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호텔·연습장에 수많은 팬들 몰려… 외국 스포츠자본 국내시장 잠식 우려도

#1. 7월18일 오후 1시 인천공항 1층 입국장. 붉은 색 유니폼을 입은 수많은 팬들은 시끄러운 북소리와 함께 맨유의 응원가를 소리높여 부르고 있고, 입국장 주변을 둘러싼 ‘디카족’들은 카메라 셔터를 누를 준비에 여념이 없다.

오후 2시40분쯤 입국장 문이 열리자 검은색 정장에 빨간 넥타이를 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모습을 드러냈다.

불 같은 이미지로 잘 알려진 퍼거슨 감독이지만 공항에 나온 500여명의 환영 인파에는 함박 웃음으로 답했다.

퍼거슨 감독의 뒤로 폴 스콜스, 웨인 루니, 에드윈 판 데 사르와 라이언 긱스 등 스타 플레이어들이 줄지어 나타났고 현역 최고의 선수로 각광받고 있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모습을 드러내자 입국장의 열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이날 맨유의 입국 행사에 동원된 공항 기동대 소속 경찰만 50명, 경호원이 65명이었다.

재활과정을 밟고 있는 '파워 엔진' 박지성이 17일 서울 명동 나이키 맨유 스토어 개장식에 참석, 춧 프린트를 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연합뉴스>

팬들의 모습도 손수 만든 응원 피켓을 든 여학생, 맨유 유니폼을 입고 휠체어에 의지한 채 출국장을 주시하는 남학생 등 각양각색. 공항에 마중 나온 맨유 한국 서포터스의 홍영호(26ㆍ대학생) 응원팀장은 “방한 소식을 듣고 30여 명이 모였다.

공항에서부터 맨유에 대한 우리의 열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대절한 버스를 타고 숙소까지 따라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2. 맨유의 첫 공개훈련이 실시된 19일 서울월드컵경기장. 이른 아침부터 장대비가 쏟아졌지만 맨유의 훈련 모습을 지켜본 팬들은 무려 2,000명이 넘었다. 훈련 내용도 ‘명품’이었다.

호날두는 최고의 테크니션답게 장기인 ‘헛다리짚기’로 팬들의 눈을 즐겁게 했고 루니는 대포알 같은 중거리포를 잇달아 골네트에 작렬시키며 팬들의 환호에 답했다.

#3. 맨유 선수단이 묵고 있는 신라호텔에는 아침부터 밤까지 극성팬들로 조용할 날이 없다. 호텔 로비에 죽치고 앉아 있는 ‘맨유 마니아’들은 선수들이 지나갈 때마다 귀청이 떨어질 듯한 환성을 질러댄다.

박지성과 친한 것으로 알려진 네덜란드 출신의 골키퍼 에드윈 판 데 사르가 지나가자 사방에서 팬들이 달려들어 경호원이 가까스로 저지했다.

■ 한국판 '브리티시 인베이션(British Invasion)'

한국 스포츠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현상’이다. 일찍이 해외 유명 프로팀이 한국땅을 밟은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폭발적인 반응은 없었다.

가까운 예로 2004년 스페인의 명문 FC바르셀로나가 왔을 때도 분위기는 달랐다.

당시 호나우지뉴(브라질)라는 세계 최고의 스타가 있었지만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K리그 수원 삼성과 바르셀로나의 친선전은 빈 자리가 적지 않았다.

아시안 투어 중인 영국 프리미어 축구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FC서울과의 친선경기 하루전인 19일 오전 서울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맨유의 공개 훈련에서 웨인 루니 선수가 미니게임 도중 볼을 다투고 있다. 김주성 기자.

적어도 축구를 좋아하는 몇몇 팬들 중심인 ‘그들만의 잔치’에 그쳤다. 심지어 2002한일월드컵 개막전 프랑스-세네갈 전에서도 빈 관중석이 보이지 않았던가. 애국주의에 기반한 한국 스포츠의 한계였다.

하지만 맨유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7월20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맨유-FC서울전은 사상 유례없는 흥행을 기록했다. 6월 예매가 시작된 티켓이 단 6시간 만에 매진되는 진기록이 펼쳐졌다.

사방에서 맨유 방한경기 티켓에 대한 문의가 이어졌고 암표 가격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맨유의 스타 플레이어인 호날두, 루니, 긱스, 그리고 수장인 퍼거슨 감독의 일거수 일투족은 방한 기간 내내 각종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3일간의 짧은 체류 일정이었지만 ‘맨유 마케팅’에 참가한 국내외 기업들은 다양한 행사를 통해 자사의 홍보를 극대화했다.

2007년 맨유의 내한경기는 한국 스포츠사에 뚜렷이 기억될 만한 ‘사건’이었다. 스포츠 분야에 국한시키지 않아도 한국의 여름을 이토록 달군 ‘신드롬’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91년 팝그룹 ‘뉴키즈 온더 블록’과 96년 마이클 잭슨이 내한 공연을 가졌을 때의 열기보다 결코 덜하지 않았다. 영국 기반글로벌 스포츠 자본의 ‘한국 침공’이라고 부를 만하다.

■ 외국 클럽이 왜 이런 인기를?

신드롬의 저변에는 물론 한국 최고의 축구스타인 박지성이 자리하고 있다. 박지성이 소속된 세계 최고 명문 구단인 맨유의 방한이기에 이렇게 떠들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선수들의 이름값만 본다면 맨유가 전 유럽을 통틀어 No.1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호나우지뉴와 티에리 앙리(프랑스), 리오넬 메시(아르헨티나) 등 초특급 별들이 즐비한 FC바르셀로나, 안드리 셰브첸코(우크라이나)와 디디에 드로그바(코트디부아르) 등 세계 최고의 공격진을 보유한 첼시FC(잉글랜드)가 더 호화 군단에 어울린다. 하지만 이땅의 한국 팬들은 맨유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한국 축구의 아이콘 박지성이 뛰고 있는 팀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유럽 최고의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다. 130년 역사를 자랑하는 맨유는 현대 축구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세계적인 국가대항전 월드컵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맨유는 영국 노동자를 중심으로 시작된 ‘축구 종가’의 기원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맨유가 배출한 전설적인 스타들만 하더라도 월드컵의 역사에 뒤지지 않는다. 보비 찰턴, 조지 베스트, 에릭 칸토나, 데이비드 베컴 등 근대와 현대를 아우르는 축구 아이콘들이 맨유의 붉은 색 유니폼을 입고 뛰었다.

FC서울과의 친선전을 하루 앞둔 7월19일 서울 신라호텔에서는 37.5kg이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책의 출판 기념 행사가 열렸다. 바로 맨유의 130년 역사를 집대성한 ‘유나이티드 오퍼스’라는 책의 한국 출판 기념 행사였다.

가로 15cm, 세로 15cm에 무게가 37.5kg이나 되는 이 책은 맨유 관련 기사와 자료를 모아 놓은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책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될 예정이다. 세계 최고의 역사와 전통을 지닌 명문 구단의 위용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 맨유 신드롬의 빛과 그림자

하지만 맨유의 ‘한국 침공’을 마냥 달가워할 수만은 없다. 외국 스포츠 자본이 국내 시장을 잠식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 상당수 축구팬들은 맨유를 비롯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수준 높은 축구에 매료되어 있다. 국내의 자생적 축구 콘텐트인 K리그가 과연 높아진 축구팬들의 눈높이를 충족시킬 수 있을까.

축구팬들은 하나같이 “프리미어리그는 정신없이 빠르게 진행된다. 패스도 빠르고 화끈한 슈팅도 많이 나오는 공격 축구다. 하지만 K리그는 지나치게 수비 위주이고 경기 진행 속도가 더디다”고 지적하고 있다.

더구나 국내 K리그에서 뛰고 있는 스타급 선수들은 전부 예외없이 유럽 진출을 ‘지상 과제’로 삼고 있다. 이천수, 박주영, 정조국 등 그나마 팬들에게 인지도가 높은 스타들이 유럽이나 J리그로 떠난다면 K리그의 시장성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이웃 동네인 프로야구를 살피면 이 같은 현상이 더욱 잘 이해된다. 박찬호 김병현 등 메이저리거들이 득세하기 시작한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고전을 면치 못하던 한국 프로야구가 2007시즌 들어 다시 흥행 조짐이 일고 있다.

봉중근, 최희섭 등 빅리거들이 국내 프로야구로 ‘유턴’했고 박찬호 등 해외파들이 죽을 쑤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금 프로야구로 팬들의 눈길이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맨유 등 유럽 축구가 최고 인기 스포츠인 동남아시아의 축구 현황을 살피면 더욱 경각심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동남아시아 축구팬들은 수준높은 유럽 리그에 눈높이가 맞춰져 있어 자국 리그에 무관심하다. 축구 열기 자체에 비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의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은 턱없이 낮다.

해외 스포츠 콘텐트가 국내 시장을 잠식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맨유의 ‘한국 침공’을 곱게만 바라볼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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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범 기자 kik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