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축구 베테랑들 ‘마지막 황금기’

국제축구연맹(FIFA) 여자 월드컵 2회 연속 16강 진출을 노리는 한국 대표팀의 지소연 등 선수들이 3일 오후(현지시간) 프랑스 주느빌리에 스타드 루이 부리에서 훈련하고 있다. 연합
6년 전 지소연이 흘렸던 눈물을 기억하는가. 2013년 여름, 당시 동아시안컵 대회 중이었던 지소연은 취재진 앞에서 폭풍 눈물을 흘렸다. 여자축구를 향한 아쉬운 처우 때문이었다. 당시 동아시안컵 대회를 위해 파주 국가대표축구센터(NFC)에 먼저 입소했던 여자 대표팀은 며칠 뒤 남자 대표팀이 들어오자 자리를 비워야 했다. 여자 대표팀은 훈련장에서 차로 40분이나 떨어진 숙소에서 생활하면서 대회를 준비했다. 이러한 처우에 당시 막내급에 가까웠던 지소연이 눈물을 쏟으며 설움을 토로했다.

지소연의 눈물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들 스스로 개척해 나갔다. 여자 대표팀은 2015년 캐나다 월드컵에서 사상 첫 16강에 진출하면서 많은 사람의 관심을 집중시켰다.또한 지소연은 한국 선수 최초로 잉글랜드 무대(첼시)에 진출하며 큰 화제를 모았고, 전가을과 조소현 역시 미국과 노르웨이 등 해외 무대로 진출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열악한 처우 속에서도 태극낭자들은 스스로 길을 개척해 나가며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4년 후인 2019년, 한국 여자축구는 두 번째 월드컵을 맞았다. 어느새 지소연과 조소현 등은 센추리 클럽(A매치 100경기)에 가입한 베테랑이 됐고, 그 사이 이민아, 장슬기 등이 두각을 드러내며 대표팀의 주축으로 자리 잡았다.

여자축구에 대한 관심과 처우도 많이 달라졌다. 지난 4월 열린 아이슬란드와의 평가전에서는 1만5000여명의 관중이 경기장을 찾으며 한국 여자축구 A매치 사상 최다 관중을 기록했고, 5월 열린 월드컵 출정식에도 많은 팬이 찾아와 대표팀의 선전을 기원했다.

최근에는 신세계 그룹이 한국 여자축구 최초로 공식 파트너십 계약을 맺으며 5년간 100억 원 규모의 후원을 약속했다. 그 동안 이코노미석에 몸을 실었던 여자 대표팀은 국제축구연맹(FIFA)의 지원 속에 프랑스에 비즈니스석을 타고 누워서 갈 수 있게 됐다. 지소연의 눈물 이후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여자축구는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다.

한국 영국 중국 호주 프랑스 강행군에도 그들이 쉴 수 없는 이유

하지만 선수들은 아직도 ‘자신이 여자축구의 미래를 온전히 짊어지고 있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품에 안고 있다. 자신들이 잘해야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더 나아가 여자축구의 발전까지 이어갈 수 있다는 것. 지소연과 조소현 등 베테랑들이 수많은 인터뷰에서 항상 입버릇처럼 해온 말들이다.

중고참인 이민아 역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야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여자축구를 하고 싶어 하는 어린 선수들이 많아질 거라 생각한다. 여자축구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우리가 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기에 이들은 쉴 수가 없다. 월드컵뿐만 아니라 모든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책임감 속에 소속팀과 대표팀을 오가는 강행군을 이 악물고 버텨내고 있다.

영국에서 뛰고 있는 지소연과 조소현은 빡빡한 리그 일정 속에서도 올 시즌 치러진 모든 A매치 대회에 개근했다. 1월 중국 친선대회, 2, 3월 호주 친선대회, 4월 국내 A매치 2연전, 5월 대표팀 소집훈련에 6월 월드컵까지 A매치 대회를 모두 소화하는 강행군을 치렀다.

일본 리그에서 뛰고 있는 이민아는 지소연, 조소현보다 비행 거리와 시간은 짧지만, 그들만큼 빡빡한 일정을 소화했다. 설상가상으로 햄스트링 부상까지 안고 있는 이민아지만, 그 역시 책임감을 강조하면서 자신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WK리그에서 뛰고 있는 대표팀 선수들은 월드컵 일정을 고려해 조정된 리그 일정 때문에 2주 동안 6경기를 치르는 강행군을 치르고 대표팀에 합류해야 했다. 이들 역시 사명감 하나 만으로 버티고 있는 중이다.

여전히 어깨 무거운 선수들, 월드컵 이후 달라질까

투자 없이 좋은 성적을 거두기 힘들다는 말도 있지만, 반대로 좋은 성적을 거둬야 투자가 따라오는 경우도 있다. 많은 비인기 종목이 그러하듯이 여자축구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4년 전 한 차례 성공 신화를 썼다. 12년 만의 월드컵 진출에 사상 처음으로 16강까지 진출했다. 지소연이라는 월드 스타가 탄생했고 장슬기, 이민아가 두각을 드러내면서 여자축구의 인기를 높여놨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4년이 지난 지금 겉으로는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시스템이 아닌 선수들 개인이 모든 것을 짊어지고 있다.

이제 4년 전 월드컵에서 한국 여자축구의 새 역사를 쓴 조소현, 이은미 등 ‘88년생’ 언니들은 어느덧 마지막 월드컵에 나선다. 이민아, 장슬기, 여민지 이후 뚜렷하게 두각을 드러내는 젊은 선수들이 나오지 않는 가운데, 88년생 선수들과 함께하는 이번 월드컵이 사실상 여자축구의 ‘마지막 황금기’라고 평가하는 이가 많다.

그렇기에 이번 월드컵은 한국 여자축구에 중요한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선수들의 염원대로 이번 월드컵이 여자축구가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중요한 발판이 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선수들이 짊어진 짐의 무게가 조금이라도 줄어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윤승재 스포츠한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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