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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오련부터 임춘애까지'… AG 빛낸 추억의 스타

[스포츠한국미디어 이재호 기자] 19일, 웅장함을 자랑하는 인천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는 2014 인천아시안게임의 개막식이 열린다. 아시아 45개국, 1만3,000여 명의 선수단이 참가하는 이번 대회에서 개최국 한국은 역대 최대 규모인 1,068명의 선수단을 파견해 2002 부산아시안게임에서 따냈던 금메달 96개(총메달수 260개)를 뛰어넘겠다는 각오다.


임춘애(왼쪽)와 최윤희(제일 오른쪽). 대한체육회

아시안게임은 '스타' 탄생의 산실이었다. 수많은 스포츠 스타들이 이 대회를 통해 국민들을 웃고 울렸으며 스포츠 하나로 자긍심을 느끼게 해준 주역들이 바로 아시안게임 스타들이다. 역대 아시안게임을 거쳐 간 수많은 선수 중 '최고'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스타들을 추억해본다.

'조오련이랑 바다거북이랑 수영시합하면 누가 이기는 줄 아나?'

무려 800만 이상이 관람한 영화 '친구'의 명대사로 기억되는 조오련과 바다거북이 이야기는 고(故)조오련 선생의 위상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바다거북이는 시간당 평균 20㎞를 헤엄치는데 반해 조오련의 속도는 5.5㎞였으니 상대가 안 되지만 그 정도로 조오련은 국민들에게 '수영=조오련'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1952년생인 조오련은 18세의 나이에 1970 방콕아시안게임에 참가,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수영 볼모지'였던 한국이었기에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물론 2관왕까지 차지했으니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전남 해남 앞바다에서 헤엄치던 시골소년이 금메달을 땄다는 얘기까지 전해지며 조오련은 대회를 마치고 귀국했을 때 김포공항에서 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했을 정도로 단연 최고의 인기스타로 떠올랐다. 조오련은 생전에 "12월이었는데 카퍼레이드 당시 얼마나 추웠는지 벌벌 떨었던 기억이 난다"고 당시 카퍼레이드 상황을 회고한 적이 있었다.

조오련은 1974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를 따내며 한국에서 수영의 아이콘으로 이름을 굳힌 채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선수생활 9년 동안 무려 50여개의 한국신기록을 세웠으니 박태환의 등장 전 '수영=조오련'이란 말은 진리에 가까웠다. 조오련은 2009년 작고하기 전까지 대한해협을 건너는 등 언제나 '물'과 함께한 한국 수영사의 전설이었다.

'김연아급' 인기를 구가한 최윤희

2010 벤쿠버올림픽과 2014 소치올림픽까지 피겨스케이팅 선수였던 김연아의 국민적 인기는 가히 열광적이었다. 은퇴한 지금도 많은 광고에 출연할 정도로 여전히 인기를 보여주고 있는 김연아가 착용한 의상과 액세서리는 '완판(완전판매)'을 기록할 정도다. 30여년 전에도 '김연아급'인기를 구가하던 미모의 스포츠 스타가 있었다. 바로 여자 배영의 '전설' 최윤희(47)다.

최윤희는 인도 뉴델리에서 열렸던 1982 아시안게임을 통해 국민적 스타가 됐다. 역시 '불모지'였던 여자 수영 배영 200m에서 2분 21초 96으로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따낸 데 이어 배영 100m와 개인혼영 200m에서도 각각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며 대회 3관왕을 차지한 것. 아시안게임 수영 사상 최초의 3관왕이었고, 이 대업을 고작 15살의 아리따운 중학생이 해냈다는 사실에 국민들은 열광했다.

최윤희는 1986 서울아시안게임에서도 배영 100m와 200m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모두 5개의 금메달을 획득해 당시 12년 동안 깨지지 않았던 조오련의 아시안게임 수영 금메달 4개 기록을 돌파했다. 이 기록은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박태환이 2006년 대회에 이어 연속 3관왕을 하며 금메달 6개를 기록할 때까지 24년 동안 깨지지 않았다.

최윤희의 아름다운 외모에 뭇남성들은 모두 반했고 이후 록그룹 백두산의 보컬 유현상이 그녀와 비밀 결혼을 했을 때 유현상은 '희대의 도둑'으로 불리는 `국민적 시샘'을 감수해야 했다.

장재근과 임춘애 '육상 불모지' 한국을 깨우다



인천아시안게임에서 가장 많은 금메달이 걸린 종목은 단연 수영이다. 53개의 금메달이 달린 수영에 이어 육상 역시 47개의 금메달이 걸린 가장 '풍성한 종목'이지만 언제나 육상은 한국에게만큼은 '가난한' 종목이었다.

육상에서 늘 아쉬운 성적을 거두는 한국이지만 한때 남·여 선수 모두 분전하며 육상의 재미를 알려준 시기도 있었다. 바로 1986 서울아시안게임이다.

당시 남자 육상에서는 장재근(52)이, 여자 육상에서는 임춘애(45)가 맹활약하며 한국 육상의 전성기를 열었다. 장재근은 1982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100m에 출전해 은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이루며 국민적 관심을 받았다. 현재까지도 이 메달은 한국이 아시안게임 100m에서 거둔 마지막 메달이다. 주종목인 200m에서는 당시 아시아 신기록 보유자인 일본선수를 넘어 금메달을 따내며 한국 트랙종목 역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이뤘다.

이후 장재근은 1986 서울대회에서도 200m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남자 스프린터의 대명사가 됐고 특히 1985년 세운 200m 20초41의 기록은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은 한국기록으로 남아있다.



'라면 소녀' 임춘애의 스토리도 인상적이다. 당시 17살의 깡마른 소녀였던 임춘애는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은 선수였지만 1986 서울대회에서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 폭발적인 막판 스퍼트로 3관왕(여자 800, 1500, 3000m)에 올랐다. 이는 현재까지도 한국 육상 최초이자 유일한 아시안게임 3관왕으로 남아있다.

당시 임춘애는 '라면만 먹고 뛰었다'는 왜곡보도로 가난을 딛고 성공한 육상선수라는 이미지로 포장되며 국민들에게 짠한 감동을 줬다. 잘못된 내용이었지만 정치·사회적으로 힘들었던 국민들에게 그녀는 이미 스타가 됐다. 오죽하면 임춘애는 1988 서울올림픽에서 고(故) 손기정 옹과 함께 마지막 성화 봉송주자로 나설 정도로 영웅대접을 받았다.

장재근과 임춘애의 맹활약에 육상은 새롭게 조명을 받았다. 이런 거름이 더해졌기에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황영조의 기적과 '봉달이' 이봉주는 물론 2010년 무려 31년 만에 깨진 100m 한국신기록(종전 서말구, 현 김국영 10초31) 등이 가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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