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위의 나이가 지난달로 만 열여덟을 넘어섰다. 이제 어엿한 대학생(미 스탠포드대)이다. 우리 정서로 보면 술집도 ‘합법적’으로 드나들 수 있다. 모든 언행에 대해 인정받고 책임도 따르는 시기가 됐다는 얘기다.

골퍼로서도, 미셸은 소녀 때와는 다른 성숙한 ‘성인’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 요구될 수 밖에 없다. 이미 지난해 중반을 경계점으로 그녀의 입지는 ‘천당’에서 ‘지옥’으로 바뀌었다.

미셸은 12살이던 2001년 2월, 세상에 첫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하와이에서 열렸던 미LPGA투어 ‘컵 누들스 하와이언여자오픈’의 먼데이 퀄리파잉에 출전했다. 이는 사상 최연소 LPGA투어 참가 기록이다.(결과는 탈락) 그로부터 2년 뒤인 2003년 3월에 ‘저 높은 곳을 향해’ 본격적인 비상을 시작한다.

미셸의 천재성을 알아본 나비스코챔피언십 조직위원회의 특별 초청으로 출전한 ‘2003 나비스코챔피언십’. 그녀는 미국의 3대 방송인 NBC TV에서 미국 전역에 생중계한 3, 4라운드를 챔피언조로 플레이 함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다.

이후 그녀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 ‘성 대결’을 내세운 그녀의 도전은 세계 골프계의 최대 이슈였다. 10대 중반의 ‘천재 소녀’에게 미PGA투어의 여러 대회에서 초청장이 날아 들었고 LPGA투어 역시 ‘흥행의 보증수표’인 그녀를 초대하는데 혈안이 됐을 정도였다.

그녀에 대한 관심은 골프 여제로 불리는 아니카 소렌스탐(스웨덴)을 능가했다. 비록 남자 대회 도전은 번번이 실패했지만 LPGA 대회에서는 줄곧 우승권을 맴돌았다.

자연 전세계 언론의 초점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맞춰졌다. 그녀의 미래는 의심할 바 없는 장밋빛이었다. 1m85센티미터(현재)를 향해 커나가는 슈퍼 모델급 몸매에 세계 정상급 기량을 갖췄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를 놓칠 리 없는 세계적인 기업들(나이키, 소니)은 10대 소녀에게 1,000만 달러 이상을 안겨줬다.

그러나 세상은 녹록하지 않았다. 남자 대회에 대한 ‘무(모)한 도전’이 거듭된 실패로 이어지자 칭찬과 기대 일색이던 세계 언론은 싸늘하게 돌아섰다. ‘점잖은 충고’도 있었지만 ‘원색 비난’이 지배했다.

부상이 겹치긴 했지만, 주변의 부정적인 시각은 여자 대회에서 조차도 제대로 성적을 내지 못할 정도로 충격으로 작용했다. 골퍼로서의 정상적인 성장 과정에서 일탈한 그녀의 파격적 행보는 이제 관심보다는 질타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미셸은 현재 스탠포드대 신입생으로 학창 생활을 하고 있지만 골퍼로서 향후 어떤 행보를 보일지 관심사다.

그녀가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할 무대는 두말 할 나위 없이 미LPGA투어. 투어 멤버가 될 수 있는 방법은 대략 3가지다. 매년 후반기에 열리고 있는 퀄리파잉스쿨(Q스쿨)을 통과하거나, 2부 투어인 퓨처스투어에 나가 시즌 상금 순위 5위 이내에 드는 방법이 일반적이며, 아니면 연 6회로 제한돼 있는 정규 투어에 초청 선수로 출전해 우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셸 위가 선택할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일단 그녀가 Q스쿨의 문을 두드리거나, 2부투어를 거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당분간 학창 생활을 하며 스폰서 초청을 통해 출전권을 얻은 뒤 우승을 해 투어 카드를 획득하는 방법이 유력하다.

지난 2~3년간 시도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한 방법이다. 향후 1~2년 이 같은 방법으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대학 2학년을 마치는 2009년 가을에는 Q스쿨에 도전장을 내밀 것 같다.

‘천재 소녀골퍼’로서 10대 중반을 지낸 그녀가 타이거 우즈 처럼 ‘프로선언→초청 대회 우승→PGA입성’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남들이 다 하는 그저 그런 방법으로 투어에 입문할 것인가. 관심이 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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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윤 ㈜한국프로골프투어 마케팅 부장 phy2006@koreap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