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야구 천재인가 사고뭉치인가

바람 타고 구름 타고. 풍운아(風雲兒)라는 단어의 뜻을 살펴보면 ‘적절하고 좋은 때를 잘 활용해서 두각을 드러내고 나타나는 사람’을 의미한다. 하지만 다른 뜻으로 생각하는 이도 많다. 거친 바람을 뚫고 역경에 시달리고 수없이 많은 고난을 겪는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다. 한 시대를 호령할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었기에 이들이 행보는 남들과 달랐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보기엔 다소 독특했고, 난해했다. 재능과 실력을 갖고 있었기에 부러움의 대상이었지만, 반대로 좋지 않은 소식으로 신문 1면을 장식하거나 사고도 많았다.

최근 야구계에 또 하나의 풍운아가 유니폼을 벗었다. 한국과 일본, 미국 야구를 모두 경험했던 ‘뱀직구’ 임창용(43)이다. 작년까지 KIA에서 뛰고 팀에서 방출이 된 그는 홀로 몸을 만들며 타 팀의 ‘러브콜’을 기다렸다. 그러나 결국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지난 11일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팬들은 아쉬움이 크다. 스타의 이면, 애증의 존재, 이슈메이커, 혹은 악마의 재능이라 불릴 정도로 화려했던 야구계 풍운아. 이들의 행보는 그 자체가 이슈거리였다.

프로야구에서 꿈틀대는 '뱀직구'로 한시대를 풍미했던 사이드암 투수 임창용이 유니폼을 벗는다. 연합

실력 만큼이나 사고^논란도 많았던 ‘레전드’ 임창용

특유의 잠수함 투구폼, 여기에 150km 이상의 강속구를 팡팡 뿌려대는 타고난 어깨와 승부를 피하지 않는 강심장까지, 말 그대로 임창용은 야구를 위해서 태어난 존재였다. 1995년 해태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입단한 임창용은 1998년 프로 4년 차에 34세이브로 구원왕 자리에 오르며 당대 최고의 마무리 투수가 됐다. 한국시리즈 우승이 간절했던 삼성이 양준혁을 내주고 임창용을 데려간다. 임창용은 기대대로 1999년 38세이브를 기록한 뒤 2001년에 선발로 전환해 14승, 2002년에는 204.1이닝을 던져 17승을 거두는 강철어깨를 뽐냈다.

선발과 마무리, 가리지 않고 뛸 수 있는 그의 빛나는 재능을 발휘하기엔 한국은 너무나 좁았다. 2008년에는 일본프로야구 야쿠르트로 이적, 첫 4년간 128세이브를 기록하며 ‘창용불패, 미스터 제로’의 명성을 다시금 이어갔다. 혹사로 인한 어깨 수술 이후에도 그의 무한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미국 메이저리그 시카코 컵스에 입단, 빅리그 무대에 입성했다.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해서도 기량은 건재했다. 삼성과 KIA를 거치며 40살이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성기 못지않은 실력을 보여줬다. 타고난 체력과 재능 하나는 기가 막힌 선수였다. 그만큼 사고도 참 많았다.

대표적으로 해외 원정도박이다. 지난 2015년 10월, 임창용을 비롯한 삼성 소속 윤성환, 안지만, 오승환이 마카오에서 거액의 도박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통합 5연패를 노리던 삼성은 그 여파로 와르르 무너졌다. 선수 생활의 끝자락이었던 작년에는 KIA 김기태 감독과 보직 관련 문제로 인해 마찰을 일으켰다. 결국 그는 이로 인해 시즌 종료 후, 팀에서 방출이 되는 수모를 겪었다. 갈 곳이 마땅치 않았던 임창용은 타 팀 이적에 실패, 스스로 조용히 유니폼을 벗었다. 최고의 선수였지만, 최고의 사고뭉치라는 타이틀도 함께 겸했던 임창용이다.

이상훈

음악을 사랑했던 삼손 , 야생마 같은 그의 야구

임창용 못지않게 뛰어난 실력, 그리고 인상적인 비주얼로 세간의 화제를 모았던 풍운아가 또 있었다. 마운드를 향한 전력 질주, 그리고 휘날리는 머릿결, 바로 LG 트윈스의 심장 ‘야생마’ (48)이다. 서울고-고려대를 졸업, LG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은 1994년 18승을 기록, 팀 우승을 이끌었고 1995년 20승을 따내며 2년 연속 다승왕 타이틀을 가져갔다. 한일 슈퍼게임에서 주목을 받으며 한국을 떠나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해 2년간 47경기를 뛰었다. 은 멈추지 않고 미국 도전을 감행했다.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 9경기 11.2이닝을 소화하며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한국, 일본, 미국 프로 1군 무대를 밟은 투수가 됐다.

다시 LG로 돌아왔지만, 예전과는 달랐다. 이순철 감독과의 불화설이 커지면서 끝내 2004년 SK로 트레이드가 됐다. 야구에 집중하지 않고 덕아웃과 라커룸에서 기타를 치는 등 팀 분위기를 흐렸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은 이 감독의 해명에 반발, 자신의 입장을 직접 밝히면서 야구계가 시끌벅적하기도 했다. 그렇게 SK 유니폼을 입은 은 그러나 친정팀 LG를 상대로 공을 던질 수 없다면서 시즌 도중 연봉 6억을 포기하고 그대로 은퇴를 선언했다. 은 어린시절부터 꿈꿨던 음악의 길에 입문, 록밴드 ‘What!’의 보컬로 활약하며 세 장의 앨범을 내기도 했다.

환하게 웃고 있는 김병현.

풍운아를 넘어 기인으로…김병현은 아무도 못 말려

가운데 손가락 욕, 그것도 야구의 본토라 불리는 미국 메이저리그 한복판에서 그런 행동을 했으니 아무리 봐도 보통의 인물은 아니다. 특유의 입담과 행동, 그리고 돌출 발언까지 말 그대로 기행 그 자체, 하지만 그런 선수가 바로 김병현이었다. 성균관대 시절, 곧바로 미국 무대로 진출했던 그는 한국 선수로는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달성한다. 짧았지만 굵었다. 2001년 천재적 재능 하나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 백스의 마무리 투수를 맡아서 그 해 팀 월드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2002년에도 메이저리그 풀타임 마무리 투수로 뛰면서 존재감을 과시했지만 선발을 원했던 그의 의지로 인해 구단과의 갈등이 커지면서 결국 보스턴으로 트레이드가 된다. 그리고 2003년 자신을 향해 야유를 퍼붓던 팬들에 가운데 손가락 욕을 날리면서 자신의 야구 인생에 두고두고 회자가 될 사건을 남기게 된다.

김성태 스포츠한국 기자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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