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US여자오픈 우승한 이정은6. 브라보앤뉴 제공

이정은6(23)와 행크 헤이니(64). 두 사람 모두 이렇게 묘한 인연으로 얽히고설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낯설고 물선 LPGA투어에 건너와 실패한 선수가 되지 않기 위해 혼신을 다하고 있는 투어 신인 이정은6와 한때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의 스윙 코치로 이름을 날렸고 여전히 골프계 저명인사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행크 헤이니는 서로 얼굴을 마주하거나 얘기를 나눌 기회도, 필요도 없는 그런 관계다. 이정은6와 행크 헤이니의 얽힘은 우연에 가까운 기연이었다.

지난 5월 29일(한국시간) PGA투어가 운영하는 시리우스XM 라디오 쇼에 출연, 스티브 존슨과 함께 방송하면서 숫자가 따라붙는 한국 선수의 성을 언급하면서 얄궂은 기연이 시작됐다.

제74회 US여자오픈을 전망하면서 그는 “US여자오픈에 베팅한다면 한국인에 걸겠다. 누구인지는 말할 수 없다. LPGA투어에 여섯 명 정도?”라고 했다가 “아니다.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씨다. 성은 말할 수 있더라도 이름은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함께 방송한 스티브 존슨은 “한국 여자골퍼들은 이름이 똑같아서 이름에 번호를 붙이기도 한다. 이씨가 많아서 1번, 2번, 3번 식으로 번호를 붙인다. 그중 한 명이 리더보드에 올라왔고 이름이 이씨 6번이었다”고 했다.

이 방송을 들은 재미교포 미셸 위가 바로 SNS를 통해 인종차별, 여성 비하 발언이라고 비판하는 글을 올렸고 아니카 소렌스탐, 카리 웹 등이 공감을 표했다. 결국 PGA투어 측은 “헤이니의 발언은 여자 골프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됐으며 PGA투어와 시리우스XM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다”며 그의 방송 출연을 정지했다. 이 결정에 타이거 우즈는 “징계를 받을 만하다”고 코멘트했다.

행크 헤이니는 정확하게 한국 선수의 이름을 알지 못해 이정은6를 적시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이정은6의 우승을 예언한 셈이 됐다. 물론 그는 LPGA투어에서 많은 한국 선수들이 활약하지만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투로 ‘개그를 하듯’ 발언했을 뿐이다. 어느 정도 가능성을 담은 예언이 아니라 장난기 농후한 우스개 예언이었던 셈이다.

그는 ‘LEE’씨 성을 가진 한국 여자선수가 많다고 말했지만 현재 LPGA투어에서 활약하는 한국선수 중에는 이씨가 4명, 김씨와 박씨가 각각 3명이나 되어 한국 선수에 대한 그의 관심이 얼마나 빈약한가를 보여 준다. 그렇더라도 그가 이정은6를 염두에 두고 발언한 것을 보면 전문 스윙 코치의 눈으로 이정은6의 가능성을 읽어냈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개그 발언의 소재로 삼았던 이정은6가 6월 3일(한국시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의 컨트리클럽 오브 찰스턴 골프코스에서 펼쳐진 마지막 라운드에서 드라마 같은 플레이로 데뷔 첫해에 미국의 자존심이 걸린 US여자오픈 트로피를 차지하자 곧바로 “이정은6의 US여자오픈 우승을 적중시켰다”는 트윗을 날렸다. 유명 골프 교습가로서의 가볍기 짝이 없는 그의 품격을 짐작케 한다.

헤이니는 이정은6 우승 직후 트위터에 “한국 여자선수들이 이번 US여자오픈에서 강세를 띨 것이란 내 예상은 통계와 팩트에 기초한 것이었다. 한국 여자선수들은 LPGA투어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내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내 대답은 같을 것”이라며 자신의 한국인 및 여성 비하 발언을 희석시키는데 급급했다.

1~3라운드 선두에 나섰던 일본의 히가 마미코를 비롯해 셀린 부티에(프랑스), 류 위(중국), 미국의 코다 자매, 재미교포 아마추어 지나 김 등 강력한 우승 후보들 틈에서 기회를 엿보던 이정은6의 플레이는 마지막 라운드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공동 선두 셀린 부티에, 류 위에 2타 뒤진 6위로 마지막 라운드에 나선 이정은6는 마치 행크 헤이니의 예언을 증명이라도 하듯 무서운 평정심과 저력을 발휘하며 합계 6언더파 278타로 공동 2위(유소연, 엔젤 인, 렉시 톰슨)에 2타 차 우승을 확정지었다.

‘이정은6’의 별명이 왜 ‘핫식스’인지를, 결코 개그의 소재가 될 이름이 아니란 것을 미국의 골프팬들에게 확실하게 증명해보인 라운드였다. 여기에 행크 헤이니는 본의 아니게 ‘이정은6’를 알리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셈이 되었다.

이정은6는 2017년 KPGA투어에서 상금, 대상, 다승, 평균 타수 등 주요 4개 부문을 석권했고 여기에 베스트 플레이어, 인기상까지 6개 상을 모조리 휩쓸었다. KLPGA투어 동명이인 선수를 구분하기 위해 이름 뒤에 숫자 ‘6’을 붙였는데 6관왕에 오르면서 ‘6’은 행운의 번호가 됐고 ‘핫식스’라는 별명도 붙었다.

이번 US여자오픈에서도 6언더파로 첫 우승의 영예를 안아 이래저래 ‘6’은 그와 불가분의 숫자가 되었다.

이로써 이정은6는 1998년 박세리(40), 2005년 김주연(38), 2008 ^2013년 박인비(31), 2009년 지은희(33), 2011년 유소연(29), 2012년 최나연(32), 2015년 전인지(25), 2017년 박성현(26)에 이어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한 10번째(9명째) 한국 선수가 됐다. 올 시즌 LPGA 투어 13개 대회에서 한국인 우승은 7승으로 늘었다.

방민준(골프한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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