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의 아리아 주타누간(20)이 LPGA투어 대지각변동의 진앙지로 부상했다.

5월에 열린 LPGA투어 3개 대회(요코하마타이어 챔피언십, 킹즈밀챔피언십, LPGA 볼빅챔피언십)를 연속 우승하면서 ‘대물(大物)’의 등장을 선포했던 주타누간이 시즌 네 번째 메이저인 브리티시 여자오픈마저 우승, 자신이 ‘LPGA투어 강자 중의 한 명’이 아님을 과시했다.

LPGA투어 2년차 신인이 연속 3연승 한 것만으로도 LPGA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기에 충분한데 세계의 강자들이 총출동한 브리티시 여자오픈에서 경이로운 골프퍼포먼스를 펼치면서 내로라는 선수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다국적 태극낭자들이 LPGA투어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가운데 일어난 주타누간의 출현은 LPGA투어에 새로운 태풍의 핵으로 나날이 커지고 있는 느낌이다.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은 물론 중계화면을 지켜본 세계의 골프팬들의 눈에 그는 앞으로 LPGA를 지배할 서너 명의 최강자 중 한명으로 다가왔다.

내 눈엔 주타누간이 난공불락의 골리앗처럼 보였다. 다윗의 돌팔매에 맥없이 쓰러지는 덩치만 크고 힘이 센 골리앗이 아니라 다윗의 머리와 심장을 가진 거대한 골리앗.

주타누간의 싹수는 사실 태극낭자들에게 뼈아픈 패배를 맛본 시절에 벌써 보였었다.

2013년 태국에서 열린 LPGA투어 혼다 타일랜드 대회에 초청선수로 참가한 그는 마지막 18번 홀(파5)을 앞두고 박인비(28)에 두 타차로 앞서고 있었으나 무리하게 2온을 시도하다 트리플 보기를 범해 박인비에게 우승컵을 바쳤고 LPGA투어 직행티켓도 놓쳤다.

비록 박인비에게 우승을 내줬지만 17세에 불과한 그의 골프기량은 이미 LPGA투어 정상 수준에 도달해있었다. 단지 나이가 어린데다 경험 부족으로 상황 변화에 따라 평정심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정도가 흠이라면 흠이었다.

이후 LPGA투어 Q스쿨을 거쳐 정식으로 LPGA투어에 뛰어든 그는 여러 차례 한국선수 또는 한국계 선수를 만나 우승 직전에 무릎을 꿇는 아픔을 맛보았다.

2015년 시즌 개막대회인 퓨어실크 바하마 대회에선 연장전에서 김세영(23)에게 무릎을 꿇었고 ISPS 호주 여자오픈에서는 3라운드까지 공동선두로 나섰다가 4라운드에서 4타를 잃어 리디아 고에게 우승을 내주었다.

올 4월 LPGA투어 시즌 첫 메이저대회인 ANA인스퍼레이션 대회에서도 마지막 라운드 3홀을 남기고 공동 2위 그룹(리디아 고, 전인지, 찰리 헐)에 2타 앞서 있었으나 3개 홀에서 연속 보기를 범하면서 침착하게 파와 버디를 한 리디아 고에게 우승을 내주었다.

이를 두고 일부 언론이나 골프팬들은 ‘새가슴’등의 표현을 쓰기도 했으나 오히려 이런 아픈 경험은 그를 더욱 성숙시키고 단련시켜 그를 완전히 다른 골퍼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잘 나가는 순간, 위기의 순간, 실수를 한 이후에 흥분과 분노를 다스리고 평정심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겪던 그의 모습은 이번 브리티시 여자오픈에선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2번 아이언이나 페어웨이 우드로 드라이버를 대신할 정도의 장타에 정교함까지 갖춘 그로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비법까지 터득했으니 LPGA투어의 강자들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위협적 존재가 된 것이다 .

지난 5월의 3연승 이후 주타누간은 사실상 매 경기 챔피언조를 예약한 듯한 경기를 펼치고 있다. 뒤처져 있다가도 어느새 톱10 안에 진입해 선두를 달리는 선수들을 압박해온다.

지난달 마라톤글래식에서도 그는 리디아 고(19), 이미림(26)와 4차까지 가는 연장전 끝에 리디아 고에서 우승을 넘겼다.

주타누간의 마음 다스림이 어느 경지에 이르렀는가는 그의 전매특허와 같은 ‘입 꼬리 미소’를 보면 알 수 있다.

예전엔 위기에 맞닥뜨리거나 실수를 하고 나면 얼굴이 굳어지면서 얼굴색까지 하얗게 변했는데 지금은 어떤 상황에서도 서두르지 않고 다만 입가의 입 꼬리 근육이 살짝 움직이면서 만들어지는 미소로 모든 것을 녹이는 능력을 보이고 있다.

틀림없이 무너질 것 같은 상황에서도 입 꼬리 미소를 한번 씨익 짓고는 담담하게 위기에서 벗어날 줄 안다.

브리티시 여자오픈 마지막 라운드 13번 홀(파4)에서 더블보기를 범해 이미림에게 한 타 차이로 추격당하는 위기의 순간에도 주타누간은 입 꼬리 미소 한번으로 지난 홀의 실수를 툴툴 털고 결국 3타 차이로 우승했다. 경이로울 장면이었다.

박인비를 ‘침묵의 암살자(Silent Assassin)’라고 부른다면 아리야 주타누간은 ‘미소 짓는 암살자(Smiling Assassin)'로 불리기에 족하다.

브리티시 여자오픈 우승으로 아리야 주타누간은 남녀 통 털어 최초의 태국출신 메이저 우승자가 되는 영광과 세계랭킹 1위 리디아 고와 함께 시즌 4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역대 우승자 중 2008년의 신지애(당시 20세 3개월6일)에 이어 두 번째 어린(20세 8개월8일) 우승자의 대열에 올랐다. 세계랭킹도 단숨에 리디아 고에 이어 2위로 뛰어올랐다.

아쉬움을 떨칠 수 없는 것은 아리아 주타누간과 함께 LPGA투어의 대표적 ‘터벅지(터질 듯한 허벅지)’를 소유한 이미림이 1~2 라운드에서 선두를 달리다 3라운드부터 주타누간에게 추격당해 3타 차이 공동2위에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마라톤클래식에서도 리디아 고, 아리아 주타누간과 연장전에 들어가 4차에 걸친 혈전 끝에 우승을 리디아 고에게 내주었다.

객관적으로 신체적으로나 기량 면에서 주타누간과 쌍벽을 이룸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는 것은 결정적 순간에 기회를 움켜쥐고 놓치지 않는 ‘정신적 악력(握力)’이 부족한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평소엔 부드럽고 평이롭게 경기를 펼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 에너지와 집중력을 모아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능력이 바로 악력이다. 비슷한 유형의 양희영도 그래서 안타깝다.

리디아 고가 결코 뛰어난 조건이 아닌데도 승리를 쟁취하는 기회가 많은 것은 물 흐르듯 담담한 플레이를 펼치다가 결정적인 기회가 오면 손톱과 발톱 모두 세워 결코 놓치지 않는 나름의 결기(決起)가 있기 때문이다.

주타누간의 거센 회오리에 태극낭자들이 중심을 잡고 LPGA투어의 주류로서의 입지를 어떻게 지켜나갈지 궁금해진다.

방민준(골프한국 칼럼니스트)

(골프한국 프로골프단 소속 칼럼니스트에게는 주간한국 지면과 골프한국, 한국아이닷컴, 데일리한국, 스포츠한국 등의 매체를 통해 자신의 글을 연재하고 알릴 기회를 제공합니다. 레슨프로, 골프업계 종사자 등 골프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싶으신 분은 이메일()을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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