낀다”며 괴로운 심경을 토로하곤 한다.

지난 17일 모비스전에서 구단 최다 연패 기록(10연패)을 갈아치웠고, 6일 삼성전에서는 40점차 대패를 당했다. KCC의 전신인 현대가 프로 원년에 기록했던 7승14패(0.333)에도 못 미치는 역대 최악의 승률마저 갈아치울 가능성도 크다.

22일 전주 SK전에서 지긋지긋한 연패 탈출에 성공했지만 남은 경기에서 전승을 하더라도 플레이오프 진출은 불가능하고 이변이 없는 한 꼴찌를 예약한 상태다. 그럼에도 허 감독은 “이번 시즌이 앞으로의 인생에 큰 경험과 자산이 될 것만은 분명하다”며 고통을 달게 받아들이는 중이다.

▲ 새로 눈 뜬 농구

허 감독은 기나긴 연패의 터널을 지나고 있을 때 “선수 때는 팀 성적이 부진해도 나만 잘하면 큰 자책감은 없었는데 감독은 그게 아니더라”며 수장의 고충을 털어놨다. 농구 인생에서 처음 경험해보는 ‘바닥 인생’이었지만 더 어려운 건 ‘감독 수업’이었다.

KCC의 처참한 성적에는 운도 따르지 않았다. 조성원이 은퇴하고 찰스 민렌드(창원 LG)가 이적한 것은 둘째치고, 거물 용병으로 기대를 모았던 마이클 라이트가 시즌을 시작하기도 전에 부상으로 교체됐다.

이상민과 추승균 두 주포는 라운드별로 번갈아 부상을 당했고, 시즌 도중 리빌딩을 위해 동부와 3대3 트레이드를 하면서 사실상 이번 시즌은 포기한 상태다. 이쯤되면 천하의 ‘대통령’도 한계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허 감독은 22일 SK전을 이기고 10연패에서 탈출한 뒤 “좋은 경험한 것 같다. 선수 때 더 졌어야 하는데”라며 쓴 농담을 건넸다.

허 감독에게는 이번 시즌의 성적보다 장기적인 리빌딩 플랜이 더욱 벅찬 과제가 될 전망이다. 10연패 탈출 뒤 “10년 후쯤 이번 시즌의 심경을 고백하겠다”는 농구대통령의 쓸쓸한 자화상이다.

● 허재 프로필

▲생년월일= 1965년 9월 28일
▲신체=188㎝ㆍ80㎏
▲가족관계= 아내 이미수(41) 씨와 웅(15),훈(12) 2남
▲출신교= 서울 용산중-용산고-중앙대
▲프로 경력= 기아(1997, 1998년)-나래ㆍTG 삼보(1998~2005년), 전주 KCC 감독(2005년~)
▲주요 수상경력= 농구대잔치 MVP(1991, 1992, 1995년), ABC대회 MVP(1995년), 플레이오프 MVP(1998년), KBL 모범선수상(2002~03시즌), 프로농구 베스트5(1999~2000시즌)
▲국가대표 경력= 서울 아시안게임(1986년), 서울 올림픽(1988년), 바르셀로나 올림픽(1992년), 애틀랜타 올림픽(1996년)


성환희 기자 hhsu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