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유망주 길러내 '엘리트코스형'지도자부산 아이파크 지휘봉 잡은 지 한 달도 안돼 대표팀 취임세계 축구 흐름에 정통… 22일 우즈벡전이 첫 시험대

대한축구협회가 6회 연속 본선 진출에 도전하는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팀의 새 사령탑으로 박성화 감독을 임명했다.

2007 아시안컵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중도 퇴진한 핌 베어벡 감독의 바통을 이어 받은 박성화 감독은 22일 오후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리는 우즈베키스탄과의 2008 베이징 올림픽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1차전을 시작으로 베이징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 통과에 나선다.

박성화 감독으로서는 큰 도전이다. 신임 올림픽 대표팀 감독의 어깨는 여러모로 무거울 수 밖에 없다. 베이징 올림픽 최종 예선전이 코 앞으로 다가왔는데 준비할 시간은 턱 없이 부족하다. 여론의 관심도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다.

올림픽 대표팀 감독은 가까이는 베이징 올림픽 본선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야 하고 멀리는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서 활약할 주역들을 성장시켜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져 있다.

전임 핌 베어벡 감독이 A 대표팀에서는 부진했지만 올림픽 대표팀에서는 나름대로 좋은 성적을 거뒀다는 점도 신임 감독에게는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K리그 부산 아이파크의 지휘봉을 잡은 지 한 달도 안돼 올림픽 대표팀 사령탑을 수락한 것을 곱게 보지 않는 시선도 있다. 자칫하면 게도 구럭도 다 잃는 결과가 될 수 있다.

박성화 감독은 동래고-고려대-할렐루야를 거치면서 스타 플레이어로 명성을 떨쳤고 1988년 일찌감치 지도자로 입문했지만 K리그(유공, 포항)와 청소년대표팀을 거치면서 지도자로서는 큰 빛을 보지 못한 경우다.

어찌 보면 올림픽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것은 박성화 감독으로서는 지도자로서의 마지막 승부가 될 수도 있다.

■ 왜 박성화인가

올림픽 대표팀 후보 물망에 오른 지도자는 3~4명으로 알려졌다.

당초 2년 동안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로 경험을 쌓고 지난해 11월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이 출범한 이후 핌 베어벡 감독을 보좌하며 2차 예선을 좋은 성적으로 통과하는데 공을 세운 홍명보 코치의 감독 승격이 유력시 됐다.

그러나 지도자로서의 경력이 부족하다는 아킬레스건이 ‘홍명보호’ 출범의 암초로 작용했다.

또 한국 축구를 위해 중요한 몫을 해야 할 홍코치에게 너무 일찍 부담스러운 짐을 맡기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박성화 감독의 경우 2001년부터 4년간 청소년대표팀 감독을 역임해 현 올림픽 대표팀 선수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점이 새 사령탑으로 낙점 받는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대한축구협회는 “최종 예선을 준비할 시간이 부족한 만큼 선수들에 대해 잘 파악할 수 있는 지도자가 팀을 맡아야 한다”고 거듭 주장한 바 있는데 홍코치를 제외한 후보군 중에 올림픽 대표팀에 대해 제일 잘 알고 있는 이가 박감독이기 때문이다.

박주영(서울), 백지훈(수원), 이근호(대구), 이승현(부산), 오장은(울산), 김진규(전남), 정성룡(포항) 등 현재 올림픽 대표팀에서 주축으로 활약하고 있는 대부분의 선수가 박감독이 지휘하던 청소년대표팀 출신이다.

브라질, 영국 등 축구 선진국으로 수 차례 유학을 떠나 세계 축구 흐름에 정통하고 위기 상황에서 대표팀을 맡아 잘 이끈 경험이 있다는 점도 높이 평가됐다.

박감독은 ‘코엘류호’와 ‘본프레레호’의 가교 노릇을 했었다. 2

003년 움베르토 코엘류 감독이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대행으로 A매치 4경기에 나섰고 베트남과의 2006 독일 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 예선전 홈경기에서 2-0 승리를 거두는 등 ‘구원투수’의 임무를 100퍼센트 소화해냈다는 평이다.

■ 박성화 감독은 누구

축구 명문과 국가대표팀을 거친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형’ 지도자다. 고려대 시절부터 국가대표팀에 발탁돼 맹활약했고 1983년 프로 축구 원년에는 할렐루야에서 팀 우승을 이끌며 대 MVP로 선정되기도 했다.

1987년 포항에서 현역 생활을 접은 박감독은 다음 해인 1988년 포철공고 감독으로 부임하며 지도자로 입문했고 유공(1993~94년), 포항(1996~2000년) 사령탑을 맡았다.

박성화 감독이 1일 오후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07 하나은행 FA컵 16강전 대전시티즌과 부산 아이파크의 경기에서 대전의 김호 감독과 악수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선수 시절 스타 플레이어로 명성을 떨쳤지만 지도자로서는 현역 시절 만큼 빛을 보지는 못했다. 프로 감독 데뷔 시즌이던 1996년 FA컵 우승을 차지했지만 정규리그에서 정상에 오르지 못했고 2000년 지휘봉을 반납하고 영국으로 축구 유학을 떠났다.

K리그 사령탑 시절을 박성화 감독의 지도자 시절 1기라고 한다면 2001년 청소년대표팀(19세 이하) 감독으로 부임한 후 2005년까지는 2기라고 분류할 수 있다.

박성화 감독은 4년에 걸쳐 청소년대표팀을 지도하며 수 많은 유망주를 길러냈고 당시만 해도 ‘한국 축구에는 맞지 않는다’는 포백 수비진을 과감히 도입하는 등 새로운 시도로 축구계의 주목을 받았다.

박감독은 청소년대표팀을 이끌고 2002년과 2004년 아시아청소년축구선수권(19세 이하)에서 2연패를 이룩했지만 세계청소년선수권(20세 이하)에서는 불운에 발목이 잡히며 기대 만큼의 성적을 내지 못했다.

정조국(서울), 최성국, 김동현(성남ㆍ이상 2003년), 박주영(서울), 백지훈(수원), 김승용(광주ㆍ이상 2005년) 등 막강한 스타 파워로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터라 아쉬움은 더욱 컸다.

2003년 아랍에미리트연합대회에서는 1승 2패로 16강에 진출했지만 숙적 일본과 연장 접전 끝에 석패했고 2005년 네덜란드 대회에서는 아프리카의 강호 나이지리아를 상대로 극적인 역전승(1-2)을 거뒀지만 스위스와 브라질의 벽을 넘지 못하며 16강 진출이 좌절됐다.

청소년대표팀 지휘봉을 반납한 후에는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으로 재직하다가 지난달 부산아이파크 신임 사령탑에 임명되며 필드로 돌아왔다.

■ 베어벡호와 박성화호 어떻게 달라질까

베어벡 감독이 지휘한 올림픽 대표팀의 주요 선수는 모두 박성화 감독의 제자들이다. 그러나 같은 선수들이지만 베어벡 감독이 지휘하던 올림픽 대표팀과 박 감독이 지휘하던 청소년대표팀은 차이가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박성화 감독 시절 청소년대표팀에서 빛을 보지 못하던 이들이 베어벡호의 주전으로 도약한 사례가 많다는 것.

‘올림픽호의 황태자’로 불렸던 이근호(대구)와 한동원(성남)은 박성화 감독이 지휘하던 청소년대표팀에서는 전혀 빛을 보지 못하던 이들이다.

이근호는 2005년 세계 대회 최종 엔트리에 포함됐지만 본선에서 단 1분도 그라운드를 밟지 못했다. 한동원은 쟁쟁한 선배들에 밀려 최종 엔트리 탈락의 아픔을 겪었다.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김승용은 2005년 세계 대회에서 박주영-백지훈과 함께 공격 전술의 축으로 맹활약했지만 올림픽호에서는 이근호와 이승현(부산)에 밀려 교체 멤버로 기용되는데 그쳤다.

올림픽 대표팀의 포백 라인의 터주대감으로 자리잡은 김창수(대전)와 강민수(전남)는 박성화 감독의 눈도장을 받지 못해 청소년대표팀에서 활약하지 못했다.

전술 운용에서도 차이가 난다. 박성화 감독은 2001년 부임 이후 청소년대표팀에 포백 수비라인 정착을 위해 애썼다. 그러나 스리백도 혼용했고 세계 대회에서는 포백보다는 스리백으로 수비를 두텁게 한 전술을 많이 썼다. 포백 신봉자인 베어벡 감독과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원톱을 고집하는 베어벡 감독과는 달리 박성화 감독은 투톱을 즐겨 썼다는 것도 차이점이다.

올림픽 최종 예선을 준비할 시간이 많지 않은 박성화 감독이 베어벡 감독이 10개월간 잡은 틀 위에 자신만의 색깔을 어떻게 덧입힐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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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민 기자 goav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